방황하는 마음

by 나연

직장을 떠난 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다.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놀랍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매우 당황하는 사이 일주일이 그냥 지나갔다. 계속 일을 하지 않아서 나중엔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만 모른 채, 아무런 성장도 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고립된 모습을 수없이 상상하느라 몇십 년을 몇 번이나 뛰어넘었다가 돌아온 기분이 든다.


불안해서 다른 학교의 기간제 교사 모집 공고를 훑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불안해할 것을 미리 알고 조치를 취해 두었다. 새 학기가 개학하는 3월 2일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도록 2월 말에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그럼에도 지금이라도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일을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순간 차오른다.


일자리를 새로 구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어떻게 나를 돌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모르게 된다. 뭘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지 누군가 물어보면 나는 늘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바깥에 계속 휘둘리니 나 자신을 너무 모른다. 그런 것들을 시간을 들여 알아낼 마지막 기회라고 되뇌며 일자리를 구하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늘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어떤 행동을 유지하거나 그만두게 만드는 게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걸 알지만 다른 방식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인사이드 아웃 2'에 나오는 불안이가 나의 내면에서는 아직도 리더인 듯.


달리 올해를 살아갈 뾰쪽한 계획이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원래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계획에 맞게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힐난하다 가시적이고 분명한 신체적인 병을 얻은 적 있다. 그때부터 해야 할 일은 결국 하게 되어 있으니 많은 계획을 세워 인생의 숙제를 늘리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무계획으로 많은 것을 미루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계획은 없더라도 글은 써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는 일이다.


요즘 있었던 일을 조금 돌아보면 좋겠다. 계속 일을 할지 말지 불안해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다양한 감정들이 지나갔는데 글로 쓰지 않아 많이 놓쳐버렸다.


올해는 무엇보다 고3 담임으로서 학생을 졸업시킨 두 번째 해였다. 이번 학생들과는 좀 더 깊게 라포를 형성한 느낌이 들었고, 그만큼 오고 가는 인사도 길었다. 학생들을 위한 말을 해주어야 하는 마지막 날에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다 잊어버리고 그냥 일 년 동안 오히려 고마웠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가장 진심이었다. 이제 다시 고3 담임을 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렇게 성실하고 밝은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더 친숙하고 좋은 선생님이고 싶었다. 하지만 주로 출석 문제나 진학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아마 아직도 서로를 잘 모를 것이다. 그건 내가 부족한 탓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은 친해지는 것인데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쓸데없다고만 생각해 버리곤 했기 때문에.


이번 해에 지각을 제일 자주 하던 아이에게 가장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애가 늦으면 웃으며 너스레를 떨고 일찍 온 날이면 일부러 으스대며 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애를 봐준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우리가 친해진 건 그 애가 그런 식으로 먼저 다가와 주었기 때문이라는 걸 학기가 다 끝나갈 때쯤 깨달았다. 많은 아이들이 그런 식이었다. 그 애들에게 나는 뭔가를 희생하거나 내어주었다기보다 오히려 많은 것을 받았다.


동료 선생님들도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무엇보다 선한 리더를 만나 순탄한 직장 생활을 했다. 리더는 선함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랜 사회생활을 하고도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대하는 것은 많은 내적 노력이 필요하다. 똑똑하고 처세가 좋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빠르게 올라간다. 인기가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아랫사람 마음 보듬는 것은 어쩌면 시간 낭비일 수 있다.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부원들의 의견을 먼저 듣는 리더였다. 어떻게 저분은 저런 인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에서 선한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 있다. 우리는 그분을 어느 때나 지지하고 옹호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직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많이 배우고 간다. 늘 상대적으로 부족한 나를 생각하게 되어 조금 괴롭기도 했었지만 전체적인 값은 긍정적이다. 직장은 돈 버는 일 이상의 어떤 의미가 늘 있었다. 아무래도 인생 전반에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지나간 시간이다. 끝이자 시작에 섰다. 여담인데 직장에서 짐을 완전히 챙겨 나온 다음날부터 경미한 이석증에 시달리고 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갈 곳을 잃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인가 싶고.


입춘이 지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뭔가 바뀌지 않으려나 생각했나 보다. 은근히 실망하고 있는 마음이 어이가 없다. 한편으로는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공공연하고 은밀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뭐 할까 고민하다 만화방에도 갔었다. 그러다 열다섯 살 때 읽었던 '후르츠 바스켓'이라는 만화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인기가 없는 너무 맹한 여자 주인공과 의도적으로 편성된 듯한 명대사들이 다소 오글거렸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이 여전히 좋았다.


그중 지금 적용해 볼 수 있는 하나는 이런 게 있다. 네가 너무 많은 빨랫감 속에 파묻혀서 발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해 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발밑에 있는 빨래부터 개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일이 다 끝나 있어.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어떤 먼 곳을 겨냥하는 장기적 계획을 세울 생각일랑 접고 그냥 눈앞에 있는 흥미로운 것들에 집중하면서 살아보자 생각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 느끼는 호불호에 대해 기록하면서 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닿을 곳에 닿아 있을 것이다. 이번 생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면서 잘 살고 싶다. 놀먹잠(놀고먹고 잠) 속에서 작은 발견들을 놓치지 않길 바라며, 순탄한 백수 생활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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