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 조지아 주에서 우편물 하나가 배송됐다. 열어 보니 Ann할머니가 보내온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 한정판 사진집과 DVD 세트. Ann과 한국의 우리 집에서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낸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메일로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Ann이 요즘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계신다기에, 큰 딸 민주도 한동안 푹 빠져서 드라마 배경지였던 강화도 역사 투어도 다녀오고, 개화기 역사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에 소포를 보내셨나 보다. 선물을 사서 포장하고, 우체국까지 직접 운전해 가서, 35달러가 넘는 비싼 배송비를 지불하고, 굳이 ‘한국’으로, ‘한국 드라마’ 기념품을 보내신 정성에 미소가 지어진다. 카드에서는 “대체 언제 조지아로 놀러 올 수 있는지?!!!” 물으신다.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을 덧붙이시며.
88세의 나이에도 특별히 복용하는 약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고, 직접 운전하고, 남편의 매끼 식사 준비를 직접 하시니 언젠가 우리 가족이 방문한다면 모두를 차에 태우고 신나게 아틀랜타를 가이드해 주시며 맛집 탐방을 하게 될 것 같다.
Ann과의 만남에 대해 1편을 쓴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조지아에서 온 소포를 받아 들고 이제야 늦은 두 번째 이야기를 남긴다.
[Ann은 미국 텍사스 출신으로 조지아 주에 거주하시는 1932년 생, 올해 88세의 백인 할머니. 우리 가족이 2년 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할 당시 친하게 된 Hide 할머니의, 베스트 프렌드인 Sherry의, 며느리인 Brittainy의, 친할머니이다(한 마디로, 전혀 모르던 분).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한국에 와보는 것이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였다가 우연히 저 여럿의 지인을 돌고 돌아 우리 가족에 대해 전해 듣고는 2년 전 나의 이메일과 휴대폰 번호만 달랑 든 채 한국 방문, 우리 집에 약 일주일간 머무르셨다. 비영어권 나라 첫 방문, 아시아 첫 방문, 한국 당연히 첫 방문. 학교에서 10년 간 영어를 가르치셨고, 초중고등학교 도서관 사서로 20년 간 일하셨다]
이메일로 미리 본인의 차림새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신 덕분에-검정 바지, 베이지와 검정이 섞인 블라우스, 두툼한 워킹슈즈에 파랑과 회색이 섞인 백팩을 메겠다- 금방 Ann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한 시간 가량 늦어질 것이라며 남편 Jim이 다급히 보내온 이메일도 미리 확인하여 착오 없이 한 시간 늦게 마중 나간 터였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은 이미 Ann의 짐을 서로 밀고 당기며 시끌벅적하게 차에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Ann할머니가 과연 우리의 깜짝 선물을 좋아하실까 속닥거리며 상기된 표정으로 방으로 안내하니, 기대했던 반응보다도 훨씬 더 감격해하신다. 선물로 드린 지창욱 주연의 드라마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시기에 저녁식사가 늦었다고 내가 슬그머니 끼어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꿈에 그리던 한국에서의 첫 끼
[한국에서의 첫 식사는 소불고기, 미역국, 계란말이, 김치, 밑반찬을 차려낸 집밥. 86년 생애 첫 젓가락질, 첫 한식]
오시기 전 미리, 못 드시는음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대체로 가리지 않지만 산낙지나 익히지 않은 해산물은 못 먹을 것 같다는 대답에 아마도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산낙지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고 결론 내리신 게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가능한 모든 걸 한국식으로 경험해 보실 수 있도록 첫 식사에 일부러 젓가락을 준비했다. 포크를 드릴지 여쭤보자, Nope! 사양하시고는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반찬을 집어 입 속으로 가까스로 골인. 난생처음 시도해보는 젓가락질에 처음 몇 번은 반찬을 떨어뜨렸지만 이내 작은 멸치 집기도 성공하셨다.
"한국 드라마에서 식사 장면이 나오면 일시정지 해두고 화면을 확대하여 반찬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어떤 맛일까 상상해보고는 했는데 내가 이걸 실제로 맛보다니~~~!!!" 하며 연신 감격해하시는 모습에 아이들도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밥과 국을 꽤 많이 담아드렸음에도 한 그릇 더! 추가해서 두 번째도 싹싹 비우셨다.
평범한 일상 공유
[한국어로만 쓰인 나의 책을 굳이 구입해 가셨다]
식사 후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하시겠냐는 나의 제안에 (긴 비행으로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대답을 예상했지만) Why not~? 하며 함께 나섰다. 여기는 문구점, 저기는 빵집, 옆에는 서점… 무엇 하나 휘휘 건성으로 보지 않고 뭐 하는 곳인지, 어떤 걸 파는지 들어가 직접 보고 일일이 물으신다.
작은 동네 서점으로 들어가 마침 한 달 전 출간된 나의 책을 찾아 보여드리자 반가워하시며 오직 한국어로만 쓰인 그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으로 성큼성큼 향하셨다.
긴 여행 동안 가방을 무겁게 만들까 걱정되는 마음에 국제우편으로 보내 드릴 테니 여기서 사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꼭 서점에서 직접 구입하시겠다며 굳이 값을 치르셨다.책에 Serendipity세렌디피티(우연히 만나게 된 인연, 행운, 운명)라는 문구와 싸인을 남겨드렸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봉투에 고이 담아온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신다. 아담하면서 잘 가꿔진 정원이 아름다운 조지아의 집 사진과 89세의 남편 Jim, 다섯 명의 증손녀와 함께 찍은 대가족 사진.
[아이 선물로 가져오신 그림책 “Me with you”-책을 구입한 호튼스 서점&기프트샵 (Horton’s Books & Gifts, 1892년 오픈)의 기념엽서까지]
둘째 유진이에게 선물로 가져오신 그림책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 주신 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설레는 첫날 일정은밤 10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다음 날 아침, 살그머니 거실에 나가 보니 늦잠을 주무실 거란 예상을 깨고 이미 창 밖 구경이 한창이셨다. 별다르게 좋은 경치 하나 없는데 맞은편 건물 구경, 오가는 사람 구경, 도로 위 차 구경…… 바깥세상 하나하나가 궁금하신 눈치다.
아이의 감기 때문에 외출 전 소아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함께 가고 싶다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셨다. 동네 작은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고 약국에서 약을 받는 짧은 순간에도 유심히 내부를 둘러보신다.
아이가 유치원 차를 탈 때도 나와 나란히 서서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인사해주고, 다음으로는 큰 아이의 학교 방문. 방학이라 조용한 교실, 도서관, 운동장 등을 살펴보시며 특히 도서관에 책이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어떤 책들이 있는지 관심을 가지신다.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서도 바깥세상이 궁금하여 고개를 쭈~욱 빼고 둘러보며 궁금한걸 아이에게 부지런히 물으시는 모습이 영락없이 친구집에 놀러와 설레이는 여학생 모습이다]
이 순간을 위해 15시간을 날아왔다, 드디어 한국 문화 체험
한국 방문 전, 가장 가보고 싶다고 하신 곳은 ‘강남 여행자 센터의 한류 룸’(나는 처음 들어본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미리 연락해보니 마침 공사 중이라는 청천벽력. 지인들에게 수소문해서 을지로에 위치한 한국관광공사의 내부에도 한류 관련 전시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도착해보니 별(스타들) 천지다.쾌적한 공간에 여러 가지 무료 체험과 전시가 있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나 아이들에게 그만이다.
[가상현실 VR체험에 풍덩~ 전통부채와 열쇠고리 만들기도 적극 참여. 한국관광공사 내에서 체험은 대개 무료로 이루어진다]
[한식 전시관과 식당. 메뉴, 맛, 모양, 가격, 청결도 모두 훌륭해서 외국 친구가 방문한다면 꼭 한번 가보기를 추천! 가평 막걸리를 곁들인 된장찌개를 맛있게 드셨다]
[가장 좋아하셨던 것은 한복체험! 드라마 중 사극을 가장 좋아하시는데 선덕여왕 같아 보이냐며 싱글벙글이시다. 사진 잘 나오는 스팟을 신중하게 고르시고 김치이이~ ]
[명동 길거리표 랍스터와 가리비 치즈구이, 즉석에서 갈아주는 생과일주스에 감탄사와 함께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셨다]
[최고의 순간은 지창욱의 달력을 발견했을 때!]
['육룡이 나르샤'의 태조가 지내던 곳인가?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이 이곳에서 한글을 만들었단 말이지?" 중얼거리시며, 영어 해설사의 깜짝 퀴즈에도 척척 답을 맞추셨다]
[경복궁 내 70-80년대를 재현해둔 거리를 둘러보시며 "오~한국에 이런 다방이 유행할 때 나는 마흔 즈음 이었구먼!!"]
[인사동 거리를 구경하시며 지인들을 위해 가볍고 작은 수공예 기념품 구입]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도 오래도록 앉아 모든 음식을 골고루 맛보며 맛있다고 연신 감탄하셨다]
[속이 뻥 뚫리는 '난타'공연! 정동극장 전통무용극 '련'을 보시고는 감동으로 거의 눈물을 글썽이며 나오셨다. 퇴근 후 남편이 모시고 간 밤투어에서는 종로 조계사와 남산도 구경]
[틈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대화하며 가족처럼 보낸 시간. 첫째 민주에게는 금박 장식과 초록색 하드커버가 아름다운 빨강머리앤 책을 선물로 주셨다]
[롯데타워 123층 전망대- 122층 유리창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지~]
시차 적응 기간도 없이 매일 경복궁, 명동, 롯데월드 등등 강행군이었지만 힘든 기색도 없이 활기차게 여행을 즐기시니 함께 하는 우리도 즐거웠다. 늦게 퇴근한 남편이 차로 야경 투어를 제안하자,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지!!" 라며 차에 겅충 올라타 밤 12시가 넘도록 한강, 남산, 조계사 등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함께 걸을 때도 나보다 훨씬 큰 255mm의 발과 165cm의 키로 성큼성큼 내딛으시면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이다. 백팩과 힙색에는 각종 영양제와 물통, 카메라 등을 넣고, 기대앉기 편한 등받이 쿠션까지 둘러매고 다니시느라 꽤 무겁지만, 들어드리겠다는 나의 제안에도 사양하고 직접 가지고 다니신다.
나의 어머니가 6.25 전쟁통에 태어나셨다고 하자, Ann은 영화 '국제시장'을 봐서 그 시대 배경을 알고 있다며, 대학 친구 중 몇몇도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Ann의 부모님은 미국 대공황(1930년대)의 어려움을 몸소 겪으신 세대라고. 나이가 여든인 사람의 부모도, 나이가 마흔인 사람의 부모도, '부모' 세대에는 그들 나름의 아픈 시절이 있고 '자식' 세대는 그들 나름의 힘든 시기가 있다.
다시, 미국으로
Ann은 우리 집을 떠나신 후 강북에 위치한 호텔로 이동하여 미국 내에서 구성된 그룹 투어 일행과 합류해 2주 간 경주, 대구, 부산, 일본을 거쳐 다시 조지아로 돌아가셨다.
얼마 후 장문의 이메일을 받았다.
"...... 선물로 받은 지창욱의 포스터는 내 딸들이 각각 5살, 7살 때의 사진 액자 옆에 잘 붙여두었다. 생각해보니 이제 그 딸들의 아들이 지창욱과 비슷한 나이이다. 3년 간 한국 여행을 염원하고 1년 간 여행사와 일정을 알아보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너희 가족을 알게 되고 집에서도 묵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걱정하던 남편도 마침내 흔쾌히 응원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매일 매 순간 한국 여행을 돌이켜보곤 하는데 여전히 현실이 아닌 꿈 같이 느껴진다...... 나의 소원을 이뤄줘서 고맙다. 모든 순간이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집에서 함께 밥을 차려 먹고, 동네 골목길을 걸어보며,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한 것이었다. 너희의 소중한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어 고맙다......"라는 따뜻하고 세심한 내용이었다. 민주에게 선물해주신 빨강머리앤 책의 앤 Anne처럼, 긍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책을 좋아하고, 늘 좋은 면을 찾아내며, 건강하고, 소녀 같은 앤 Ann과의 만남이 우리 가족에게 더 큰 선물이 되었다.
어떤 선물을 보내면 좋을지 딸과 함께 오랜 시간 고민했다며 DVD도 하나 보내오셨다. 미국 중남부 텍사스 출신인 Ann의 성장배경과 비슷한 면이 많은 영화라며, 마찬가지로 중남부인 루이지애나 여성들의 우정과 삶, 역경과 행복을 그려낸 Steel Magnolias라는 오래된 영화였다. 때로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도 이런저런 다른 방식을 통해 나를 전달하고, 서로를 더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후로도 "손녀가 얼마 전 딸을 낳았다, 눈이 많이 내려집안에 고립되어 있는데 친절한 이웃이 식료품을 사다 주고 길가의 눈을 치워주었다, 딸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다"는등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전해주신다. 미국 남부에서는 아이스티를 많이 마시는 문화가 있다며 내가 드린 보리차를 시원하게 우려내 마셨다고도 하신다.
한국에서 필요하신 게 있는지 여쭤보자, 곶감과 국화차가 많이 생각난다고 하셨다.
오늘, 우체국에 가서, 꾹꾹 눌러쓴 카드와 함께 국화차한 박스를 보내드리려고 한다.
- 작년 겨울에는 캘리포니아의 Hide가 한국에 방문하여 우리 집에서한 달간 함께 지냈다. 큰 딸 민주는 4학년 겨울 방학 두 달과 중학교 입학을 앞둔 지난 겨울방학 한 달, 혼자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Hide에게 가서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왔다. 영어공부를 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고, 홈스테이 유학도 아니었다. 그냥, 서로 그립고 보고 싶어서다.
캘리포니아 작은 식물원의 야외 콘서트장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으며 만난 Hide와의 인연이 또 다른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이 징검다리가 되어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세렌디피티 Serendipity
'넓은 것은 오지랖, 깊은 것은 정, 많은 것은 흥 뿐이고
좁은 것은 세상, 얇은 것은 지갑, 적은 것은 겁뿐인 가족'
'겁 없이 살아 본 미국' 책은
평범한 40대 회사원 남자가 미국 경영전문대학원(MBA) 입학부터 졸업하기까지,
10년 차 워킹맘이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 무료 영어강좌에서 수십 개 나라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알파벳도 구분하지 못하던 큰 딸이 2년 만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완독 하고,
Yes/No도 모르던 작은 딸의 미국 유치원 적응기까지, 다양한 미국의 교육 현장 이야기.
전화도 터지지 않는 서부 국립공원 열 곳에서 한 달 이상의 텐트 캠핑,
현지인들과의 소중한 인연,
경험이 없는 덕분에 좌충우돌해 볼 수 있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리워지는 장소와 사람과 음식이 생겼고
나이와 국적에 대해 견고하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친구 삼을 수 있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고,
서로 다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며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고
낯선 곳에 뚝 떨어져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해서 주저앉아 울고만 있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