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돌아보면 선물 같은 한 해였다.
어렸을 때, 내가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이었으니 아마 네 살쯤 되었으려나. 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 나는 네다섯 살이던 해 겨울 우리 가족은 아산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주말에 서울에 가서 다음날 오시기로 한 그해 크리스마스이브는, 언니와 내가 난생처음 부모님 없이 단둘이 집을 보는 날이었다.
그날은 며칠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되었다.
저녁밥은 이렇게 챙겨 먹고, 다 먹은 후 정리는 이렇게 해두고, 밤에는 이렇게 모든 문을 꼭 닫고 잠가야 한다고 몇 번을 가르쳐준 후 엄마 아빠는 집을 떠났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함박눈이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언니와 난 둘이서 저녁을 먹고 비장하게 온 집안의 창문과 현관문을 잠근 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잠에 들었다. 현관문은 안에서 안전장치까지 잠근 터라 열쇠가 있어도 밖에선 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저히 밀폐된 집안에서 언니와 둘이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아직 부모님이 도착하기도 전에 잠에서 깬 우리 머리맡에는 예쁘게 포장된 큼직한 선물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부모님도 안 계시고 온 집안 문을 다 잠갔는데도 마치 마술처럼 놓여있는 선물을 보고 나니 산타 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산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도착하고도 몇 시간을 우린 흥분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엄마 아빠도 꽤나 놀란 표정으로(연기 천재인 듯) 산타 클로스는 문을 잠가도 벽을 통과해서 들어올 수 있나 보다 라고 했고, 그 기적을 생생하게 경험한 나와 언니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나는 산타의 존재와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믿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고 말해도, 나는 그의 존재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누군가 "산타가 아니라 부모님이 주는 선물이야"라고 말해도, "아니야, 난 엄마 아빠가 집에 없는데도 받은 적 있거든?" 이라며 산타 클로스가 존재한다는 논리를 펼칠 수 있었다.
정작 그 해 크리스마스 때 받았던 선물이 뭐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후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매해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하고 더 이상 어디에도 그 선물들의 흔적은 없지만, 아주 어릴 때 경험했던 산타 클로스의 기적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돈으로도 못 사고 만질 수도 없지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강렬한 경험. 가장 소중한 선물은 그런 게 아닐까.
그해의 크리스마스 뒷이야기를 들은 건 2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엄마 아빠는 우리에게 산타 클로스의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미리 몇 주 전부터 그날 집을 비울 거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두고, 그날 밤 현관문이 아닌 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깊이 잠든 우리들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두었다. 게다가 과감하게 옆방에서 태연하게 주무신 뒤 아침에 일찍 나갔다가 우리가 일어날 때쯤 집에 도착한 것처럼 귀가하신 것이다. 그날 서울엔 간 적도 없었고 외박도 없었으며, 밤에 몇 시간 짧은 외출만 있었을 뿐이었다. 어린애들을 속이는 건 참 쉬운 건가 보다. 우리는 어찌나 철석같이 믿었던지.
엄마 아빠의 번쩍이는 창의력과 행동력으로 우리는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내 인생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뉴욕에 처음 온 건 2003년 12월 26일이었다.
플로리다의 포트 로더데일이란 휴양지에서 인턴십을 하던 시절 일 년간 미국에 살며 엘에이, 올랜도,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등 꽤 많은 미국 국내 여행을 다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이자 첫 여행지가 뉴욕이었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 홀로 집에 2"를 매 해 보고 자란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케빈이 돌아다녔던 뉴욕의 이곳저곳을 가 보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무엇보다 케빈이 엄마와 재회한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싶었는데,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에 뉴욕에 갈 수 있게 되어 몇 주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들썩들썩했다.
플로리다에서 동양인을 볼 수도 없던 동네에서 지내다 뉴욕에 와 보니 그동안 답답했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거리엔 동양인들과 외국인들, 관광객들이 넘쳐났고 게다가 한국인들도 많아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신기할 정도였다. 한국에서 뉴욕에 와서 한국인들을 보면 별 감흥이 없겠지만,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살며 향수병을 키워가던 나는 뉴욕에 와서야 그동안의 우울감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뉴욕에 산지 십 년이 넘었다.
처음 여행으로 와 봤던 때가 12월이어서 그런지 찬바람 부는 12월 이맘때 뉴욕의 거리를 걷는 걸 참 좋아한다. 관광으로 짧게 와서 추운 날씨에 지도를 보며 찾아다녔던 뉴욕의 유명한 베이글, 뉴욕 출신 동료가 꼭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뉴욕 피자,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왔던 컵케익 등 먹거리가 너무 다양해서 며칠 사이에 다 먹어볼 수가 없었다. 볼거리는 또 얼마나 많은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그리니치 빌리지, 9/11 테러가 난 쌍둥이 빌딩이 있던 그라운드 제로, 그 바로 옆 쇼핑의 천국이라는 센츄리 21 등, 맨해튼이라는 작은 땅은 마치 테마파크처럼 온갖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일 년을 봐도 다 못 볼 것 같은 관광지와 맛집들을 다니기에 3일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자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3박 4일 간 최대한 많이 가 보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도 않고 누볐던 생각을 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도시에서의 생활과 여유가 새삼 감사하다.
뉴욕에서 일 년만 살아도 여기 있는 유명한 곳들을 다 보고 공연도 마음껏 볼 텐데 싶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일상을 늘 여행하듯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핫하다는 장소나 레스토랑들의 인기가 사그라들 때까지 한번 가볼 새 없이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매년 시간은 점점 더 빨리 간다. 어른들이 일 년이 찰나처럼 지나간다고 하던 말씀이 점점 이해 가는 것은 나도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이겠지.
얼마나 세월이 빨리 갔으면 "쏜살같이", 쏜 화살같이 빨리 간다고 했을까.
나이 들수록 시간이 점점 빨리 지나간다는 걸 깨달은 후엔, 매번 달이 바뀔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아 3월이다. 이번 달도 보람 있게 보내야지. 벌써 6월이네. 이제부터라도 뭔가 알차고 뿌듯한 걸 해야지. 9월부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다이어트는 11월부터, 올해가 끝나기 전 어떻게든 다시 시작하자.
어떤 한 가지 일에 매달리다 보면 몇 주가 가고, 가끔 컨디션이 안 좋아 며칠 앓고 나면 또 그 달이 훌쩍 지나간다. 11월에 친구가 놀러 오기로 해서 준비를 하고, 와서 며칠 같이 놀다 가니 그 달이 지나갔다. 11월에 있었던 다른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알게 되어 아마존에서 주문해서 먹어보고 효과가 좋은지 느껴보는데 한 달이 가고, 피부에 좋다는 화장품을 주문해서 써 보느라, 처음 들어보는 획기적인 다이어트를 해 보느라 또 한 달이 간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1월에 세웠던 올해의 계획도 매달 새로 계획했던 것도 딱히 지켜진 게 없고, 사실 뭐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주어진 삶이라 어떻게든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12월의 끝자락이다.
올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여름학기에 논픽션 워크숍 수업을 들었던 것이다. 창작적 글쓰기 (Creative Writing) 전공을 하면서 그동안 픽션, 즉 소설 쓰기 워크숍만 들어왔다.
여름에 처음 만난 교수님은 특이하고, 섬세하면서도 괴짜 같은 시인이었다. 게이에 나이가 60대지만 50대 초반 같은 외모를 나름 자랑스러워하고, 맨해튼에서 나고 거의 평생을 이곳에서 자란 순수 혈통 뉴요커다. 수업에 자주 늦고, 트럼프 대통령 험담을 하는데 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소설을 평가할 때는 보통 작가의 인성이나 논점은 평가대상에서 배제되지만, 논픽션, 즉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글은 기본적으로 자서전의 목소리와 형태를 띠게 된다. 두 학기에 걸쳐 다른 어디에서도 공개한 적 없는 내 경험과 생각을 소재로 글을 쓰게 되었고, 내 글의 평가에는 내 인성과 시각까지도 함께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글을 여러 개 읽은 교수님은 내 인생이 누구보다 독특하고 특별하다고 했다. 내가 백 년은 족히 산 것 같다며, 그것만 하나하나 다 풀어 글을 써도 평생을 쓰겠다고 하셨다. 나를 라이프 코치로 고용하고 싶다며 그쪽으로 나가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시는데, 나는 겉으론 웃고 넘어갔지만 사실은 마음 깊이 감동했었다.
누군가 내 인생을 그렇게 한마디로 축약시켜 표현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다. 시인의 남다른 표현력이란.
그렇게 나 자체로 인정받는 것만으로 자신감이 생겼고, 자연히 글에도 드러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소설보다는 논픽션, 에세이 같은 사실적인 글의 장르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지금으로선 더) 많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갈수록 위로받고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그 수업이 아니었다면 브런치에 쓴 글들을 하나라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 큰 가르침이 되어서, 두 학기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진심을 담은 감사 이메일을 썼다.
감사 표현을 하는 덴 돈이 들지도, 큰 수고를 필요로 하지도 않지만
그 어떤 선물보다 깊은 감동을 준다.
진심을 담은 감사와 칭찬은 듣는 이의 영혼을 건강하게 해 준다.
첫 뉴욕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트리였다.
3박 4일 일정 중 하루는 종일 투어버스를 탔는데, 한국인 가이드가 "라카펠러 센터"라고 발음해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에게 록펠러 센터라고 알려진 이름은 영어로는 Rockefeller로, "Rock"과 "feller"사이에 e가 있기 때문에 "롹커펠러"라고 말하는 게 맞다. 현지에서 록펠러라고 하면 아마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12월 26일에 처음으로 뉴욕에 와서 본 록펠러 센터의 트리는, 미국엔 이렇게 큰 나무가 있구나 싶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였다. 사진을 아무리 잘 찍어도 뒤에 수십 명이 함께 찍힐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감동적이었다.
뉴욕에 오고 몇 년이 지난 후엔 여행 왔을 때의 열정은 이미 시들해져서, 록펠러 센터의 트리도 안 보고 지나갔던 겨울이 많았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시 처음의 열정을 기억하고 초심을 다지기 위해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면 트리를 보러 가는 게 연중행사가 됐다.
2018년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공수해온 노르웨이 가문비나무를 썼고, 스와로브스키의 새로운 트리탑 별 장식을 선보였다. 2004년 후 처음으로 바꾸게 된 별 장식은 12명의 엔지니어, 예술가와 장인들이 힘을 합쳐 무려 2년에 걸쳐 만든 것으로 그 무게가 약 400 킬로그램에 달한다고 한다. 앞으로 십여 년 간 저 별 장식이 매년 트리의 꼭대기 자리에서 빛나게 될 것이다.
트리 가까이에 가면 우리가 아는 익숙한 소나무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트리 주변엔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러 온 사람들로 넘쳐나서 온 세계 이렇게 많은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보통은 업스테이트에서 공수해오는 가문비나무(Spruce tree)를 쓰고, 1월 초까지 트리를 볼 수 있지만 1월에 가까워질수록 나무가 조금씩 시들어서 듬성듬성 뼈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경험에 비춰 봤을 때 12월 초나 중순에 가야 가장 풍성하고 나무향 가득한 트리를 볼 수 있다.
트리 장식은 24시간 밝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가도 볼 수 있지만, 낮보다는 밤이 트리를 감상하기에 더 제격이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삭스 Fifth Avenue 백화점의 홀리데이 라이트 쇼도 밤에 보는 것이 더 드라마틱하다. 매년 최대한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가 보려고 평일의 낮과 밤의 어중간한 시간에도 가봤지만, 크게 붐비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올해는 새벽 서너 시에 한번 가볼까 싶다.
삼십 대가 지나고는 20대 때보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에 담담해졌다. 어떻게든 몸 건강하게, 특별히 나쁜 일 없이 무탈하게 한 해가 "안녕히" 지나갔으면 그럭저럭 잘 산 일 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 해가 갈 때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버둥 치지 않게 된 것도 나이 듦이 주는 선물 같다. 소소한 것에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올여름엔 친구를 통해 브런치에 관해 알게 되어 글을 쓰게 된 것도 올해가 나에게 준 큰 선물이다.
초여름이었던 그날은 종일 비가 내려서 하늘엔 구름이 자욱했지만 꽤 선선하고 공기도 깨끗했다. 우린 환히 밝혀진 브라이언트 파크에 앉아서 식어가는 루이보스 티를 홀짝이며 몇 시간이나 수다를 떨었다
작년에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대해 처음으로 들어봤지만, 딱히 이곳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아무나 글을 올릴 수 없다는 희소성의 매력이 있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론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며 적극 추천하는 브런치 경험자인 친구에게 에너지를 받아 집에 와서 그날 밤 바로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불합격. 돌아보면 내가 생각해도 타겟층이 없고 재미도 없는 애매한 글이었다.
두 번째 시도 때는 워크숍에서 쓰듯 내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여러 개 써서 지원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아, 뭔가에 지원해서 합격한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고, 짜릿했다.
그렇게 2018년 7월 24일, 올해를 5개월 남겨둔 시점에 브런치를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적어둔 메모들을 바탕으로 하나씩 글을 써가는 중이고, 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여행에 관한 글도 써봤다. 독자분들이 하나 둘 생기니 너무 신기하고 감사해서 정말 한 분 한 분 손을 잡고 인사를 드리고픈 심정이다. 언젠가 브런치 글들을 바탕으로 책을 출판하게 된다면, 몇 페이지를 할애해서라도 구독자분들의 성함을 모두 실어 감사 표현을 할 예정이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남자들 앞에서 낯을 가리는 편이라 남사친이 있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남사친이라 부를 수 있는 음악 하는 친구가 최근 트루디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타이틀 곡의 피처링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내 일처럼 기뻤다.
왜 뮤비에는 출연 안했냐고 물어보니 뮤비 촬영 땐 이미 미국으로 컴백했었단다.
결혼 후엔 얼굴 한번 볼 기회도 없이 문자로만 가끔 연락하는 사이지만, 진심을 담은 축하의 말을 건네며 더 나이 들기 전에 이렇게 하고픈 걸 다 하며 살라고 했다. 다음번엔 피처링에 그치지 말고, 가능하면 뮤비에도 나가고, 니 앨범도 내고, 니 뮤비도 찍고, 네가 아티스트로 전면에 나서 활동하라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 일이기에, 왠지 그 친구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있는 힘껏 북돋아주고 싶었다.
하루라도 어릴 때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자고. 친구에게 하는 말이면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뭔가 도전하는 게 두렵고 용기가 나지 않을 때 늘 되새기려고 하는 말이다.
나는 오늘이 가장 젊고 올해가 가장 젊었으며, 내년에는 앞으로 남은 인생 중 가장 젊을 예정이다.
그리고 쭉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때론 무모해 보일지라도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뭔가를 하기에 앞서 내 상황과 나이를 이유로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여든, 아흔 살이 됐을 때 아 서른에라도 한번 시도해 볼걸, 마흔도 아직 어렸구나 하며 후회하지 않도록. 뒤돌아 봤을 때 원도 한도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모두들 행복한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되시길.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