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좋아하는 인스타그래머에게 극성수기인 벚꽃시즌
유학 시절 몇 년 간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파크 옆에 살았다. 지하철 Q라인의 프로스펙트 파크 역 다음인 파크사이드 역이 우리 집이었다.
24시간 운행하는 뉴욕의 지하철은 평일엔 큰 문제가 없지만 밤늦은 시간이나 주말엔 평소와 다른 스케줄로 운행을 하는 일이 잦다. 이제는 브루클린의 명소가 된 바클레이 센터 건축이 한창이던 그해엔 겨울부터 주말에 지하철이 아예 안 다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집에서 맨해튼까지 가려면 임시로 운영되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다운타운 브루클린의 애틀랜틱 애비뉴 역까지 이동해서 맨해튼행 열차를 타야 했다.
그날은 햇살이 눈부신 일요일 아침이었다.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이스트 빌리지의 레스토랑 오픈인 11시에 맞추려면 10시쯤 버스를 탔으리라. 비몽사몽 한 상태로 준비를 하고 나와, 다른 때 같음 지하철 타고 한 번에 가는데 지하철이 안 다녀서 버스를 타야 하니 20분은 더 일찍 나와야 한 데다 한번 갈아타야 해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평소엔 탈 일이 없는 버스를 타고 가니 평소에 갈 일이 없는 공원도 지나게 됐다. 공원 가득 푸르른 나무들에는 환한 벚꽃이 만발해 있었고, 아침부터 꽃구경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햇빛이 쨍한 버스 밖 세상엔 생동감이 넘쳤다. 유난히 투명했던 버스 창문 밖으로 그림 같은 절경이 펼쳐졌다.
'어느새 저렇게 꽃이 활짝 피었구나. 꽃구경 다니고 팔자 좋은 사람들이네.'
중간중간 차가 밀리고 한 두 번 정차하며 공원을 지나는 그 몇 분간 만원 버스에 앉아 창밖의 꽃들을 봤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더 마음이 허했다. 바깥에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과 꽃구경에 설렌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커플들. 멋지게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커피를 마시며 주말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그에 비해 허겁지겁 탄 버스 안에서 혹시나 늦을까 마음을 졸이며 앉아있던 나는 분명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이 도시에서 저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싶은 꿈이 너무나 크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 나이 이십 대 중반이었다.
창밖으로 꽃을 보는 것도 아까워서 '이럴 때 잠깐이라도 자야 이따 덜 피곤한데' 하며 마음을 재촉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그날 오전 공원을 지나던 10분이 뉴욕에서 4년간 유학하던 시절의 유일한 벚꽃구경이다. 다른 해엔 꽃을 관심 있게 보지 못한 건 물론이고 계절이 어찌 지나갔는지도 모르며 살았다. 공원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우리 집이었는데도.
그 후 거의 십 년이 지난 지금, 매년 꽃구경을 하러 뉴욕의 공원이란 공원은 다 찾아다니는 팔자 좋은 사람이 되었다.
이 정도면 거의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 인스타그램을 하면서부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예쁜 뉴욕 사진을 찍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게 됐다.
지독한 집순이라 행동반경이 손바닥만 한 나에겐 더없이 긍정적인 인스타그램의 영향이다. 알록달록 가을의 단풍이나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 센트럴파크에 늦지 않게 들러 눈에 남고 사진으로 남긴다. 파크에 가득한 여행자들과 달리 나는 다음 주에도, 다음 달에도 올 수가 있고 꽃 피는 봄이 오면, 걷기만 해도 감수성 터지는 가을이 오면 또 몇 번이고 와서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더없이 좋다.
밤의 센트럴파크와 브라이언트 파크는 낮과는 또 다른 낭만이 있다.
늦은 밤 조명이 밝혀진 브라이언트 파크 분수 옆 벤치에 앉아 친구와 두 시간 넘게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한다. 맨해튼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들의 이십 대 삼십 대를 통째로 보낸 청춘의 고향에서 이십 대 때 그랬던 것처럼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날씨가 좋은 날엔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관광객들 사이에서 혼자 브루클린 브릿지를 거닐고, 사진에 담기 위해 일부러 친구와의 점심 약속을 첼시 하이라인 근처로 잡는다.
수많은 사진들 중 추리고 추린 사진들을 올리다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사체는 꽃, 나무, 하늘이란 걸 알게 됐다. 몇 년간 꽃과 나무, 하늘이 어우러진 사계절의 뉴욕을 담고, 다른 나라나 도시에 여행을 가도 그런 필터를 장착한 내 눈에 가장 예쁜 풍경을 사진으로 찍는다.
뉴욕에서 봄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인 벚꽃과 튤립을 특히 좋아해서 봄이 되면 어딜 가도 쉬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매해 더욱더 많은 포토 스폿들을 찾아가는 중인데, 벚꽃은 피고 지는 기간이 아주 짧고 매년 시기가 달라지다 보니 아차 하는 순간에 꽃이 만개한 일주일이 지나간다.
"엊그제는 루즈벨트 아일랜드 다녀오고 이번 주말엔 브루클린도 가야 돼. 센트럴파크도 아직 못 갔는데 내일 비 오면 꽃 다 질 텐데 큰일 났어 몸은 하나밖에 없고."
"요즘 여기저기 꽃 피고 있잖아. 나 지금 완전 극성수기라니까."
비 와서 꽃이 지는 게 세상 큰일인 것처럼 심각한 얼굴로 극성수기를 논하니 듣고 있던 친구가 빵 터진다. 사실이다. 매년 벚꽃이 피는 4월 중순에서 5월 초까지 2주간 거의 매일같이 여기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작년과 같은 곳에 가도 간 시기와 그날의 날씨가 다르기 때문에 어디라도 빼놓을 수가 없다.
벚꽃은 특히나 아름다운 순간에 시간 맞춰 찾아가 담아내는 게 쉽지 않다.
매일 찾아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찍 갔다 아직 피어있지 않아 허탕을 쳤다가도 바로 하루 이틀 만에 만개했다가 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비라도 한번 오면 짧은 이슬비는 괜찮은데 바람을 동반한 소나기라도 오는 날엔 하루 만에도 꽃의 반이 져버려서 빈 나무만 남는다.
뉴욕에 오래 산 내게 사람들이 자주 묻는 것 중 하나가 뉴욕에 언제 여행 가는 게 가장 좋냐는 질문이다. 보통은 가을-봄-겨울-여름 순으로 추천한다.
사실 뉴욕은 사계절 모두 다른 매력이 넘치는 곳이라 어차피 처음 오는 거라면 언제라도 상관없이 좋을 테지만, 내 개인적인 취향은 봄-가을-겨울-여름 순이다. 영화에서 봤던 뉴욕의 모습을 보길 원한다면 가을이 좋겠다. 겨울과 여름의 순서도 자신이 취약한 온도가 더위인지 추위인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꽃을 좋아해서 뉴욕을 떠나 어느 나라에 가도 봄을 가장 선호한다.
뉴욕의 봄은 가을에 비하면 분명 홍보가 덜 된 부분이 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한 겨울보다도 덜 알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뉴욕에서 오래 살아본 결과 이 도시가 가장 생동감 넘치고 아름다운 계절은 봄이 아닐까 한다.
유럽여행을 간 것도 꽃이 한창 피어있던 봄이었고, 벚꽃 기간 내내 일본에 머물며 꽃놀이를 해 본 결과 뉴욕의 풍성한 봄꽃 향연이 그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벚꽃은 한국이나 일본에 훨씬 더 볼거리가 많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뉴욕에서 거리를 거닐며 보는 꽃의 종류가 더 다채롭고 화려하다는 걸 깨달았다.
버스 타고 아르바이트 가면서 창밖으로 꽃놀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야 봄이 온 걸 알았던 20대를 보내고 난 30대는 확실히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그때 어렵고 고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지금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도 감사할 수 있게 됐다. 일주일을 통째로 꽃구경 다니고, 꽃을 보러 여행을 가기도 하는 지금의 여유가 참 감사하다.
눈부신 봄날의 꽃 같은 사람이 되길 꿈꾼다. 꽃을 보면 마음이 환해지고 기분 좋아지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향기와 밝은 기운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