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 서서 먹는 우동집이 취향입니다.
8월 초의 삿포로는 무더운 한국과는 달리 선선했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쌀쌀해서 긴팔도 입을 수 있는 날씨였다. 호텔은 삿포로 맥주축제가 한창인 오도리 공원 근처였는데, 여행 첫날은 10분 거리인 삿포로 역에 가서 쇼핑을 하며 보내기로 했다.
비가 올 듯한 날씨라 삿포로 역까지 이어진 지하도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지하도를 걷다 보니 츠타야 서점 입구 옆에 많은 사람들이 서서 먹는 국숫집이 눈에 띄었다. 식당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조그만 코너였는데 가까이 가니 열기가 제법 후끈하다. 설 공간이 좁은데도 다닥다닥 붙어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국수를 먹고 있었다. 벽에 붙은 심플한 메뉴는 일본어로만 되어 있고 손님들도 하나같이 현지인들 같아서 구미가 확 당겼다.
뉴욕에서는 외식할 때 미리 꼼꼼하게 검색해보고 가는 편이지만, 한국이나 해외에서 여행할 땐 계획 없이 다니다 식당에 있는 현지인들의 반응을 보고 시도하는 걸 좋아한다.
삿포로 역 근처에 식당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아침으로 뭘 먹을까 하며 걷다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우동집을 보고, "우리도 저런 데서 한번 먹어볼까." 하며 다가갔다.
다들 혼자 온 손님들.
관광객 같아 보이는 사람도 없었지만 둘이 온 손님도 우리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먹고 싶었다. 난 처음 가는 식당에서 빨리 주문해야 할 경우 메뉴의 제일 위에 있는 걸 선택하는 게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남편은 옆에 중년의 남자분이 먹는 걸 보고는 빠르게 "저걸로" 주문해달라고 한다.
그렇게 첫날 아침 나는 가케우동, 남편은 튀김(템푸라) 소바를 시켰다.
서서 먹는 우동은 어릴 적 기차역에서 먹은 가락국수 이후에 처음이었는데, 오랜만에 해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정겨웠다. 오히려 앉아서 먹는 것보다 더 간편하고 편리한 부분이 있었다. 선불이고, 우동을 주문하면 나오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다 먹고는 휘리릭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진정 간편한 패스트푸드였다. 여러 명의 나이 지긋한 여사님들이 어떻게 건강관리를 하시는지 활기가 넘친다. 모두 하나의 몸처럼 재빠르고 적확하게 움직인다.
처음 다가가서 바에 서는 것과 동시에 인사를 하며 물을 내어주는 물/고객 서비스 담당(바를 수시로 닦는 것도 이 분 담당), 주문을 하면 기계보다 빠른 암산으로 돈을 받아 거스름돈을 주는 계산 담당이 있다. 주문과 동시에 조리담당의 빠른 조리가 이루어져서, 거스름돈을 받으면 곧바로 그릇이 내 앞에 놓인다. 우리 뒤에서 옆에서도 계속 주문을 하고 그릇이 오가서, 사람이 많을 땐 정신이 없을 때도 있다.
첫날엔 모험하는 기분으로 별 기대 없이 시켰는데 한입을 먹는 순간 어릴 적 기차 타고 가다 이리역에서 사 먹었던 그때 그 가락국수를 지금 현재의 시간으로 가져와 맛보는 느낌이었다. "맞아 딱 이런 맛이었어!" 하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이는 맛. 그때의 맛을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바로 기억나는 추억의 맛.
90년대 우리나라 기차역 가락국수는 일본식이었던 걸까? 미세한 차이가 있다면 가락국수에는 파 외에도 쑥갓이 얹어지고 단무지가 한두 개 퐁당 빠뜨려져 있다는 것. 고춧가루도 뿌려져서 나온다는 것 정도였다.
우동은 중국 주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승려가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처음 맛본 후 비법을 배워와 일본에 전한 음식이라는 설이 있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우동은 흔하디 흔한 음식이다. 동네 일식당에만 가도 어묵, 새우튀김, 해물, 유부 등 다양한 재료를 넣은 우동들이 있다. 한식과 접목된 불고기 우동, 김치우동같은 게 있는가 하면 일본에는 대야에 먹는 타라이 우동, 우엉 튀김 우동, 하나의 두꺼운 면이 들어있는 잇뽄 우동 등 지역별로 셀 수 없는 종류가 있다. 내가 원하는 건 늘 기본적인 것뿐이라 선택에 부담을 느낀다.
이 집의 장점 중 하나는 단출한 기본 메뉴가 우동면과 소바면으로만 심플하게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뉴욕에서도 일식집이나 우동 웨스트 같은 맨해튼 내 체인점에서 다양한 우동을 먹어봤지만 정작 가케우동은 뭔지도 몰랐다. 그저 메뉴의 제일 위에 쓰여 있길래 시켰는데 알고 보니 국물에 면만 있고 토핑이 없는 그야말로 기본 중 기본이었다.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90년대 기차역 가락국수보다도 간소한 가케우동 안에는 짙은 갈색 국물 안에 면과 파만 있을 뿐 흔한 어묵 한 조각 없는 깔끔한 모습이 첫눈에 내 스타일이었다.
면과 국물에만 집중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비주얼이 마음에 쏙 들었다. 또 한 가지 나를 감동시킨 포인트는 뜨거운 온도였다. 난 식당에서 뜨거운 음식이 뜨겁게, 찬 음식이 차게 나오지 않으면 크게 실망한다. 맥주는 냉동실에 보관한 얼음 잔에 따르는 게 최적인 것처럼, 국물요리는 뚝배기에 나오진 않을지언정 최대한 뜨겁게 나오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찌개나 국 종류가 미지근하게 나오면 그 집은 또 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차피 그런 집이 뛰어나게 맛있는 경우도 드물다. 온도를 지키는 게 음식의 기본 에티켓인데 이 집은 정말 마지막 한입까지 불어가며 먹어야 할 만큼 뜨거웠다. 남편은 한입 먹자마자 나를 보며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엄청 뜨거워." 남편은 뜨거운 음식을 싫어해서 평소엔 식을 때까지 한참 기다렸다 먹는데도 이 집에선 그런 것도 없이 단숨에 먹어 치웠다.
가격도 저렴하고, 시키면 바로 나오고, 청결도는 의심할 필요도 없어 보이고, 맛은 너무나 소박하고 촌스러워 정겨웠다. 둘이 정신없이 한 그릇씩 비우고 빠르게 인파를 빠져나왔는데, 왠지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이 집에 매일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튿날째 가니 나름 어제 한번 와봤다고 여유가 생겼다.
더 이른 시간에 가니 어제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설 자리 정도를 빼곤 가득 차있는 상태였다. 우린 어제와 똑같은 메뉴를 시켰다. 여긴 먹으면서 서로 대화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고 다들 먹는데만 집중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서서 먹지만 간간히 주문하는 말소리만 들릴 뿐이다. 우리도 먹는 동안엔 서로 말 한마디 없이 먹었다. 그리고 다 먹자마자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차가운 음료를 뽑아서 흥분을 가라앉히며 서로의 감상평을 쏟아냈다. 와 어제보다 더 맛있지 않았어? 완전 기본적인 건데 왜 다른 데선 저렇게 못 만들지? 진짜 나 어렸을 때 기차역에서 먹었던 가락국수 맛이라니까! 저렇게 뜨거운 국물이라니 이 날씨에 완전 딱이야. 저거 봐 금세 사람들 몰리는 거 봐봐, 일찍 나오길 잘했지?
혼자 서점에 가다 들르는 중년의 여인. 대학생 같아 보이는 스타일 좋은 여학생. 모두 단골같이 익숙하게 주문하는 사람들은 나이도 직업도 각양각색이었다. 빨리 몇 분 내에 먹을 수 있으면서도 든든한 한 끼여서일까? 흰 셔츠에 짙은색 수트 바지를 입은 직장인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가장 많은 손님층이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먹다 보니 옆에서 뒤에서 주문하는 걸 들으며 새로운 걸 얻어 배우는 재미도 있었다.
일본어를 오래 배워서 음식을 주문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현지에서 사람들이 디테일하게 주문하는 방식까진 몰랐다. 서서 먹는 간이식당일 뿐이라 이건 이렇게 주고 저건 저렇게 주세요, 하는 게 가능한 줄도 몰랐다. 현지인들은 템푸라 우동을 시키며 템푸라를 반만 달라고 하기도 하고, 템푸라를 두 개 얹는 손님도 있었다. 가케우동을 시키며 국물은 조금만 달라고 하기도 하고, 파를 많이 달라고 하는가 하면 파 없이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일주일 간의 여행기간 동안 하루 한 번씩은 꼭 먹었는데, 현지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는 걸 보고 우리도 한번 파를 많이 달라고 해봤다. 얼큰하게 먹자며 고춧가루도 많이 뿌려보기도 했는데,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본 결과 역시 기본으로 나오는 그대로가 최선이라는 걸 깨닫고 남은 며칠간은 그 어떤 주문도 따로 하지 않고 시켜서 나오는 데로 먹었다.
삿포로에서 지낸 일주일 간 백화점 푸드코트, 식당가에 가서도 밥을 먹었고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 체인에도 갔고 오래된 초밥집에도 가고, 한 달 전 예약이 필수인 털게 집에서 일인당 30만 원 넘는 코스요리도 멀리서 왔으니 큰 맘먹고 먹었다. 그런 데서 입에 넣자마자 감탄이 나오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도 했지만, 여행을 끝나고 돌아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하철 역에서 서서 먹는 이 우동 한 그릇이다. 남편과 여행 얘기를 하면 자꾸 나오는 것도 이 우동집에 관한 얘기였다.
이 글을 쓰며 그때의 사진들을 들춰보니 그날의 그 뜨거운 목 넘김이 새록새록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졌다. 글을 쓰다 말고 주방으로 가 냄비 하나에 냉동실에 있던 우동면을 팔팔 끓이고, 다른 냄비 하나엔 물을 끓이다 쯔유를 평소보다 많이, 국물 색이 짙어질 때까지 부었다.
거기에 한국인의 국물 맛인 쇠고기 다시다를 아주 조금 넣은 후, 잘 삶아진 우동면을 넣었다. 그릇에 담에 위에 파만 조금 뿌려서 먹어보니 생각보다 꽤 그럴듯한 맛이 난다. 그 삿포로 히노데 소바 여사님들도 이렇게 심플하게 끓이셨던 걸까. 흉내라도 내보자 했던 건데 결과물이 너무 비슷하게 나와 놀랐다.
거기에 쑥갓과 고춧가루만 조금 넣으면 영락없는 한국 기차역 가락국수였다. 며칠 후 쑥갓을 넣고 다시 만들었다, 거기에 단무지도 두 개 퐁당 빠뜨리니 90년대 기차역 감성 듬뿍 담긴 한 그릇의 시간여행이 완성됐다.
유학 시절 내가 일하던 일본 가게에서 일 년 정도 계시다 맨해튼에서 손꼽히는 다른 유명 레스토랑으로 옮겨가신 주방장님은, 일본에서부터 50년 넘게 요리계에 몸 담으신 요리의 장인이었다.
같이 일하던 일본인 직원들도 그 주방장님한테 니쿠자가(고기 감자조림) 같은 걸 잘 만드는 비밀 레시피를 배워가기도 했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간, 저녁으로 뭘 먹고 싶냐고 하셔서 우동이 먹고 싶다 하니 "어떤 우동? 새우튀김?" 하시길래 그런 거 말고 심플한 게 먹고 싶은데 그런 것도 될까요,했다. 가케우동을 몰랐던 때였다.
"그럼, 당연히 되지."
주방장님은 마치 '좋아. 보통 식당에선 못 먹을 우동 맛을 한번 보여주지' 하시듯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시고는 몇 분만에 바로 내 앞에 그릇을 탁 내려놓으셨다. 허여멀건한 국물에 면만 있고 위에 파가 조금 뿌려진 우동이었다. 어머 진짜 면밖에 안 넣으셨네, 아무것도 없네 하며 한입 맛보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 맛이 났다.
"오 마이 갓! 이거 뭐예요? 뭐 넣고 만드셨어요?"
새하얀 머리에 모자를 쓴 주방장님은 건너편에서 딴짓을 하시면서도 은근 내 리액션을 신경 쓰고 계셨다. 내가 탄성을 지르니 돌아보시며 씩 웃으셨다. "넣긴 뭘 넣어, 그냥 물에다 쯔유 넣고. 혼다시 알지? 이거 쪼끔 넣고. 그게 다야." 별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오버액션이냐며 허허 웃으시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생각해보니 그날 만들어주셨던 게 가케우동이었다. 첫 가케우동을 먹은 게 삿포로였는줄 알았는데 뉴욕 미드타운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