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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Oct 29. 2019

아메리칸 조식 5일의 기록

시카고에서 한식 없이 살아본 5일

넌 어쩜 미국에 살면서 빵 한 번을 안 먹니?


유학 시절 우리 집에 한 달 동안 머물렀던 친구가 한 말이다. 그녀와 한 달간 지내는 동안 나는 분명 모든 끼니를 밥으로, 아시아 음식이나 한식으로 먹었을 것이다. 나는 뼛속까지 한식 주의자라 플로리다에서 인턴십을 하던 시절 뉴욕에 왔을 때 "그래, 이런 곳이라면 나도 미국에 살 수 있겠다." 생각했었고, 끝내 뉴욕으로 와서 정착했다. 뉴욕은 동양인 인구가 많아 우리에게 익숙한 아시안 음식과 한식의 퀄리티가 타주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


뉴욕에서 10년 넘게 불편함 없이 잘 사는 것도 중식, 일식 등 아시아 계열 음식이 널려있고 한식 식재료도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친구들과 브런치를 즐기고 스테이크 하우스나 이태리 식당도 다니며 외식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식을 기본으로 깔면서 별식으로 즐기는 정도다.


한국에 사는 친구가 3주 후에 혼자서 시카고로 출장 간다며, 시간이 나면 와서 자기 호텔에서 묵으며 놀고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물론 그녀는 일을 하러 오는 것이고 나도 도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었지만 나는 순전히 여행 가는 마음이었다. 급 시카고행은 그렇게 결정되었는데, 그즈음 시카고는 최악의 강추위로 연일 미국 전역의 뉴스를 장식하고 있어 겁이 나긴 했지만 2월 말쯤엔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바로 수락했다.

클라우드 게이트

여행의 기회에는 웬만하면 무조건 ok 하자는 게 모토다.


이 친구는 호텔도 좋은 곳에 묵을 것인 데다 미식가라서 분명 즐거운 맛 탐방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카고에 갈 날은 다가오고,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 시카고를 검색하면 뜨거운 물을 공중에 뿌리는 영상, 슬로모션, 사진 등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 아직도 어마어마하게 춥구나 3월이 코앞인데도 저렇게 공중 뿌리는 물이 눈처럼 얼어버린다는 거지.

남극보다 추운 미국···영하 50도 육박한 '살인 추위'
... 이번 한파가 덮친 지역은 미 대륙의 중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미국 3대 도시인 시카고의 최저 기온은 섭씨 영하 32도로 측정됐다. 체감 온도는 45도까지 떨어졌다고 현지 방송은 전했다. 시카고에서는 30일과 31일 대다수 학교가 수업을 취소했다. 거리에는 인적조차 드물었다.
[출처: 중앙일보 2019년 1월 31일]

그래 좋아, 시카고 역대급 추위 나도 한번 경험해 보는 거지 뭐.

그즈음 시카고를 검색하면 나오던 무시무시한 사진들 [출처: Livescience.com]

오후에 도착한 시카고는 색채가 없는 도시였다.


하늘도 건물도 전부 회색빛에 쌩쌩 부는 바람엔 물기 하나 없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90년대 말 범죄, 스릴러 영화에 나오던 시카고. 클래식 영화인 나 홀로 집에, 페리스의 해방(Ferris Bueller's Day Off)의 배경이자 내가 좋아하는 영화 '자동차 대소동(Planes, Trains and Automobiles)'의 주인공이 영화 내내 향하던 목적지도 시카고였다.


오헤어 공항에서 탄 우버가 호텔에 다다르니 드디어 영화에서 보던 시카고의 풍경이다. 뉴욕같은 대도시지만 왠지 시크하고 절제된 느낌. 가운데 흐르는 강은 뉴욕의 허드슨 강에 비교해 아담하고 잔잔했다.


-What river is that?

-Chicago River.

-Ha, of course.

2월 마지막 날 색채가 없는 회색빛의 시카고

첫째 날 아침.


평소엔 일어날 일이 없는 새벽 6시 기상. 준비를 마치고 1층 식당에 내려오니 박람회에 온 여러 인종의 회사원들이 옷을 차려입고 여기저기 앉아있다. 어떤 이들은 목에 벌써 박람회 입장 패스를 걸고 있다. 여기저기서 다양한 외국어가 들려온다. 한국인인 줄 알았던 옆 테이블의 중년의 남성들은 중국인들이다. 친구의 힐튼호텔 체인의 멤버십에는 매일 아침 이 카페에서의 조식이 포함이었다. 진한 베이컨 향이 넓은 카페를 메우고 있었다. 나는 평소 좋아하는 프렌치토스트를 선택했다.


뉴욕에서 수준 높은 프렌치토스트를 많이 먹었기 때문일까. Jane이나 Tartine 정도의 수준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이건 집에서 만든 것보다도 못한 수준이어서 실망이 컸다. 빵 자체도 프렌치토스트라고 하기에 애매했는데 그 위의 휘핑크림은 전혀 어우러지지 않았고 나름 직접 만든듯한 딸기소스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휘핑크림 위에 딸기 소스 위에 메이플 시럽이라니 맛의 조합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만든 걸까. 크림과 딸기소스가 없이 나왔다면 나았을 것을.

첫 번째 조식 프렌치토스트는 실패.

남이 해주는 요리라면 보통 맛있게 다 잘 먹는 편인데도 손이 거의 가지 않았다. 힐튼 호텔 레스토랑에서의 첫 조식이라 기대가 컸는데. 달달한 게 당겨서 시킨 프렌치토스트에 실패한 내게 친구는 선택메뉴인 비스킷에 잼을 발라도 달달하지 않냐며 내일은 달걀 요리를 시킬 것을 추천했다.  


조식 후 택시를 타고 박람회장으로 향했다. 친구는 중소기업 사장으로 20대 후반부터 회사를 이끌어 왔는데 아직도 사장님으론 나이가 어린 데다 여자라 이런 박람회에는 사장 명함이 아닌 팀장 명함을 따로 가지고 다닌단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지는 첫날의 일정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둘째 날 아침.

친구가 추천한 데로 오늘은 달걀 요리를 선택했다.

무난하게 잘 선택한 둘째 날. 이 카페 아메리칸 조식 옵션 중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

달걀 2개는 오버이지(Over easy),

고기 종류는 베이컨,

감자는 컨츄리 스타일로,

사이드는 비스킷.


잼은 테이블에 놓여있지 않아 딸기잼을 부탁했다.


내가 달걀을 주문하는 걸 보고 친구가, "아 오버이지도 있었구나. 나는 계속 써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만 시켰는데. 나도 오버이지로 시켜야지." 라며 영어를 안 쓰다 보니 알던 단어도 까맣게 잊는다고 했다.


써니 사이드 업은 뒤집지 않은 채로 한쪽 면만 익힌다. 뜨겁게 달궈진 기름에 달걀의 테두리 선이 갈색으로 익을 때까지 뒤집지 않고 그대로 서빙된다.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은 채 뒤집어서 다른 면도 살짝 익히는 것이 오버이지. 노른자가 액체상태로 유지되는 건 똑같지만 오버이지는 양쪽 다 겉을 익혀주기 때문에 나는 오버이지를 더 좋아한다.


둘째 날 아침은 깨끗이 비웠다.


박람회에서의 하루가 또 지나고, 뉴욕에서부터 벼르고 별렀던 시카고식 딥 디쉬 피자를 먹기로 했다. 종일 검색을 해본 결과 가장 유명하다는 체인인 지오다노(Giordano's) 중 우리 호텔에서 가까운 지점에 갔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나오기까지 한 시간이나 걸려서 주문 후 반죽부터 해서 만들어 나오나 보다 크게 기대했으나, 그렇게 기다린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집에서 구운 냉동피자보다도 못한 게 나왔다.

정말 맛있게 먹고 싶었던 시카고 딥 디쉬는 실패

크러스트 안에 가득 찬 치즈는 굳어서 잘 늘어지지 않았고, 온도부터가 미적지근했다. 피자가 원래 이렇게 차갑냐고 물으니 사과하고 다시 데워왔는데도 별로여서, 그냥 뉴욕이나 한국에서 시카고 피자집을 찾아 먹어도 여기보단 맛있을 거라 결론내고 깔끔히 포기했다. 무엇 때문에 한 시간 넘게 걸리는지는 의문이나, 비슷한 시기에 갔던 사람들 평이 다들 비슷한 걸로 보아 시카고 지오다노는 강력하게 비추한다.


셋째 날 아침.


다른 옵션들은 어제와 똑같이, 고기만 베이컨이 아닌 조식 스타일 소시지로 선택했다. 베이컨이 느끼한 감이 있어 소시지를 택했으나 소시지는 더 별로였다. 타바스코 소스까지 뿌려 봤지만 심폐소생이 불가능했다. 이제 아침마다 카페를 가득 채우는 아메리칸 브렉퍼스트의 향이 조금씩 느끼해지기 시작한다.

배고파도 소시지는 하나 이상 먹지 못하는 토종 입맛

내가 미국 음식하면 떠오르는 건 아메리칸 조식의 향이다.


처음 미국에 온 건 플로리다의 호텔 인턴십 때문이었고, 처음 일하게 되었던 곳이 키친의 브렉퍼스트 담당이었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비몽사몽 준비하다 보면 손님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베이컨 기름의 향은 어느 공간이건 정말 진하게 공기를 채운다. 한국에서도 베이컨 향을 맡으면 미국에 온 느낌이다.


처음 주방에서 일했던 날 셰프는 갑자기 나에게 하얗고 긴 주방장 모자를 씌워 연회장에 내보냈다. 거기서 나는 선배가 오믈렛 만드는 시범을 딱 한번 보고 내 자리에 가서 오믈렛을 만들어야 했다. 손님들이 내 앞에 있는 재료들을 선택하면 프라이팬에 담아서 볶다가 달걀을 풀어 익혀서 오믈렛 모양으로 접어서 담아 주는 것이다. 


그나마 평소에 요리를 좀 했기에 망정이지. 그런 나였어도 수많은 외국인들이 내 앞에서 접시를 들고 줄을 길게 서 있던 첫날엔 손이 떨렸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생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요리를 만드는 건 꽤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2019년 시카고 가정용품 전이라 쓰고 고등학교 동창과 네버 엔딩 수다타임이라고 읽는다.

가장 춥고 피곤했던 셋째 날 저녁엔 스테이크를 먹기로 했다. 호텔 인근에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가 몰려 있었는데, 이날은 우리 일정 중 가장 추운 날로 섭씨 영하 17도 정도에 바람도 셌다. 생존을 위해 그나마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스미스 앤 월랜스키(Smith & Wollensky)로 예약 완료.


1977년 뉴욕 49가와 3 애비뉴에 처음 문을 연 스미스 앤 월랜스키는 뉴욕시의 전화번호부를 펼쳐 식당 이름을 작명했다. 랜덤으로 펼친 페이지에 나온 첫 이름이 스미스, 두 번째로 펼쳐 나온 이름이 월랜스키였다니 기발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디에게 상사인 미란다가 특별히 주문해 사무실로 대령하게 했던 스테이크를 산 곳도 맨해튼의 스미스 앤 월랜스키였다.

뉴욕이 본점인 스테이크 집의 시카고 지점에서 맛본 스테이크. 친구야 넌 직원들에게 아주 좋은 사장님일 것 같구나.

뉴욕 본점에 갔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건 식전 빵이었다.


스테이크로 유명한 뉴욕에 오래 살다 보니 유명하다는 스테이크 맛집엔 한두 번씩 다 가봤지만 이 집처럼 식전 빵이 특별한 곳은 없었다. 버터와 허브향이 물씬 나는 빵은 따뜻하고 폭신폭신 가벼운 질감이다. 겉은 짭조름한데 속은 미세하게 달짝지근해서 같이 나온 버터와 환상의 조합이다. 따뜻한 빵을 떼어내 버터를 발라 먹으면 스테이크를 기다릴 수 있는 무한한 인내심을 준다.


친구는 뉴욕 본점보다 부실하다며 아쉬워했던 차가운 시푸드 타워도 난 감탄하며 먹었다. 미디엄 레어로 주문한 포터하우스 스테이크도 훌륭했고, 곁들여져 나온 구운 스트링 빈과 당근 같은 채소들도 감칠맛이 있고 고기와 썩 잘 어울려서 따로 크림 시금치를 주문하지 않아도 됐겠다 싶을 정도였다.


고기를 실컷 먹고 와인도 몇 잔 마시고 나가면 영하 18도 온도가 더 견딜만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바람이 쌩쌩 부는 시카고 밤거리를 뛰듯이 걸을 때마다 시카고의 홈리스들은 유난히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본토의 홈리스들을 정부차원에서 날씨가 따뜻한 하와이 같은 곳에 단체로 데려다 놓는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시카고에 와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넷째 날, 느끼함에 못 이겨 샐러드를 시켰다.

넷째 날 아침.


큰 변화를 줘서 샐러드를 시켜봤다. 어젯밤의 스테이크 때문에 아직도 배가 불러서 사실 굶고 싶은 마음이었다. 굶는 마음으로 가볍게 샐러드를 시키자 했는데 의외로 대성공. 반숙 계란도 지겨워져서 오버 하드(Over hard)로 시켰다. 예상외로 샐러드의 퀄리티가 좋았다. 재료들이 하나같이 신선했고 아삭아삭 씹는 질감을 고심해서 섞은 듯한 조합이었다. 드레싱은 가벼운 이태리 드레싱으로 선택.


오믈렛을 고른 친구에게 미국의 4성급 호텔 주방에서 일했던 경험자로서 한 가지 팁을 줬다.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지만 미국 내 메리어트 체인 주방에서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호텔 조식에서 먹는 달걀은 되도록 프라이로 시키는 게 좋다고.


써니 사이드 업, 오버이지, 오버 하드 같은 달걀 프라이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달걀 프라이는 생달걀을 깨서 조리하지만, 스크램블과 오믈렛 용 달걀은 우유갑에 담겨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업장에는 의외로 많은 음식들이 조리 또는 반조리 상태로 배달된다. 삶은 달걀은 삶아서 껍질이 벗겨진 채로 수백 개가 큰 통에 담겨서 오고, 액체 달걀은 커다란 우유갑이나 컨테이너에 흰자 노른자 혼합 또는 흰자만 가득 담겨 있다. 조식 뷔페에는 미리 스테인리스나 유리병에 옮겨 담아서 사용하기 때문에 고객들은 우유갑에서 따르는 달걀물을 볼 일은 없다.

마지막 날 아침. 마지막 날까지 어마어마하게 추웠던 시카고. 하늘은 맑아서 비행기는 잘 뜨겠다.

5일째 아침엔 어제의 긍정적 경험을 바탕으로 샐러드를 시켰다. 나름 사진이 예쁘게 나오도록 써니 사이드 업으로 주문해 대미를 장식했다. 첫날부터 변하지 않은 건 자몽주스뿐이었다.


매일 매 끼니를 외식하는 건 생각보다 질리고 피곤한 일이다. 여행에 갔을 때 특히 그런 걸 느끼는데, 유럽여행 갔을 때도 컵라면을 잔뜩 챙겨갔고 현지에서도 수시로 중국, 태국, 베트남 음식점을 찾아다녔다. 시카고에 가면서는 같은 미국이라 음식 걱정을 전혀 안 하고 갔던지라 한식이 간절해졌다. 의외로 호텔 주변에 아시안 식당이 없었고, 미국 유학을 오래 했던 친구는 외국음식을 한국음식 못지않게 즐기는 편이라 나도 굳이 아시안 음식을 찾지 않았다.


뉴욕 집에 도착한 건 낮 세시쯤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라면을 끓여서 푹 익은 신김치와 먹고 나니 며칠간의 피로와 느끼함이 풀렸다. 언젠가 함께 일했던 중년의 일본인 매니저님이 소싯적에 하루에 몇만 엔씩 하는 비싼 료칸에서 며칠 동안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생선회와 최고급 쇠고기 요리만 먹다가, 집에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돈가스 카레덮밥을 먹으니 느끼한 속이 풀리더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시카고와 달리 뉴욕은 날씨도 온화했다. 한국에서 공수한 청양 고춧가루를 넣고 끓인 라면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마침내 집에 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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