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사진을? 한국인을 찾으세요

저기 그거 제 핸드폰인데오

by 환한
결국 이것밖에 남지 않은 모지코 인증샷...

여름에 일본 여행을 간다면 부모의 원수라도 한 번쯤은 말려보라고 했던가. 나카스 강 옆에서 생맥주를 마시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여름의 후쿠오카에 뛰어든 게 바로 작년 8월의 나였다. 너무 더워서 쇼핑몰과 텐진역 지하상가를 옮겨 다니며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기를 며칠, 그 무렵 인스타그램에서 꽤나 핫했던 '모지코'가 지척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어떡해, 가야지.


고쿠라를 경유해 모지코역에 내리자, 인스타에서만 보던 오래된 역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역 앞을 둘러보며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아들의 사진을 찍고 있는 아버지 뒤로 나처럼 혼자 여행을 온 듯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색한 어깨와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보니 누군가에게 사진을 부탁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그는 망설였고, 그 눈빛을 마주한 나 또한 머뭇거렸다. 뒤늦게 용기를 내 표지판 쪽으로 가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놓친 순간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서로 한 발자국만 다가갔더라면, 서로 한 장씩 인생샷 하나쯤은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이번 교토 여행을 준비할 땐, 굳은 다짐 하나를 마음에 새겼다. 이번엔 결코 주저하지 말자. 피차 여행자들끼리 사진 한 장 찍어주는 거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거절당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부탁하면 되는 일이니까.


결국 내 사진은 찍지 못하고 미므 사진만 얻었다! (그래도 만족!)

가장 먼저 찾아온 기회는 청수사, 키요미즈데라였다. 사찰의 가장 인기 있는 포토스팟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본인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했던 모양인지 쏟아지는 일본어에 정신이 아득했지만, "샤신(사진)"이라는 단어 하나를 알아듣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의 휴대폰을 받아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어드리니, 연신 "땡큐! 땡큐!"를 외치며 고개를 숙였다. 아, 내 것도 부탁할걸. 커플과 가족으로 가득한 곳에서 말을 걸기는 쉽지 않았다. 다음을 노린다!


그다음은 고다이지였다. 사찰 안 대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스페인에서 온 듯한 커플 두 쌍이 서로의 인증샷을 찍어주고 있었다. 예쁜데. 어디에 카메라를 받쳐둘 곳이 있나 싶어 두리번대다가, 마찬가지로 그 커플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외국인 남자를 발견했다. "사진 찍어줄까? 너도 나 찍어줘." 하니 남자는 망설임 없이 가방을 벗고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세로로, 가로로, 위에서, 아래에서 — 인터넷에서 흔히 보이는 '한국인이 사진 찍는 각도' 짤처럼 (내 기준에) 만족스러운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 내 폰을 건넸다. 에이, DSLR 들고 다니던 사람인데 설마 못 찍겠어?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KakaoTalk_20251024_222537482_01.jpg 우웅?

...아. 결과물은 당혹스러웠다. 내가 멈춰 서기도 전에 촬영이 끝나 있었다.


텐류지에서는 정말 처음 겪어보는 일이 있었다. 사찰 안 나무 기둥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셀카를 찍으려던 참인데, 내 프레임 안으로 어느 외국인 할머니가 스르륵 들어왔다.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는데, 몇 장의 사진을 찍는 내내 그 자리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고 계셨다. 혹시 나를 여행 가이드로 착각하신 걸까? 어색한 미소를 띠며 각도를 조정했지만, 또다시 앵글 속으로 들어와 함께 미소를 지으셨다. 결국 사진을 포기하고 자리를 떴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이 오래 남았다. 무슨 생각이셨을까. 혹시 손주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고 싶으셨던 걸까. (한 장 드릴 걸 그랬나... 신종 차별인가...?)

KakaoTalk_20251024_222537482_04.jpg ...?

아라시야마 치쿠린 대나무숲에서는 조금 더 기묘한 일이 있었다. 사진은 찍고 싶은데 카메라를 고정할 곳도 없고 셀카로 찍기에는 각도가 아쉬워서 슬퍼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일본 아주머니가 내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내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살포시 웃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서 있자, 옆에 있던 (딸로 보이는) 일행이 손짓으로 '서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포즈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서 웃었지만, 덕분에 치쿠린에서의 인증샷이 생겼다. 아마 외국인인 걸 알아봤지만, 영어든 한국어든 외국어는 못하고 내 사진은 찍어주고 싶었던 그분의 친절이겠지. 작년 모지코에서의 그 남자처럼, 어색한 어깨와 흔들리는 동공을 가지고 있었을까. 낯선 사람의 친절이 따뜻함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일단... 찍어주시니까 감사해요 :)

마지막 순간은 나라의 도다이지, 동대사였다. 홍콩 사람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사실 그런 부탁을 받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계속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같은 동양인을 찾고 있구나 싶었다. 몇 사람을 그냥 보내고 나서야 내 앞에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사진 좀 부탁드려요"라고 했다. (사진은 한국인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후에도 우리는 사찰 근처 트레일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다. 그때마다 "또 만났네요" 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사슴과 있는 사진을 부탁해볼 걸 그랬나.


이렇게 돌아보니 이번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순간순간 스쳐간 사람들의 얼굴이 더 또렷하게 남아 있다.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봐왔던 풍경들 속에서도, 이번 교토만큼 다양한 사람을 만났던 적은 없었다. 누군가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 나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찍어준 낯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자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