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간을 움직였는데 오후 네 시라니
응커피 아라비카에서 땀을 식히며 오후에 돌아다닐 구역을 찾아보았다. 계획은 없어도 목적지가 없는 여행은 할 수 없어서 숙소를 나서기 전에 찍어두었던 기온과 주변 지역의 여행 지도를 꺼내보았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백화점과 같은 번화가가 위치한 가와라마치 지역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기에는 애매하고, 버스를 타기에는 가까운 거리. 항상 1만 5 천보가 넘어갈 즈음이면 아픈 발목이 비명을 지르는 걸 알면서도, 산책 겸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일본의 골목길을 걸어보겠어, 하는 마음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유튜버가 추천한 규카츠 집을 찍고 가모강을 건너 또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길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 등 숙박시설이 많았던 교토역 부근이나 기와집 같은 옛 건물들이 많았던 기온과는 사뭇 다른 시내의 모습이 새로웠다. 우리로 치면, 종로구 옆에 중구/명동을 지나는 기분.
멍하니 거리를 따라 걷던 중 LE LABO 르라보 매장을 마주쳤다. 여행 책에서도, 유튜브 영상에서도 꼭 등장하던 곳이어서, 언젠가 가보려 곤 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만날 줄은 몰랐던 곳. 4일 차쯤, 교토 익스클루시브 향수인 오스만투를 보러 오긴 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오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잠깐 고민에 잠겼다. 잠시 멈춰 갈까, 누가 오라고 가라고 하는 것도 하닌데. 매장 앞에서 잠시 서성이고 있으니 직원이 다가와 "카페에 오신 건가요, 향수를 보러 오신 건가요?" 하고 물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향수를 보러 왔어요"라고 대답하자 향수 고객을 위한 웨이팅 라인으로 안내해 주었다.
기다리는 동안 맡아보라며 '오스만투스'의 시향지를 건네받았다. 윽.... 금목서 향이라기에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강한 우디향이 훅 올라왔다. 가지고 있는 향수의 거의 대부분이 우디계열 향수인 만큼 호불호를 가리자면 호에 가까운 향이긴 했지만, 금목서보다는 오래된 목조 건물이 생각나는 향에 이제라도 향수 말고 카페만 이용한다고 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특히 이곳 매장에서는 일본어로 라벨링을 할 수 있어서 (같은 교토라도 신풍관에 있는 매장에서는 영문 라벨링만 가능하다) 꼭 하나를 갖고 싶었는데... 일본에 오기 전부터 Chat GPT의 도움을 받아 새길 문구까지 준비해 온 나였다. 이렇게 놓치기에는 너무 아쉽지...
"어나더 13 15ml 하나 주세요"
이 기회에 새로운 향을 만나볼까, 아니면 평소에 사용하던 향으로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좋아라 하는 향의 작은 사이즈를 사기로 결정했다. 호불호가 너무 심해서 간택을 받아야 하는 향으로 유명한 어나더 13. 이 향수를 궁금해하던 나를 위해 면세점에서 샘플을 챙겨다 준 이제는 둘도 없는 동갑내기 친구가 된 옛 직장동료의 얼굴이 스쳤다. 처음에 향만 맡았을 때 경악했던 게 어제 같은데, 내 몸에 착향하고 난 뒤의 그 포근함에 반했던 그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힘들었던 회사 생활 중에도 이렇듯 알게 모르게 내 삶에 스민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또 감사한 순간.
향수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근처의 관광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니시키 텐만구에 들러 사원을 구경하고,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니시키시장을 걸으며 '소고기 꼬치'라는 새로운 세계도 만나보았다. (꼬치 하나에 3만 원이라니). 일본 하면 빠질 수 없는 가챠샵에도 들러 가지고 싶었던 카메라 모양 가챠를 뽑고 (필카부터 미러리스, DSLR까지. 똑딱이 디카 빼고 모든 종류의 카메라를 모으게 되어 행복하다), 백화점으로 이동해 서점과 음반 가게, 그리고 닌텐도 샵까지 섭렵했다. 기대했던 소우소우(SOUSOU)는 생각보다 작았는데, 대기줄이 길다더니 전혀 그렇지도 않았다. 엄마를 위한 가와구치백을 사고, 내 다음 출근 가방으로 쓸 천가방도 하나 집었다. 검은 바탕에 흰 숫자가 가득한 시그니처 디자인보다 눈에 확 들어오는 붉은색을 골랐다. 역시 클라라 하면 레드지.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팠다. 급히 구글맵을 켜 근처에 있는 규카츠집을 찾아 들어갔다. 기온에서 가와라마치까지 걸어온 다리가 이제는 항의라도 하듯 욱신거렸고, 텅 빈 배는 고프다 못해 아픈 기분이었다. 조금의 웨이팅 끝에 자리에 앉아 고기를 한 점 베어 물자, 허기와 피로가 동시에 녹아내렸다. '인생 규카츠'라던 리뷰에 맞게 정말 객관적으로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문득, 함께 온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 옆사람들을 보다 보니 문득 광화문에서 친구와 먹었던 규카츠가 떠올랐다. 아무리 맛있어도, 아무리 유명해도, 곁에 누가 있느냐가 결국 맛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걸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있었을까?
식사를 마치고 향수를 찾아오니 기력이 거의 다 빠져 있었다. 시간은 오후 네 시. 해는 아직 지지 않았고, 교토의 오후는 길었다. 오전 일곱 시부터 이미 아홉 시간을 움직인 셈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다가, 아까 스쳐 지나왔던 가모강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조금 쉬었다 갈까.
사람들을 따라 강변으로 내려와 다리 밑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멍하니 물을 바라보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런두런 별 얘기 아닌 얘기를 하며 한참을 웃었다. 이상하게, 이곳에 앉아 전화를 하니 여기가 교토든 서울이든 상관없는 기분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 자전거의 바퀴 소리, 간간이 들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도시의 소음이 아닌 ‘살아있는 소리’들이 귓가를 채웠다. 그때 문득 청계천이 떠올랐다. 그 어느 날, 기나긴 야근 끝에 문 닫기 직전의 질할 브로스에서 산 브리또를 들고 찾았던 늦은 저녁의 청계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그냥 빨리 먹고 집에 가자는 마음으로 고무 씹듯이 질겅질겅 무감각하게 씹어 삼키던 어느 저녁. 그날의 청계천도 이렇게 예뻤을까. 나는 먼 가모강에서, 그때 놓쳐버린 청계천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다시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