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도 새도 아직 잠들어 있을 듯한 새벽 5시. 알람도 없이 눈이 번쩍 떠졌다. 커튼을 걷어 창밖을 보자 개미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새벽의 거리가 나를 반겼다. 이 도시의 현지인들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타국에서 온 여행자인 나만이 홀로 깨어나있었다. 출근할 땐 그렇게 힘들었던 5시 기상이 이렇게 쉬울 줄이야. 이번 여행은 정말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보리라,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알람도 맞추지 않은 채 커튼도 단단히 치고 잤는데, 4년의 시간 동안 몸에 각인된 기상 시계 덕분에 누구보다 부지런히 여행 준비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호텔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 근처 지하철역에서 작년 후쿠오카 여행 때 산 니모카 카드를 충전하고, 기요미즈데라행 시티버스를 기다렸다. (찾아보니 교통카드 충전은 편의점에서도 가능하다고 한다) 주말 아침이라 버스는 텅 비어 있었지만, 곧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그냥 많이들 내리는 곳에서 내리면 되겠다 싶어서 시내 풍경으로 눈을 옮겼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내리던 학교도 구경하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보고. 일본은 같은 디자인의 건물을 올릴 수가 없다나, 한국과 사뭇 다른 건물들의 모습도 구경하면서.
키요미즈미치 정류장에 도착하자 (역시나)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내릴 준비를 하였다. 마치 일행인 것처럼 슬쩍 하차 줄에 합류해 카드를 찍고 내리자 호텔이 있던 교토역 부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건축물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키요미즈자카 상점가를 따라 쭉 올라가자 붉은 기둥의 사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렌게오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촬영 금지'라는 안내판도 붙어 있었다. 다행히 단체 관람을 온 듯한 교복 차림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내부로 들어오자, 키요미즈데라를 감싸고 있는 푸릇푸릇한 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을 단풍 시즌에 오면 그렇게 예쁘다더니... 푸릇한 풍경도 이렇게 예쁜데 단풍이 들면 얼마나 예쁠까, 다시 한번 오고 싶어 졌다. 개인적으로는 전체적인 본당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오쿠노인 위에서 이 풍경보다 본당으로 향하는 산림의 모습이 훨씬 더 예쁜 것 같았다. 이렇게 예쁜 것을 혼자 볼 수 없어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이거 봐. 너무 예쁘지? 아무리 좋은 렌즈로도 이 모습을 그대로 담지는 못하리라. 엄마는 별 감흥이 없는 듯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본당 내부를 보고 안쪽으로 들어오면 부적과 오미쿠지(운세)를 뽑을 수 있는 상점이 나오는데, 천주교 신자인 나도 그 아기자기함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General luck'이라는 보라색 부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실 출근길에 넘어져 다친 무릎을 위한 'Healthy legs' 부적이 더 당기긴 했지만... (너무 못생겼더랬다)) 이번 여행이 무탈하게 잘 끝났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담아 보았다.
본당 주변의 산책길을 따라 풍경을 보며 내려오다 보면 세 갈래의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오토와 폭포'를 마주하게 된다. 왼쪽부터 학업·연애·건강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곳. 줄을 설 때에는 '어느 물줄기를 마실까' 고민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나의 뒤로 계속해서 길게 늘어나는 줄을 보다가 그냥 비어있는 곳에 가 물을 받았다. (중학생 시절, 오사카에 공연을 하러 왔다가 들렀을 때에도 가운데 물줄기를 받았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인연이다 인연)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이 있는 산넨자카와 니넨자카. 언덕 위를 오를 때만 해도 조용한 거리였는데, 상점이 하나둘씩 문을 열자 어느 순간 활기를 띄었다. 상점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군데군데 틀린 번역을 보면서 '아, 저건 경위서 감이야' 하는 재미없는 생각도 해보았다(재직중일 땐 제일 스트레스받는 피드백이 '구글 번역기 같아요'였는데, 퇴사하고 나니 이런 것도 저런 것도 다 재밌었다. 만약 내가 고객인데, 번역회사에서 저런 결과물을 보내줬다고 하면, 내 기분이 이럴까 싶어서). 일본 답게 예쁘고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이 많았지만 홀린 듯 집어 든 유리 공예(고양이!) 팔찌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짐이다'라고 되뇌며 끌어 오르는 물욕을 진정시켰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코다이지에 닿았다(물론 구글맵이 일러준 '길'이다). 코다이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가 1606년에 남편을 위해지었다는 사찰이다. 입장료를 내려고 1000엔 지폐를 내밀자 '거스름돈이 없다'라고 거절당해 한참 동안 지갑과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렇게 동전만 받는 곳에서 잔돈이 없을 리가 없는데... 들고 있던 짐들도 내려놓고 겨우 100엔짜리 동전 6개를 찾아 들어갔지만, 살짝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일본도 카드 쓴다고 했던 사람들... 거짓말쟁이... 교토는... 아직... 현금이 최고입니다 여러분.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해서 안 들어가고 싶었는데, 6천 원의 입장료가 아깝기도 했고, 당연한 듯 메인 건물로 안내하는 직원분들을 따라 봉투를 받아 들었다. 신발끈을 풀었다가 또다시 묶어야 하는 신발이라 너무 귀찮았는데. 내가 일본인인 줄 아는 모양인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닌 것도 같다) 계속해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을 해주시니 안 들어갈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건물 안에는 '일본어'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의 약력과 사찰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으니... (사실 스킵하고 싶으신 분들은 스킵해도 될 것 같다...). 그곳에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나는 다만, '출병'이라는 글자를 보고 '아~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2 임진왜란~'이라고 외쳤다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뿐.
이렇게 한참을 돌아다녔는데도 고작 오전 11시였다. 오전 7시부터 4시간을 쉼 없이 움직였더니 벌써부터 다리에 납을 매단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인별 스토리에 지침을 호소하며 끊었던 카페인의 재섭취를 부르짖은 내가 향한 곳은 우리나라엔 '응 커피'로 더 잘 알려진 아라비카 교토 히가시야마점. 사실 강 뷰인 아라시야마점이 더 유명한 것 같았지만, 히가시야마점이 본점이라는 소식에, 가보고 싶었던 (사람이 바글바글한) 스타벅스를 스킵하고 이곳으로 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붐비진 않았지만, 이미 가게 내부에는 여러 한국인 여행객들이 잠시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혹자는 카톡으로 '인생샷'을 공유받기도 하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건 참 재밌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내 바로 뒤에 있었던 사람들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근데 여기 유명한 곳이야?"
"그렇대."
"오! 맛있다! 이거 한국에도 있나?"
"삼성동? 코엑스에 하나 있네."
"근데 여긴 왜 유명하대?"
"음... 몰라! 그냥 블로그 보면 다 오길래."
나도 모르게 '본점이니까요!'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입을 다무는 것 하나만으로 국적을 티 내지 않고 배경에 스며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어머, 한국인인가 봐! 싶어서 재미난 이야기가 끊기길 원하지도 않았고, 또 불쑥 끼어들었다가 새로운 인연을 만들거나,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도 사절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이때만 해도 많이 지쳐 사람을 대할 에너지와 여유가 없었으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사진첩을 넘기며 다시 청수사를 떠올려 본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해보고 싶었던 로망이 하나 있었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나만의 방식으로 그곳을 담아보는 것.
본당 오른쪽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안탑’이라는 작은 탑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어떤 유럽 여행객이 바닥에 앉아 조용히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행 내내 들고 다니던 노트를 괜히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현실을 살아내느라 감성과 감정이 무뎌진 걸까. 한참 동안 한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그 사람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오래 마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