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교토, 한낮의 돈키호테

에어팟을 빼고 밤을 걷다

by 환한

마치 미로 같은 교토역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서자 드디어 '교토'라는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비행기에 열차에 한참을 달려서 입국 심사까지 받았는데도 내가 여행을 왔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블로그에서만 보던 '아반티 쇼핑몰'을 보는 순간, '아, 내가 진짜 교토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앞으로 3일 동안 나의 집이 되어 줄 호텔에 체크인하는 것이었다. '다이와 로이넷 호텔 교토 하치조구치'라는 곳이었는데, 일본의 경주라고 불리는 이름답게 수없이 많은 옵션들 사이에 고민에 빠져 있던 나에게 직장 동료가 추천해 준 곳이었다. 교토역에서 가깝고, 주변에 편의점과 간단히 저녁을 해결할 수 있는 식당도 있어서 위치가 참 마음에 들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10월을 맞아 곳곳에 핼러윈 장식이 걸려 있었다. 9월 말이라 핼러윈 분위기를 즐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붙은 검은 고양이 스티커를 괜히 손으로 쓰다듬으며 혼자 흐뭇해했다.


어차피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올 거 창밖 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어차피 위치상 건물뷰렸다), 캐리어를 펼칠 공간이 충분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혼자 묵기엔 충분히 넉넉한 크기의 룸이었다. 짐가방에서 옷을 꺼내 걸어놓고, 거울 앞에 화장품을 정리해 둔 뒤에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침 10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 저녁 8시 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편하게 쉬어보는 순간이었다. "그냥 이대로 저녁 먹지 말고 잘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힘이 빠진 상태였다. 야경을 보러 나가기엔 체력이 달리고, 저녁을 먹기엔 이미 기내식으로 배가 불러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는 돈키호테가 떠올랐다.(보통은 24시간 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아반티 쇼핑몰 내에 있어서 그런지, 내가 갔던 아반티점은 밤 12시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에 돈키호테를 왔을 땐, '이것도 유명하대, 저것도 유명하대' 하면서 유명템들을 쓸어 담곤 했었는데, 이번엔 미리 쇼핑 리스트를 적어왔기에 쇼핑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1시간 안으로 끊지 뭐 (면세 대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잘 썼던 비누, 좋았던 치약, 엄마가 사 오라고 한 파스, 그리고 유튜브에서 봤던 신상 추천템까지. 인형이나 기념품은 결국 짐만 차지하고 방치되는 걸 잘 알기에 미련 없이 스킵했다.


밤 10시 무렵 돈키호테에 들어서자마자, 한밤의 고요는 한낮의 뜨거움으로 바뀌었다. 매장 안에는 "돈돈돈~ 돈키~" 돈키호테의 음악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쇼핑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거 팩 사야 돼, 이거 말차 유명하대" 말은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 오른쪽에서는 스페인 관광객이 배경음악의 소음에 맞서 구글 번역기에 의존하여(거의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다) 직원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왼쪽에서는 홍콩 커플이 유명하다는 헤어 제품을 양손 가득 담고 있었다. 아저씨들 틈에 끼어 파스 신제품을 비교해 보고, 한국인 가족 옆을 기웃대다가 추천받은 소화제를 담기도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중국인 인플루언서로 보이는 사람이 핸드폰 화면을 보며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모두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쳤을 법한 시간이었는데, 매장 안은 마치 정오처럼 활기찼다. 나도 어느새 그 열기에 녹아들어 매장을 이리저리 돌고 있었다. 필요한 걸 다 담고 나서도 '혹시 더 살 게 있지 않을까' 싶어 한참을 빙빙 돌다가, 결국은 처음 담은 그대로 계산대로 향했다. 대낮 같은 활기참에 빠져나갔던 에너지가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편의점에 들러 물과 간단한 간식을 샀다. 돌아가는 길에는 무슨 음악을 들을까, 잠시 노래를 고르다가 이내 꺼내려던 에어팟을 다시 집어넣었다(쇼핑백 손잡이에 팔목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그랬던 건... 맞다!). 내일이면 주말이었다. 현지인들도 잘 지나다니지 않은 평일 밤의 고요함을 즐기기엔 오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선해진 밤공기가 온몸을 감싸고, 간간히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가 귓전을 울리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때, 이번 여행에서는 에어팟을 꽂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전철의 시끄러운 소리를 막으려고 에어팟과 한 몸이 되었던 나를 잠깐 내려놓을 시간. 도시의 소음이 아니라, 내가 있는 이곳에 있는 '순간'을 최대한으로 즐기고 싶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