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공항에 사람이 이렇게 많을 거였어요?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확 밀려 들어왔다. 아무리 일본이라지만 후쿠오카처럼 거의 최남단 지역을 가는 것도 아니니 9월 말 정도면 많이 선선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 얼토당토않은 일이지, 한국도 별로 선선하지 않았는데), 간사이 공항은 덥다 못해 내가 찜통 속 만두가 된 기분이었다. 에어컨을 안 틀었는지 (아마도 틀었겠지...)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지금이 만약 겨울이었으면 내 목을 감싸고 있는 나의 두툼한 곱슬머리가 정말 고마웠을 텐데...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느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가방 속 머리끈이 이렇게나 간절할 수 없었다.
더위도 더위지만 로밍이 더 문제였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5G 요금제에 ‘메시지 전송 정도는 가능’한 속도로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가 제공된다길래 아무 준비 없이 왔는데, 인터넷 검색은커녕 카톡 메시지 하나를 전송하지 못했다. 아주 예전에는 잘 사용했었던 걸 기억하면, 서비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지국이 터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사히 도착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메시지 하나 못 보내고, 곧 타야 하는 JR 하루카 티켓 페이지도 열리지 않으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겨우 공항에 도착했을 뿐인데, ‘여행의 설렘’ 대신 ‘여행의 시련’이 먼저 찾아올 줄이야.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간사이 공항으로 모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오사카에서 열리는 간사이 엑스포가 한창이었으므로... 사람이 터지는 건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었지만, 이때의 나는 그런 엑스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입국 심사대로 향하는 길은 마치 주말 피크타임에 성수에서 가장 핫한 맛집에 들어가기 위해 피켓팅을 하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대기인원 3만 명의 인터파크 티켓팅 페이지를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마치 콩나물 자루 속의 콩나물처럼 옹기종기 서서 터미널 1로 이동하고, 비짓재팬 QR을 확인하는 줄에 서고, 키오스크 앞에서 또 서고, ABCD 코드를 받은 뒤엔 여권과 지문을 찍기 위해 다시 서고, 도장을 받기 위해 또 줄을 섰다. 비즈니스석도, Priority 라인도 없는 진짜 여행의 시작. “아, 이제부터가 진짜구나.”
잠깐 스친 일본의 첫인상은 조금 놀라웠다. 인천공항도 간사이 공항도 수만 명의 여행객을 맞이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인천공항이 키오스크와 표지판의 공항이라면(자동입국심사 기계는 매해 한 대씩 늘어나는 기분이다), 간사이 공항은 ‘사람의 공항’이었다. 비짓재팬 QR이 없는 사람을 컴퓨터로 안내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겐 키오스크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 키오스크 줄에서는 몇 번 키오스크로 갈지 정해주는 사람이, 이후에는 입국 심사 줄 앞을 정리해 주는 사람이 매 순간 존재했다. 수하물을 찾는 곳에는 캐리어를 일렬로 정리해 주는 분들이 있었는데, 누군가 실수로 삐뚤어 놓은 가방이 있으면 다시 정돈해 놓는 것을 주로 하시는 모양이었다. 이래서 아날로그의 나라라고 하는 걸까. 우리나라의 친절이나 세심함이랑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여전히 터지지 않는 데이터는 나의 속을 뒤집어놓다 못해 억장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출국 전부터 로밍 무제한 옵션을 추가해 둘걸. 덕분에 티켓 페이지를 로딩하지 못해 열차 한 대를 놓치고 말았다. 가까스로 공항 와이파이를 잡아 로밍 신청을 해낸 후에야 게이트를 통과했지만, 내가 탔어야 할 열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이미 일어난 일, 어쩔 수 없지. 호라이 만두가 그렇게 유명하고 맛있다던데 이미 역으로 들어온 뒤라 아쉬움을 삼키며 역내 세븐일레븐에 들렀다. 라운지에서부터 배가 터져라 밥을 먹었더니 썩 당기는 간식이나 음료가 눈에 띄지 않아 한참을 서성이다가, 유자 레몬 소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일본은 역시 유자지. 놓친 덕분에 음료를 살 수 있으니 이게 개이득인 걸까.
그런데 문득, 열차를 놓친 순간에도 너무 차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계획에 하나만 차질이 생겨도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짜증부터 났을 텐데. 출근길에 전철 시간 맞춘다고 뛰다가 무릎을 다쳐 몇 달을 고생하고 있을 정도로, 모든 걸 계획대로 해야 하는 J형 인간(으로 나는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열차 하나 놓쳤다고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고, 덕분에 지정석도 챙기고, 맛있는 음료수를 고를 시간이 생겼으니 더 좋은 거지. '이게 여행의 묘미인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구경할 풍경 같은 것은 없었지만, 한참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기차의 일정한 진동이 몸을 감싸니까... 뭔가 퇴근길 1호선 느낌도 나고(절대 싫어).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펼쳐 들고 바쁘게 일하는 (도대체 이번 여행은 왜 이렇게 일하는 사람이 많단 말인가) 사람을 잠시간 부럽게 쳐다보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지 마, 퇴사한 지 겨우 24시간 밖에 안 됐어. 아무래도 학창 시절부터 예체능 전공 + 공부를 병행하느라, 나중에는 직장과 대학원을 병행하느라 한 번도 직업이 없었던 적이 없어 '무직'이 된 스스로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쉬는 법부터 배워야겠어.
플레이브의 일본 데뷔곡 ‘카쿠렌보’를 들으며 노트를 펼쳐 이런저런 소회를 적었다. 한 시간 스무 분 남짓한 시간은 생각보다 금세 지나갔다. 교토,라고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을 때, 아까보다는 조금 선선해진 바람이 셔츠 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드디어 숨이 좀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남들과 비교하며 내가 놓친 것들을 아쉬워하던 마음도, 교토의 공기를 들이마시자 조금씩 풀어졌다. 환승 싫어 인간인 나에게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을 이동해야 하는 것은 좀 번거로웠지만, 그래도 조금씩 내려놓을 줄 아는 나를 만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