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릇에 밥을 먹고 싶다면

비즈니스석, 어색함으로 탑승했습니다

by 환한

커피라도 한 잔 사서 들어갈까 카페를 기웃대다 보니 어느덧 보딩 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지, 아까 전만 해도 공항 곳곳에 있던 카트 보관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아 한참을 서성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보다 못한 승무원이 구석 자리를 알려줘, 그곳에 카트를 놔둔 채 급히 게이트로 향했다. 한참 보딩이 진행된 뒤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아무리 줄이 다르다지만 Priority 입구로 곧장 들어가는 내가 괜히 새치기를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늦게 도착하고도 누구보다 빠르게 텅 빈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다 보니 문득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나만의 '기준'들이 떠올랐다. 대게는 법이나 규율 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것들인데, 예를 들자면 '커피는 스무 살 넘어서 마시기', '하이힐은 어른이 되어서 신기', '명품 가방은 30대부터' (대학 졸업 기념으로 사주겠다던 명품 가방을 거절했지) 같은 나만 알고 나만 신경 쓰고, 내가 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갓 서른이 된 주제에 비즈니스석에 타지 않기' 같은 걸 추가해야 할까. 잠깐 고민에 빠졌다.

꺄 여행이다! (신남의 흔들림)

복도 끝에 다다르니, 나의 탑승을 기다리던 승무원이 서 있었다. “단차가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마 이코노미석을 타도 들었을 안내였겠지만, 괜히 누군가의 ‘과한 친절’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평일 오후의 비즈니스석은 출장 중인 듯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역시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 정도는 돼야 이 자리에 어울리는 건가’ 하는 생각에 어깨가 괜히 움츠러들었다.


추가 요금 없이 단 1kg이라도 더 들고 가겠다며 가방과 캐리어를 가득 채워 선반 안에 꼭꼭 눌러 넣던 예전과 달리, 머리 위 선반은 텅 비어 있었다. 무겁지도 않은 봉투 몇 개를 올리는 것도 이미 도움을 받았는데, 에어팟과 노트를 꺼내려는 걸 보고 또 누가 도와주겠다고 올까 싶어서 그냥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고작 한 시간 반인데, 에어팟 없이 핸드폰 갤러리나 정리하지 뭐. 아 내 키가 딱 5cm만 컸어도 선반에서 짐 넣었다 빼는 게 2배는 더 쉬웠을 텐데.


이륙은 40분 정도 지연됐지만, 이상하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슬리퍼는 짱짱했고, 담요는 도톰했고, 좌석은 넓었고, 헤드폰에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었다. 언제 이륙할지 몰라 좌석을 펼치진 않았지만,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자 졸음이 스르르 몰려왔다. 퇴사와 출국 준비로 잔뜩 긴장해 있었던 탓인지, 마음이 풀리자 눈이 절로 감겼다. 지연이 나쁘지 않게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잔뜩 껴입은 채로 좁은 좌석에 에어팟도 없는 상태로 기약 없이 앉아있었다면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분명 짜증을 내고 있었겠지.


따뜻한 빵 냄새가 퍼져오고, 드디어 내 앞에 따뜻한 사기그릇에 담긴 함박스테이크가 놓였다. 고기에는 레드 와인이 어울리겠지만, 드라이 와인을 못 마시는 ‘애기 입맛’인 내가 고른 건 화이트 와인이었다 -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 라운지에서 괜히 든든하게 먹은 탓일까. 배가 불러서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 게 너무나도 아쉬울 지경이었다. 샐러드와 빵은 손도 대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나중에야 샐러드 그릇을 치우고 과일을 놓으려 계속 오갔던 승무원을 발견하고, 황급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냥 내 속도로 내 밥을 먹고 있는 건데, 허둥대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사기그릇에 나오는 기내식 너무 좋아 >.<


그때 눈에 들어온 옆자리 아저씨. 나는 음식 하나 먹는 것도 신경 쓰이고 어색해 죽겠는데, 그는 마치 이곳이 자기 집인 양 자연스러웠다(아니,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발을 갈아 신고 담요를 깔고 덮었다. 웰컴드링크는 거절했지만, 레드 와인 한 병, 화이트 와인 한 병, 맥주 한 캔과 콜라 한 캔을 마시고, 기내식까지 싹싹 비웠다. 많이 배고팠나? 아니면 나만 이 순간을 못 즐기는 건가?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순간 ‘그냥 평소처럼 이코노미를 탈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스쳤다. 잠깐 우울해졌다가, 사기그릇에 담긴 예쁘게 깎인 과일과 유리잔에 담긴 화이트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지. ‘괜히 왔어, 난 어울리지 않아’ 할 게 아니라,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돈을 열심히 벌자.
승진하는 순간에도 불타지 않았던 근로 의욕이 퇴사 후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