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1930, 모던 보이의 플레이리스트

by 환한

# 193X 년 겨울, 인사동 입구 다방 '비너스'


칼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 두꺼운 외투 깃을 세운 청년들이 인사동 입구에 위치한 '비너스(Venus)'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진한 커피 향이 그들을 반겼다. 다방 안에는 뿔테 안경을 쓴 문인들과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예술인, 영화인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꽤 늦으셨네?"


카운터에 앉아있던 스크린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의 영화배우이자 비너스의 주인장인 복혜숙이 가다와 알은 체를 했다. 여배우 특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모던보이 'K'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담, 혹시 소식 들었소? 이번에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나온 신보 말이오. 오늘 오전에 혼마치* 거리에 들렀다가 레코드 가게에 잠시 들렀는데, 가격이 글쎄 1원 50전이라더군!"

* 혼마치 - 지금의 '충무로'


K는 마치 대단한 뉴스라도 전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1원 50전. 1원 50 전이면 자그마치 설렁탕 열다섯 그릇은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남들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1원 50전의 사치품을 구경하러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나라를 잃고 미래마저 불투명해진 자신의 처지를 애써 부정하고 싶은 그의 작은 허세였다. 부모 손 빌어 괜찮은 옷을 걸치고 황실에서 즐겨 마셨다던 커피를 마시기 위해 다방에 온 그였지만, 동경에서 돌아와 이렇다 할 직업을 찾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과 모여 앉아 시대의 허무주의를 부르짖고 있다는 것을 마담은 잘 알고 있었다. 마담은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커피 잔을 닦는다.


"어머, 소식이 빠르시네. 우리 가게에도 어제 막 들여놨어요. 1원 50 전이나 주고 모셔온 귀한 몸이니, 커피 식기 전에 얼른 들어보세요."


유성기 바늘이 검은 레코드판 위에 얹히자,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경쾌한 왈츠 박자의 <태평연*>이 흘러나온다.


"눈물만 흘려서 무엇하나~ 한숨만 쉬어서 무엇하나~"


10전짜리 커피를 시켜놓고 1원 50전짜리 음악을 듣는 시간. 식민지의 청춘들은 따뜻한 비너스 다방에 앉아, 밖에서 군밤 장수가 추위에 떨며 "5전!"을 외치는 소리를 애써 잊으려 했다. 그날 밤, 비너스의 커피는 유난히 쓰고도 달았다.


1. 1930년대의 경성, 그리고 레코드


이제 21세기로 돌아올 시간. 모던 보이들이 감상에 젖어 듣던 그 검은 판때기, SP(Standard Play) 레코드의 라벨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거기엔 낯선 영어와 일본어가 적혀있을 것이다.


빅터레코드 사진자료.jpg 1932년 일본에서 발매된 빅터레코드의 <영객> 번안곡 음반의 모습(김교성 작곡)


Columbia (콜럼비아), Victor (빅터), Polydor (포리돌)

1930년대 경성의 음반 시장은 토종 기업의 무대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 독일을 본사로 둔 글로벌 거대 음반사들의 치열한 격전지였다. 당시 혼마치(충무로)와 명동 일대에는 이 외국계 레코드사들의 지점과 악기점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왜 1930년대의 조선에 진출했을까? 그것도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인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민족 말살 정책을 펼친 1930년대에, 그것도 '신민요'라는 최신 트렌드를 만들어서까지. 이유는 단순할 지도 모른다. 축음기 회사는 '축음기'를 새로운 시장에 팔고 싶었을 것이고, 당시 사장님들에게 조선은 매력적인 시장성(Marketability)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축음기라는 최첨단 하드웨어를 새로운 시장에 팔기 위해, 서양의 클래식이나 일본의 민요가 아니라, 그 시장의 가장 큰 (잠재) 고객인 조선인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조선의 노래'를 만들어 팔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아이러니다. 일제는 정치적으로 조선의 정신을 지우려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업 자본은 돈을 벌기 위해 가장 조선적인 노래를 발굴하고 기록했다. <조선팝, 영어를 입다>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만나볼 민요들은 모두 바로 이 거대 자본의 기획력 위에서 탄생한 상품들이다.


2. 1원 50전의 무게: 설렁탕 15그릇

그렇다면 이 '상품'의 가격은 얼마였을까? 앞서 비너스 다방의 마담이 "귀하게 모셔왔다"며 생색을 냈던 1원 50전의 가치를 2020년대의 가치로 환산해 보자.


1930년 11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당시 경제 불황으로 인해 종로 경찰서가 시내 음식점들에게 음식값을 내리라고 권고했는데, 그때 책정된 설렁탕 한 그릇의 가격이 10전(十錢)이었다. 그럼 이것을 사용해서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레코드판 1장 (150전) = 설렁탕 15그릇 (150전)


지금으로 치면 앨범 한 장을 사기 위해 국밥 15그릇 값, 대략 15만 원 정도를 지불해야 하는 셈이다. (음반이 아니라 콘서트 티켓 값에 맞먹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1930년대 고무공장 여공의 일당은 약 63~81전이었다. 즉, 레코드판 한 장은 노동자가 꼬박 2~3일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일해야 살 수 있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던 셈이다. 서민들에게 음악을 소유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사치였다.


3. 레코드의 주 소비층: 경성의 모던 보이와 권번의 기생들

그렇다면 노동자의 2~3일 치 임금과 맞먹는 고가품을 도대체 누가 샀을까? 주 소비층은 크게 두 부류였다.

룸펜_김희성.jpg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오는 룸펜 도련님 김희성의 모습*


첫 번째는 '모던 보이'라 불리던 (룸펜) 지식인들이다.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식민지 조국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그들은, 다방에 모여 10전짜리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1원 50전짜리 레코드음악을 공유했다. 그들에게 최신 유행가(신민요)를 듣는 행위는 암울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마약이자, 자신이 여전히 '문화적 엘리트'임을 확인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큰손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번의 예기들'이었다. 당시 요정이나 술집에서는 손님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최신 유행가를 틀거나 직접 불러야 했다. 그녀들에게 레코드판 구매는 유행을 공부하고 레퍼토리를 늘리기 위한 '직업적 투자'였다고 볼 수 있다. (민음in 장유정 <오빠는 풍각쟁이야> 참조)


4. 신(新) 민요: 박제된 전통이 아닌, 살아있는 팝(Pop)

이런 상업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신민요'다. 이전까지 민요는 논밭에서 일하며 부르던 구전 노동요였다. 하지만 레코드 회사들이 기획한 신민요는 달랐다.


작곡가: '전수린', '김서정', '김교성'처럼 '작곡가'를 특정할 수 있다.

퓨전: 서양의 왈츠(3/4박자)나 재즈의 스윙 리듬을 도입했다.

스타: 왕수복, 선우일선 같은 기생 출신의 스타 가수들이 마이크 앞에서 녹음했다.


콜롬비아, 빅터, 포리돌 같은 외국계 레코드 회사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레코드를 팔기 위해서 그들의 정서에 맞는 음악을 찾기 시작했다. 작곡가들은 전통적은 5 음계에 서양의 음계를 섞거나, 왈츠(3/4박자)를 도입하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요즘으로 치면 국악과 팝을 섞은 '퓨전 국악'이나 '얼터너티브 팝'과 같이 광범위한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곡이다.


이 노래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Commercial (상업성): 팔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Professional (전문성): 일반인이 아닌, 오디션을 통과한 스타 가수가 불렀다.

Recorded (기록): 구전되는 것이 아니라, 레코드판(Media)을 통해 유통됐다.


우리가 이번 챕터에서 다룰 <태평가>, <경복궁타령> 와 같은 민요들은 오랜시간동안 논과 밭, 노동의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부르던 노동요도, 마을의 문화와 정신을 담은 (공동체적) 유희요도 아니다. <경복궁타령>의 경우 1800년대 경복궁 중건 당시에 공사 현장에서 부르던 노동요로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21세기의 우리가 알고 있는 '최종 형태'는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경성의 가장 힙한 작곡가와 프로듀서들이 서양의 트렌드와 조선의 정서를 믹스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제 그 시절 차트를 휩쓸었던 트랙들을 하나씩 재생해 볼 차례다. 비싼 값을 주고 샀으니, 귀를 씻고 경청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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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트랙리스트 분석

그럼 우리가 배울 다섯 곡이 1930년대에는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살펴보자.


Tracks 01 & 02. 경복궁타령(Gyeongbokgung Taryeong)과 늴리리야(Nililiya) - 경성방송국이 낳은 쌍둥이 스타 1927년 경성방송국(JODK)의 개국은 조선 음악사의 혁명이자, <늴리리야>와 <경복궁타령>이라는 '라디오 스타'를 탄생시킨 신호탄이었다. 서울의 소리였던 경기민요는 전파를 타고 순식간에 전국구 유행가로 발돋움했는데, 그 중심에는 방송국을 주름잡던 권번 출신의 스타 가수들이 있었다. 특히 <늴리리야>는 당시 한성권번과 조선권번 소속 명창들이 가장 많이 방송한 세 곡 중 하나로 꼽힐 만큼(김지원, 2021) 압도적인 사랑을 받은 '방송용 히트곡'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비 방식의 변화다. 대원군 시절의 강제 노역을 풍자하던 <경복궁타령>조차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가사의 비판적 의미보다 굿거리장단의 흥겨운 리듬이 강조되는 '유흥의 노래'로 소비되었으니, 바야흐로 의미보다 '리듬'이 지배하는 대중음악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Track 03. 군밤타령 (Gunbam Taryeong) - 작곡가가 있는 창작곡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로 시작하는 이 신나는 노래는 왠지 조선 시대 장터에서부터 불렸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1932년 전수린이라는 작곡가가 만든 창작곡이다*. 심지어 처음 발표될 때는 남녀 가수가 주고받는 듀엣곡 형태였다고 한다. 가사 내용도 군밤을 파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애 감정을 다룬 가벼운 내용이 주를 이뤘다. 빠르고 경쾌한 4/4박자 리듬은 당시 모던 보이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작자 미상의 구전 민요가 아니라, 저작권자가 분명한 '히트곡'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전수린이 작곡했다는 설은 있지만, 음반을 확인할 수 없어 '작자 미상'의 곡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Track 04. 태평가 (Taepyungga) - 굿거리장단 뒤에 숨은 왈츠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이 노래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멘탈 케어 송'이 아닐까. 그런데 이 곡의 원곡 제목은 <태평연(太平宴)>이었고, 무려 왈츠 풍의 신민요였다. 1935년 가수 선우일선이 발표했을 때는 서양 악기 반주에 맞춰 부르는 우아한 노래였다. 훗날 국악인들이 이것을 우리 식의 굿거리장단으로 편곡해 부르면서 지금의 태평가가 되었다. 1930년대 경성의 댄스홀에서 이 노래에 맞춰 왈츠를 추는 모던 걸을 상상 해 보라. 태평가는 생각보다 훨씬 낭만적인 노래다.


https://www.youtube.com/watch?v=JlKg6AqZl1Q&t=1s

Track 05. 아리랑 (Arirang) - 천만 관객 영화의 OST 아리랑이 한국의 대표 민요가 된 것은 수천 년 전부터가 아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하면서부터다. 나라 잃은 설움을 담은 이 영화가 히트를 치면서, 영화 주제가였던 아리랑 역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즉, 우리가 아는 '본조 아리랑(경기 아리랑)'은 '당대 최고 흥행 영화의 OST'였던 셈이다. 극장에서 변사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면 관객들도 따라 울며 떼창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랑이 단순한 노래를 넘어 민족의 노래가 된 시작점이다.

* 우리가 보통 <아리랑>이라고 부르는 노래가 영화의 OST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경기 소리꾼들이 왕왕 부르는 <구아리랑>의 링크를 살포시 놓고 가겠다. 새롭게 등장한 <아리랑>과 구별하기 위해서 '구' 아리랑이 되었다고 하며, 경기 지방의 특징인 '경토리'로 불린 음악이다.


조선의 힙(Hip), 100년을 건너뛰다


레코드판이 닳도록 이 노래들을 들었던 그 시절의 청춘들과, 에어팟을 끼고 유튜브로 이날치나 씽씽의 퓨전 국악을 듣는 2020년대의 우리가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힙하다는 것을, 100년 전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역사 공부는 끝났다. 1930년대 경성의 클럽, 혹은 어느 다방 한구석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잡음 섞인 LP판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 시절, 조선의 힙스터들이 사랑했던 플레이리스트가 지금 시작된다.



필자 노트:

1. 1930년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설렁탕 한 그릇의 가격은 10전 정도였던 것으로 보임.

2. 반면 1931년 기사에 따르면 콜럼비아 축음기 주식회사의 신보는 1원 50전이었음.

3. "태평연"은 선우일선이 1935년에 취입한 노래로, 한국전쟁 이후 경기민요 명창 '이은주'에 의해 <태평가>로 바뀌었다.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는 바치어 무엇하나~"와는 다른 가삿말을 찾아볼 수 있다.

4. 옛날 레코드판은 다 LP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나의 짧은 지식에 통탄 중. 1930년대 모던 보이들이 듣던 판은 'SP(Standard Play)'였다. 가장 큰 차이는 '시간'. 우리가 아는 LP(Long Play)는 1948년 발명됨. 당시의 SP 판은 1분에 78바퀴나 돌 정도로 속도가 빨라서, 한 면에 녹음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4분 남짓. 요즘 노래가 대부분 3~4분인 것을 생각할 때 흥미로운 부분이다. (경기 12 잡가는 유산가 한 곡만 12분인데!)

5. 1932년 일본에서 발매된 빅터 레코드의 <영객> 번안곡 음반(김교성 작곡) 사진자료

6. 1938년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임금은 63전이었다. (동아일보)

7. 김지원. "한성권번과 조선권번의 음악적 성향 연구: 1928~1936년 가창 종목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2021.

8.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김희성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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