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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 Nov 16. 2023

메리지블루는 파랑

 내가 열아홉이었을 때, 지인 중 오랫동안 사주를 공부하셨다는 분이 내 것을 봐주겠다고 한 적이 있다.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야기 중 하나는 내가 평생 삶을 비관할 일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타고는 긍정적임이 있고 전체적인 운이 좋아 결국은 이겨낼 거라는 이야기였다. 이 말은 종종 나에게 힘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종종 우울해지거나 감성적이 되는 날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결국 이겨낼거야. 난 다시 행복해질거야. 하면서 자기 최면을 걸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메리지 블루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


 내가 처음으로 결혼 관련 브런치를 쓴 건 2022년 1월 초의 일이다. 이제 막 결혼 준비를 시작할 때. 그 때의 나는 인생의 중대사를 기록해 놓으면 추억이 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끄적였다.

 나는 결혼 전까지 스물일곱해를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서울 토박이었고, 그 중에서도 사립이니 강남8학군이니 하는 곳들만 거치며 변화가 적고 정돈된 삶을 살며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쩐지 말랑하고 자유로운 지금의 남편을 만나 집에서 독립하고 지방이나 해외로 떠나는 일련의 과정들이 마냥 새롭고 설렜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이 모든 설레는 요소들이 얼마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결혼 자체도 큰 변화일진데 거주지와 생활반경까지 완전히 뒤바꿔야한다는 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첫 스트레스는 무엇이었더라. 아마 예단이니 예물이니 하는 결혼 절차였던 것 같다. 용어는 낯설고 순서는 어렵고 예전과 달리 요즘의 가정들은 각각의 형태도 추구하는 가치도 다르다보니 어떤 걸 준비해야 형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걸 처음 인사갈 때부터 시작해서 결혼하는 순간까지 고민해야하다보니 매번 머리를 쥐어짜는 스트레스가 중첩되어 나는 점점 예민해졌다. 그나마 나는 엄마랑 하루에도 30번씩 이야기하는 사이라 우리 집은 그런데로 수월하게 넘어갔지만, 말 수가 적은 남편을 통해 시댁에 어떤걸 해드려야 좋을지 추측하는 건 정말로 답답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님이 당신이 결혼할 때는 이불이랑 수저 정도는 해갔다는 말씀을 남편을 통해 전하셨다.

 예단이라는 말은 절대 안 쓰셨지만 반상기와 이불, 은수저는 예단의 아주 대표적인 항목들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예단 없이 간소한 결혼을 꿈꿨고 상견례 때에도 충분히 얘기가 된 것 같았는데, 갑작스러운 예단 이야기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이걸 할까 말까 꽤 여러번 고민했지만, 결혼 준비 초반부터 삐걱거리기 싫어서 큰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나는 어머님이 말씀하신 브랜드에서 이불을 사고, 장인이 수작업 한다는 브랜드들을 골라 반상기와 은수저를 구매하고, 일일이 내가 검수한 후에 새로운 포장업체에 맡겨 보자기로 곱게 싼 선물들을 들고 시댁에 방문했다.


 그런 내게 어머님은 요즘 누가 반상기를 쓰냐고, 도로 가져가 환불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몹시 상처받았지만 결국 구매해간 예단을 물리지는 않았고, 어머님은 그 반상기를 시할머님께 선물로 드렸다. 받은 선물을 다시 선물로 드리는, 심지어 예단을 선물로 드리는 건 살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하여간 그랬다.

 아마도 이 즈음이 기점이었던 것 같다. 아물지 못한 상처와 풀지 못한 서운함이 기반이 되어 자꾸만 섭섭함과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 후로 남편의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돌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에 파랑을 만드는 돌.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만나게 되는 시댁 친척들.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틀렸다고 생각되면 뭔 소리야? 하며 무신경하게 끊어내는 습관. 슬쩍 찔러보고 비교하는 태도. 내가 오랫동안 돌보다 입양하기로 한 고양이를 두고 어쩐지 길고양이같이 생겼더라, 길에서 자랐으니 건강하겠니 하는 말들.

 내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남이라는 걸 모두가 잊고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본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가 30년쯤 된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가족이니까 이해해주겠지, 이 정도는 실례가 되지 않을거야 하는 낙천적인 생각들이 눈에 보였다. 가족 문화의 차이겠거니 하면서도 나는 종종 갑자기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스트레스를 대체로 말로 풀어내는 편인데 나의 가장 좋은 말친구는 우리 엄마였다. 결혼이 뭔지 이해하면서도 나의 서운함이 뭔지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어느 날 엄마한테 오늘은 또 얼마나 서운했는지 말하려고 하는데 목이 막히고 눈이 뜨거워졌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았다. 눈물이 계속 쏟아져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메리지 블루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결혼식이 다가올 때까지 눈물 없이 말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그럭저럭 정상인 척, 잘 준비하는 척 할 수 있었고 나는 여전히 결혼식장을 찾고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행복한 척 결혼사진을 찍고 심지어 그걸 제주도와 서울에서 두 번이나 해냈지만, 엄마와 단 둘이 남으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메리지블루 체크리스트 같은 건 해볼 필요도 없었다. 곧 미치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이미 미쳐버린 건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내 눈물에 깜짝 놀라는 대신 매번 끝까지 울게 해줬다. 결혼을 하라고도 하지말라고도 하지 않고 그저 언제든 원한다면 집에 돌아오라고 했다. 그 말이 지금까지도 나의 가장 큰 용기다.


 나는 진지하게 파혼을 고려했고, 어느 정도가 되야 파혼하기 타당한 이유일까를 고민하며 온 몸으로 앓았다. 그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부모님과 친척을 포함한 모든 '시댁'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차라리 그들이 객관적으로 아주 나쁜 일을 해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쉬웠겠지만, 그냥 인간관계의 문제였다. 차근차근 진행됐더라면, 혹은 내가 윗사람의 말에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는 순종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1대 다수의 인간관계에서 나는 '며느리'라는, 어쩐지 백년손님보다 못한 존재같은 뉘앙스를 주는 역할을 맡아야했고 결혼식이 예정되었으니 이제 30년을 함께한 아들 딸처럼 대하겠다는 그 마음이 폭력적인 강요로 느껴졌다. 그 뿐이었다. 내가 마음 속에 쌓아둔 수많은 사건들은 그저 예시일 뿐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서로 다른 페이지에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 되야한다는 게 문제였다.


 스포일러를 하자면 나는 결국 파혼하지 않았고 얼마 전 결혼 1주년을 맞았다. 나에게 어떻게 메리지블루를 극복하고 끝내 결혼에 골인했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밖에서는 정상인 척 하지만 결혼 후 꼬박 1년 동안 미친듯한 감정기복과 눈물, 슬픔, 화에 갇혀있었다. 글, 말, 외출, 사람 중 그 어떤 것도 내 슬픔을 풀어주지 못했고 진지하게 정신의학과 방문과 약 복용을 고려했다. 그리고 이혼도.

 하지만 여전히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게 아니라, 지금의 남편과 헤어진다면 결혼을 내 인생의 선택지에서 제외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결혼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생에 한 번 밖에 할 수 없는 결혼이라고 못 박아뒀기 때문에 실패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론 여기에는 남편이 좋은 사람인 것도 한 몫 했지만 언제든 돌아오라는 나의 진짜 가족, 나의 엄마가 가장 큰 용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남편이 자신의 원가족보다 새로운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남편을 보면서 시부모님이 보이기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가족인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게 슬픔에 잠긴 나에게도 보였기 때문에 파혼도 이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파랑을 만든 그 말들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결혼 후 1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을 좀먹고 있다.

나의 메리지블루는 현재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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