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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Aug 13. 2023

3. 부처의 가운데 토막이 될때까지

4인4색 기질 육아 : 엄마의 인내심 수행

요즘 많이 나오는 육아서 중 기질 육아라는 것을 보았다. 타고난 아이의 기질에 따라 양육법과 교육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기질은 관찰과 경험을 통해 부모 특히 주 양육자인 엄마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니 특정 전문가의 말이나 조언이 명확히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질 육아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도 전부터 우리 엄마는 한 배에서 나온 4명이 대체 어떻게 이렇게 전부 기질이 다를 수 있냐고 항상 말했었다. 엄마 말대로 우리 넷은 전부 기질과 성향이 다르다. 그러니 각자가 걸어가는 길도, 생각하는 방식도, 인생의 방향도 각자 다르겠지.


그런 4명을 키우느라 엄마의 일기장은 눈물 마를 새가 없었다고 한다. 4명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시키면 이 눈물이 마르겠지, 라고 1인당 6년, 첫째 입학부터 막내의 졸업까지 장장 12년을 버텼다고 한다. 그런데 왠걸, 엄마의 말에 따르면 사춘기는 새로운 수행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수행하러 절에 들어가지 말고 애를 낳아 키워보라고 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매일매일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받아들이고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아직 나는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지만, 엄마가 우리를 키웠던 과정을 돌아보면 과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인내심이 있었다. 인내심이 있었다는 말은 무조건 너그럽게 받아주기만 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끝까지 '화내지 않으면서' 선을 확실히 알려 주었다는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식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훈육하기란 웬만한 인내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엄마를 어떤 면에서 무서워했다. 엄마가 아니라고 하면, 그건 진짜 아닌 거니까. 



아빠는 외벌이었고, 우리 집은 애 넷을 여유롭게 키울 만한 넉넉한 집이 아니었기에 엄마는 항상 가계부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는데, 첫째의 첫 한글 선생님이 집에 와서 수업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엄마는 홈스쿨링을 결심했다고 한다.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 그래서 엄마의 유/아동 홈스쿨링이 시작되었다. 물론 유치원, 피아노, 태권도 정도는 다녔지만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학습적인 부분은 집에서 엄마와 함께 공부했다. 영어같은 경우는 영어선생님인 이모의 도움을 받았다. 네명을 다 가르쳐 보면서 엄마는 아이들의 학습 능력과 기질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첫째인 나는 언어적인 면에서는 빨랐는데 확실히 숫자에는 약했다고 한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인 나의 수학 학습 능력은 이정도 였다.

"1+1은 2야, 그렇지?" "응"

"그럼 1+2는 3이야, 그렇지?" '응"

"그럼 1+3은?" 

그렇게 물어보면, 세상 맹하고 해맑은 얼굴로 "몰라" 라고 했다고.

한번은 아빠가 그런 나의 산수 능력을 위해 주산을 가르쳐보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결국 나는 울고 불고 아빠는 너무 열이 받아서 주산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두동강 내면서 끝났다. (그 이후로 엄마는 아빠에게 아이들의 학습에서 손 떼라고 했다...)


몇 번이고 말해도 못알아먹는, 생각이라는 걸 안하는 것 같은 나를 보면 정말 혈압이 올라서 욱하는 것을 몇번이고 참았다고 했다. 한편 해맑기만 했던 나는 엄마가 열 받았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엄마는 절대 나에게 화내지 않고, "그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 오분 있다가 다시 생각해보자" 라고 한 뒤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으니까. 

그 정도로 나는 수학 머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내내 수학때문에 발목을 잡히고, 수학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그걸 잘 아는 엄마는 언제나 지원을 해 주었을 뿐 한번도 나를 탓한 적이 없었다. 

어떤 학생을 가르치면서 그때 엄마가 느꼈던 감정이 뭐였는지 어렴풋하게 느낀 적이 있다. 너무나 맹해 보이는 저 표정. 열번 넘게 설명해서 입이 아플 지경인데, 더 이상 어떻게 더 쉽게 설명해야 하는걸까. 나도 모르게 화가 치솟는데, 그 때 왜 엄마가 화장실에 가서 비명을 질렀는지 알것 같았다. 엄마의 참을성 있는 교육덕분에 나는 한박자 느린 이해력을 가지고도 공부를 잘 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반면 둘째는 수학적인 면에서 아주 뛰어났다. 정말 짜증났던게, 엄마가 나를 가르치는 옆에 앉아 대답하지 못하는 나 대신 둘째가 콩닥콩닥 신나게 대답을 했다. 그러면 나는 둘째를 죽어라고 노려보고 결국 싸움으로 번졌는데, 어찌됐든 그 덕분에 둘째는 이미 1학년 때 3학년, 3학년 때 5학년 수학 문제를 푸는 수준이었다. 대신 둘째는 몸이 약하고 성정이 무던하지 않고 예민해 모든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을 많이 냈다. 


둘째는 학습 그 자체보다 학습을 시키는 자체에서 부리는 억지와 땡깡을 참아내는데 엄마의 인내심이 들어갔다. 지금 들어도 우리 엄마가 참 대단했다고 혀를 내두르는 이야기는 중2병에 걸린 둘째를 붙잡고 영어 단어 외우기를 시켰다는 것이다. 학교와 학원에서 영어 단어시험을 너무 못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둘째에게 영어 단어장 한권을 떼게 만들자,라고 시작한 프로젝트는 엄마에게 온갖 모욕(?)을 다 맛보게 했다. 중2병에 걸린 철없는 불효 청소년은 엄마의 영어 발음을 지적하면서 끊임없이 빈정댔고, 정말 단어장을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그걸 참아내고 엄마는 둘째를 붙잡고 매일매일 영어 단어 시험을 봐줬다. 나도 그 나이대 학생들을 가르쳐 본 적이 있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되던데, 엄마는 '참을 인자 세개면 살인도 면한다' 를 되뇌이며 했다고 한다. 이제 머리가 큰 둘째는 그 때 엄마와 외웠던 영어 단어가 자신의 영어의 기반이 되었다고 말하며, 당시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누구보다 감사해 하는 사람이 되었다.




셋째는 컨트롤 하려는 기질이 강해서 낯선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이 심했다. 첫째가 (어느 면에서 ) 지능이 떨어지는가 고민했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둘째는 혀가 짧고 발음이 어눌해 걱정했던 시기가 있었고('사과'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셋째는 불안과 강박 증세가 조금 보여서 걱정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내일 학교 갈 책가방을 싸놓고 불안해서 자기 전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체크하는 것과 같은. 불안도가 높다 보니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어 둘째와 마찬가지로 학습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시키는 자체가 힘들었다고 한다. (막상 시작하면 잘한다) 


이유없이 하기 싫다고, 못한다고 하는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시키려면, 역시나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엄마가 '인내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몇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 들이 있다. 셋째가 너무 고집을 피우고 울어서, 정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화를 참고 셋째를 이층 침대에 올려놓았다. "셋째야. 네가 그렇게 우니까 엄마 귀가 너무 아파. 근데 너는 울어야 하잖아 그렇지? 문 닫으면 덜 시끄러우니까 엄마는 문 닫고 나갈게. 너는 여기서 맘껏 울어. 다 울면 엄마 불러 알았지?"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셋째는 울음을 그쳤고, 엄마를 불렀다. 

"다 울었어?"

"응"

"그래 시원하게 울었으면 이제 내려줘?"

"응"

그리고는 우는게 나아졌다는 이야기. 


또 셋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칠 때, 보조 바퀴를 떼고 두발 자전거의 뒤를 잡고 하루 종일 다녔다는 이야기. 그때 너무 체력적으로 힘들고 인내심의 한계가 와서 엄마가 포기한 순간, 놀랍게도 셋째가 두발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셋째의 엄마 인내심의 한계 시험은 첫 수학학원을 가면서 정점을 찍었는데, 엄마의 손을 잡고 집에서 15분 거리 학원을 가는데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몇번이고 "나 안가" "그래, 그럼 가지 마" "...띠러, 갈거야 (+잉잉 운다)" "그래 그럼 다시 가자" 이 상황이 반복 되었다. 엄마는 셋째가 정말 가고 싶지 않아서 안간다고 하는 것인지, 불안해서 안간다고 하는 것인지를 잘 알았고,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닌 본인이 결국 간다면 잘 다닐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해서 등록한 수학학원을 셋째는 엄마의 생각대로 몇년이고 무지 잘 다녔다. 




 사실 막내에 이르러서는 세명을 거쳐 엄마는 거의 육아 고수(?)가 된 느낌이었다고 한다. 육아 고수는 딴게 아니다. 어느 정도 냅둬도 알아서 잘 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지쳤고...)

막내는 네명 중 기질이 센 편, 순한 편에 속했는데, 그것은 언니오빠 셋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몫을 차지 하기 위한 생존 본능이었다. 대신 막내는 입이 정말 까다로워서 편식이 심했다. 예전같으면 어떻게든 먹이려고 했을 텐데, 엄마는 셋을 키우며 자연스레 알게된 경험(?)으로 '편식해도 죽지 않는다'라며 막내의 편식을 허용했다. 한글도 난리 법석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아빠 돼지의 멋진 방귀'라는 책 한권 가지고 뗐는데 그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줬는지 나중에는 막내가 그 책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미 세명을 가르치면서, 한글 뿐 아니라 학습에 있어서 엄마는 아무리 내가 욕심을 부려도 아이는 아이의 역량만큼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막내는 그냥 냅뒀는데, 그래서 막내는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만 했다. 알고보니 막내가 둘째 못지 않게 머리가 비상해서 영재교육을 시켜야 하는거 아닌가, 아깝다라고 했는데 엄마도, 막내도 별 의욕이 없었다. 대신 엄마는 막내의 고등학교 3년동안 매일매일 간식을 싸줬는데, 그때가 엄마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하루에 잠을 서너시간 밖에 못자던 시기였는데, 엄마가 보기에는 공부 대강하고 놀거 다 노는 것 같아서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절대 하지 않았다. 


막내는 공부 뿐 아니라 그림도 엄청 잘 그리고 각종 악기도 잘 다루며 언어도 잘 하는데, '영재의 길' 대신 그냥 행복하게 살겠다고 하여 별명이 '우리집 한량' 이다. 그 한량은 장학금을 받으며 간호대를 칼졸업하고 캐나다에서 간호 전공 공부를 초고속으로 1년 반만에 마치고 미국 간호사 자격증도 동시에 땄다. 나는 그 정도로 똑똑한 애를 '니가 하고 싶은 거 하라'라고 놓아준 엄마의 인내심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엄마와 애들을 어떻게 키웠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엄마는 그것은 끊임없는 '놓아주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식에 대한 기대치와 환상이, 결국에는 자신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식에 대해 알아가며, 그렇게 끊임없이 자식을 놓아주는 과정. 그것은 끊임없는 자아 성찰과 지독한 인내심을 요하는 과정이다. 자식이 내가 상상도 할수 없는 모습으로 성장할 때까지 오로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성만 쏟아 부으며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우리 엄마는 본인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너무 힘든 기억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반대로 엄마가 그런 트라우마를 겪고, 이겨낸 사람이기 때문에 4명이라는 자식을 키워낼 만큼 인내심 깊고 강인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은 내 친구가 나에게 자신의 불안을 토로한 적이 있다. 나는 욱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고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는데 내가 과연 나의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두렵다고. 


그렇게 불안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엄마는 자신이 겪은 것과 정반대로 자식들을 키웠다고, 오히려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더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고. 그러니 너도 잘 키울 수 있을거라고. 우리 엄마가 했던 말처럼, 부처의 가운데 토막이 되는 수행의 길에 들어선 위대한 당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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