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are Kang Feb 24. 2021

전야(前夜)

춘수가 오기 전의 나는 부모님에게는 꽤 데면데면한 딸이었고 사람이었다. 대학시절 자취하며 떨어져 지내던 삶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혹은 경제적인 독립까지 이뤄 이젠 집에 손 벌릴 일이 없어서 그런 건지 나에게 있어 집은 내 삶의 반절도 차지하지 않는 작은 존재가 되었다. 출근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방에 처박혀있기 일쑤였고, 집에 와서 컴퓨터를 붙잡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을 엄마는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가끔은 책을 읽기도 했지만 내 방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주말이면 늘어지게 자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가거나 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족은 그저 "동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이 든 부모님은 언젠가 책임져야 할 짐 같은 존재처럼 괜스레 느껴지기도 했다.


때론 집에 가는 게 싫어 일부러 자처해서 야근하기도 했다. 일이야 없으면 만들어해도 되는 것이고, 남들 다 퇴근한 사무실에 앉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기기엔 냉난방에 컴퓨터 시설들 등 만반의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사무실만 한 곳도 없었다. 배고프면 근처 제휴식당에서 '식대'라는 것을 받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있었다. 


집은 나에게 그다지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다지 집에 가고 싶지도, 집에 있다고 편안하지도 않았다.


집에 있지만 어딘가 마음속의 집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 이보다 더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공간. 나의 집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떨어도 행복함은 그저 한 순간이 되어 스쳐 지나갔다. 내 시간은 공허함의 연속이었다.


익숙한 새벽 세시. 

잠 못 이루는 밤 역시 꾸준하게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무슨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방 천장을 올려다봤다. 잠이 잘 오게 도와준다는 소리도 들어보고, 잠자리를 좀 더 편하게 변경해보기도 했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게다가 겨우 잠이 들어도 1-2시간 후엔 다시 깼다. 그리고 나는 자다 중간에 깨면 잠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다시 잠들 수 없는 특이한 증상을 겪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잠들려고 해봤자 피곤하기만 할 뿐 잠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잠자리를 옮겨 잠들었다가 또 새벽 5-6시면 일어났다. 쪽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겨우 서너 시간의 수면 활동은 나를 지치고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런 나의 삶에 춘수가 찾아왔다.
그리고 내 삶은 완벽하게 전환되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다. 집에 돌아가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나를 늘 설레게 하고 한시바삐 집에 돌아가게 했다. 별다른 일이 없어도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춘수는 나에게 행복함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조용히 따라와서 내 곁을 지켜주는 작은 존재. 내 손길을 마다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존재. 춘수는 나에게 집이 되었고, 평온함이 되어주었다. 원래 약속을 잘 잡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더 약속을 잡지 않는 편이 되었다. 어찌 보면 나는 춘수로 인해 사회로부터 고립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춘수가 가득 채웠다.


그것은 춘수가 고양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바라는 것 없이 오롯이 존재하며, 삶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작은 생명. 고양이는 내가 그를 온전히 사랑하게 하고, 또 온전히 나를 사랑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믿고 의지한다. 그가 내 삶의 짐이 되더라도 그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기에 나는 걱정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과 고양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