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프로젝트 매니저한테 탈탈 털렸다.
목요일에 있는 중대한 발표를 앞두고 발표 자료 준비를 담당하게 됐다. 생각보다 피드백을 많이 주고받게 되었고, 파트너가 목표했던 타임라인보다 하루 이틀 늦어지자 상사는 나를 따로 불러 따끔히 혼냈다.
왜 금요일 밤에 초안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월요일 새벽에 초안을 보냈는지, 왜 이게 긴급한 과제임을 알면서도 파트너에게 바로바로 이메일 답장을 하지 않았는지. 왜 자료의 퀄리티가 이거밖에 되지 않는지, 왜 체크인 미팅 때 집중을 못 하는지. 실망 섞인 질문을 연달아 쏟아냈다.
그 코멘트 중 몇 개는 인정할 수 있었지만, 다른 몇 개는 억울했다.
나는 나름 노력했다. 주말에도 로그인해서 일했고, 야근의 연속이었고, 성심성의껏 PPT 자료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시간과 노력의 끝이 결국 실망과 꾸지람이라니, 기분이 엿같았다.
애초에 큰 자부나 애착 따위를 느끼지 않는 회사여서 더더욱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서인지 깔끔하게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라는 책임감 있는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나의 액션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스스로를 감싸고 돌았다. 카메라는 켜지 않았지만, 상사의 잔뜩 내리깐 목소리에서는 피로와 짜증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처음부터 오래 있을 직장도 아니었던지라, 자연스럽게 여기서의 내 수명이 다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퇴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맞지 하는, 쿨내 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나라면, 대체 업무 강도가 훨씬 높은 변호사로서의 업무는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기 시작했다. 고작 일주일에 다섯 시간 정도 초과 근무한 것일 뿐인데도 죽을 것 같은데, 로스쿨 졸업 후 빅로에 들어가 지금의 두세 배 업무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때는 한 톨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을 텐데, 나 대신 파트너에게 머리를 조아려 줄 매니저도 없을 텐데. 그때 마주할 스트레스와 자괴감은 과연 나를 파괴하지 않을까?
엘셋은 작년 11월에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70은 거뜬히 맞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 무려 4점이나 낮은 166점이라는 비루한 점수를 받아 버리고 말았다. 요즘 166점이면 T30조차 간당간당한 점수다.
올해 1월에 보려고 했던 엘셋은 자신이 없어 withdraw했고, 결국 준비가 턱없이 안 되었다는 생각에 로스쿨은 다음 사이클에 지원하기로 했다. 1월 말~2월 초에 반짝하고 공부를 좀 하다가, 머지 않아 권태가 와서 책을 펼치지 않은지 무려 한 달이 되어 간다. 야근 탓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전부터 나사가 또 살살 풀린 까닭이 크다.
현 직장에서의 근무 기간이 길어지면서, 로스쿨에 대한 의지나 결심도 여러 방향으로 흔들린다. 야근이 잦아지면서 엘셋 공부를 병행하기 힘들어진 것도 있고, 현 회사에서 느끼는 매너리즘과 애매한 안락함이 모래주머니마냥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것도 있다.
그리고 저번 주 같은 일을 겪고 나면, 어쩌면 나는 내가 상상하는 만큼 유능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과연 치열하게 공부해서 명문 로스쿨에 들어가 상위권 점수를 유지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가 영어가 모국어인 백인들과 경쟁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과정을 무탈하게 버텨낼 수 있을까. 도중에 탈모나 암 따위에 걸리는 건 아닐까 하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까지 이른다.
그러다 한파가 닥친 요즘 취업 시장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린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존버를 하며 이 악물고 엘셋을 준비해서 근처에 있는 로스쿨이라도 가든, 칼이라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맞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