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 세계

떠난 이를 위한 헌정곡

by 고장난 몬스터

1년 전 즈음,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중국인 여성이 허름한 세탁소를 운영하며 재정 문제, 가족 간의 갈등을 맞닥뜨리며 자신이 살아오면서 내린 크고 작은 선택들을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줄거리나 주제 자체는 평범할 수 있으나, 영화의 정신없는 연출, 코미디인지 로맨스인지 서스펜스인지 액션인지 모르겠는 다소 혼란스러운 장르 설정과 미셸 여의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심이 담긴 연기력이 B급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영화를 오스카상을 무려 7개나 탄 레전드급 작품으로 만들어 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에블린(여주)과 웨이먼드(남주)가 끝내 부부가 되지 않은 어떤 평행 세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한 후 잠시 조우하게 되는 장면인데,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In another life, I would have really liked just doing laundry and taxes with you." 다른 생이 있다 해도, 할리우드의 아이콘이 되어 화려한 시상식에 나란히 서는 것이 아니라 소소하게 빨래나 세금 계산 따위를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고 속삭이는 웨이먼드의 대사는 누구에게나 미련과 궁금증으로 남아 있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하루하루 무수히 많은 선택을 내린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부터 동료와 어떤 스몰 톡을 나눌지, 그리고 일 끝나고 자기 전까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등. 일상적인 선택도 있고 조금 더 큰 선택도 있다. 가령 누군가와의 이별을 결심하는 일, 퇴사나 이직을 고민하는 일, 차를 사거나 여행을 떠나는 일과 같은.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가 있고, 기회비용이 생긴다. 두 갈래 길에서 왼쪽 길을 선택한 자는 오른쪽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른 채 여정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연인 관계에도 가차 없이 적용되는 시스템이다. 한 평행 세계에서는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평행 세계에서는 부부의 연을 맺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이별의 순간은 찰나였겠지만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뒤바뀌었을 것이다. 에블린의 인생과 웨이먼드의 인생과, 그들이 마주했을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과 무엇보다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식의 존재까지도.


인연이란 끈을 매듭짓지 못한 그 사람도 나의 수많은 평행 세계 중 한 곳에서는 극 중의 에블린과 웨이먼드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시간은 조금 걸렸겠지만, 둘 다 원하는 직장에 취직해서 작은 집도 얻고, 연애 당시 약속했던 것처럼 보드게임도 거실에 진열하고, 날이 풀리면 배드민턴과 테니스도 치고, 가끔 고양이나 강아지도 임시 보호하고, 주말이 되면 같이 코스트코에 장 보러 가고, 집에 와서 책을 읽고 토론도 해 보고…. 빨래나 세금 계산과 같이 별것 아닌 일상이겠지만, 그것이 나의 가장 큰 행복인 평행 세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평행 세계에 대한 믿음은 내가 ‘선택’이란 행위를 함으로써 놓친 무수히 많은 다른 삶의 전개들에 대한 추모이자 위로가 아닌가 싶다. 항상 인간이란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이성적인 개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최선’이란 것은 없고 내가 내리는 이 선택이 ‘최선’일 거라는 맹목적이고 굳건한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 흔들리는 순간에는 다른 선택을 내린 평행 세계에서의 행복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커피 원두 찌꺼기같이 씁쓸한 마음을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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