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인의 꿈을 내려놓다.
예술고등학교 무용학과로 진학하였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입시시험을 길게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비교적 수월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했다.
학기 중에는 새벽 6시부터 무용실에서 수업이 시작되었고 방과 후에는 개인레슨을 다녀야 했다. 당시 인천에 살고 있었고 학교는 안양이어서 새벽 4시에 기상해 지하철을 타고 통학하였다.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간경화로 입원하셨다. 아버지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계셨기 때문에 일반사업체와 달리 당신의 부재는 곧 사업운영의 정지로 직결되었다. 나는 콩쿠르 준비 시즌이어서 팸플릿에 들어갈 사진을 찍고 한창 작품을 배우고 있었다. 콩쿠르에 나가게 되면 기본적으로 작품비 및 레슨비, 의상비와 프로필 촬영비가 필요하다. 국제 콩쿠르라면 여기에 비행기표를 비롯한 경비가 추가된다.
아버지의 증상은 좀처럼 좋아지지가 않았다. 황달이 심해지더니 복수가 차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인하대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담당 교수님께서 깨어나기 힘들 수도 있다고 하셨고 약을 쓰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앞으로 내가 어떻게 돈을 벌고 살아야 할지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 다인실에 자리가 없어서 2인실에 입원을 한 상태였고 사업운영도 정지되어 병원비를 감당하는 것이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다음 달 레슨비와 의상비를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간호하고 계신 어머니께 수건과 속옷 등 필요한 물건을 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를 기다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날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새벽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동생은 중학생이었고 나는 맏딸이니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와 상의도 하지 않은 채 통보하듯 말하고 일반고로의 전학절차를 밟았다. 너무 빠른 포기가 아니었을까, 좀 더 버텨보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무용인으로 자리 잡고 소위 밥벌이를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유학도 적극 고려해야 했고, 많은 장애물들을 넘어가야 할 텐데 그때까지 집안의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나 자신에게 답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때부터 돈이 되는 일들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뒤쳐진 공부의 진도를 따라가는 것도 꿈을 포기해서 오는 슬픔도 아니었다. 집 근처 학교로 전학을 하였기 때문에 이미 그 학교에 다니고 있던 중학교 친구들을 마주쳐야 하는 일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친구들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고 나는 집안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냥 적성에 맞지 않아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얼버무렸다. 솔직하지 못한 내 모습에 화가 났고,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아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