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라는 가장 안전한 감옥

벙어리를 꿈꾸는 정화의 역설(丁火)

by 흔덕헌

침묵이라는 가장 안전한 감옥

벙어리를 꿈꾸는 정화(丁火)의 역설


어쩌다 태어났는데 우리집 책장에 ‘모모’라는 책이 있었다.

오래된 회색 종이에 오래된 활자들... 미카엘 엔데 『모모』


모모의 재주는 ‘잘 듣기’다.

말을 잘하는 재주는 없다.


매일 말이 말을 하고, 매 순간 후회하는 나는

중년이 되어서도 ‘모모’가 부럽다.


늘 꿈꿨다.


‘벙어리’가 되는 삶.

내 입안의 칼날을 잘라버리는 꿈.



아래의 이야기들은

나를 싫어하는 나의 기록이다.


그렇다, 나는 살고자 글을 쓴다.



한 여인이 있다. 정묘(丁卯)일주인 당신은 밤하늘을 밝히는 등불이자, 작지만 단단한 촛불과 같다. 특히 지지에 놓인 두 개의 묘목(卯木)은 당신의 섬세함과 예술적 감각, 그리고 타인의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촉수를 의미한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초민감자(HSP, Highly Sensitive Person)'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문제는 당신의 구조가 수생목(水生木), 즉 천간의 임수(壬水)와 계수(癸水)라는 거대한 감정의 바다가 끊임없이 묘목이라는 통로를 통해 분출된다는 점이다. 당신에게 '말'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휘몰아치는 감정과 직관이 정제될 틈도 없이 터져 나오는 '에너지의 배설'에 가깝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당신이 느끼는 후회는 '충동성'과 '공감 능력'의 비대칭에서 기인한다. 묘목의 날카로운 바늘(현침)은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는 언어적 순발력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상대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는 과잉 공감 능력을 지녔다.


찌르는 순간, 당신 역시 그 칼날에 베인다.

"벙어리가 되고 싶다"는 극단적인 소망은, 결국 '나의 통제권을 벗어난 언어적 폭주'로부터 나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고 싶은 처절한 자기방어 기제인 것이다. 나는 내 입안의 칼날이 밉다.


'반추'의 늪과 자아비판

당신의 명식에서 보이는 묘묘(卯卯) 자형(自刑)은 심리학적으로 '반추'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반추란 소가 먹이를 되새김질하듯, 과거의 부정적인 사건이나 내가 한 실수를 끝없이 되풀이하며 생각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다른 사람들은 대화가 끝나면 그 상황을 잊지만, 당신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혹은 잠들기 직전에 자신이 내뱉은 단어 하나,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다시 꺼내어 분석한다.


"왜 그런 단어를 선택했을까?"

"상대의 눈빛이 흔들린 건 내 말 때문일까?“


이 과정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심판대에 세운다. 명리학적으로 관성(壬, 癸)이 일간을 압박하는 형국은 심리학적으로 '가혹한 초자아(Superego)'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당신 안의 엄격한 판사가 당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벙어리가 된다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도 될 텐데"라는 생각은, 완벽한 도덕적 무결점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와 관계에서의 실패를 원천 차단하려는 회피 동기가 결합한 결과다.


식상(食傷)의 저주를 인성(印星)의 안식으로

당신에게 말은 식상의 영역이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뿌리는 인성이다. 현재 당신의 마음이 벙어리를 꿈꾸는 이유는, 인성이 식상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수다목부(水多木浮)', 즉 감정의 물결에 휩쓸려 나무가 떠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침묵'이 아니라 '정서적 완충 지대'이다.


말을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태생적으로 빛나야 하고 표현해야 하는 정화(丁火)이기 때문이다. 대신, 당신의 에너지를 입이 아닌 글이나 예술분야로 돌려야 한다.

"말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할수록 억압된 에너지는 더 날카롭게 튀어 나간다. 대신 "지금 내 안의 물이 너무 출렁거리고 있구나."라고 자신의 상태를 객관화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외면적 침묵이 아닌 내면적 관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 섞인 말은 반드시 24시간의 유통기한을 두라. 즉석에서 내뱉는 말은 묘목의 가시가 돋아 있지만, 하루를 묵힌 언어는 기미(己未)의 토(土)기운을 입어 부드럽고 단단한 대지가 된다.




오랫동안 ‘내가 나를 싫어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잊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이던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때 명리학이 내게 왔다. ‘벙어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은 역설적으로 ‘더 가치 있게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는 걸 알았다. ‘자책’을 ‘관찰’로 바꾸어야 했다. 나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그 예민함 자체가 가진 ‘그저 나’를 인정해야 했다.


지금의 글들은 식상의 통로를 입이 아닌 손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휘발되는 말은 후회를 남기지만, 정제된 글은 기록이 된다.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 입을 여는 대신 그것을 글로 쓰며 기록으로 치환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이 그러리라.)


그래, 나도 살아야지.



2026년 2월 24일, 글쓴이 흔덕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