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찾아온 고통을 이해하는 법
병오년의 해가 바뀌고,
달궈진 신금(辛金)에 데여 인간의 화상을 입고,
어느 날 (평소처럼 걷다가) 발목을 다쳤다.
며칠 후 남편이 (의자에서 일어나다) 허리를 다쳤다.
며칠 후 새벽에 달린 덧글 하나가 (나의 묘신卯申을 자극하여) 불면의 밤이 계속됐다.
- 자책,
- 불면,
- 부끄러움,
- 불안과 습한 고독,
- 다시 불면.
그러던 와중,
우연히 강기진 선생님께 ‘계사전(繫辭傳)’ 수업을 듣게 됐다.
한 문장을 듣던 중 가슴이 내려앉았다.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故 不過
지주호만물이도제천하고 불과
不過, 不過, 不過.
아, 이 수업도 우연은 아니었구나.
칼 융이 이야기 했듯, ‘우연을 도구로 하여 필연적인 답을 얻는 중’이었다.
우연은 없다.
(글귀를 필사한 덕분에 그날은 불면없는 꿀잠의 밤을 보냈다)
힘든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라는 고립감에 빠지게 된다. 그 때 우주의 법칙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안배되어 있다는 사실,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故 不過”의 원리는 단순한 낙관론이 아닌 차갑고 거대한 ‘질서의 위로’를 건넨다.
주역의 관점에서 나쁜 일, 힘든 일은 우주의 질서 밖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라, 거대한 순환의 한 마디일 뿐이다. 지금의 고통이 내가 잘못해서, 혹은 내가 버려져서 생기는 ‘무의미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듯, ‘變’의 범위 안에 머물고 있음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을 견뎌야 될 벌이 아니라, ‘지나가야 할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칼 융의 동시성과 주역의 필연에서 알 수 있듯이, 우주의 법칙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던져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다.
주지함이 만물에 두루 하여서 도가 천하를 구제하므로 지나치지 않는다(不過)
우주의 법칙은 우주 전체에, 모두에게 안배되어 있어서 모두를 구제한다. 그리고 지나치지 않는다. 즉, 모두를 다 관장하고, 너도 보고 나도 본다. 이는 우주 속에서 우리는 우주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와, 우주는 모두를 돌본다는 확신을 주는 단어였다.
나는 ‘不過’라는 단어에서 엄청난 힘을 받았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어였다. 단순히 실수가 없다는 뜻을 넘어 우주의 질서를 말하고 있었다.
인간의 비극은 대게 두 가지에서 온다. 모자라거나(不及), 지나치거나(過).
‘불과(不過)’는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곧 ‘중(中)’을 의미한다. 멈춰야 할 때 멈추고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간다. 그래서 결코 선을 넘지(過) 않는다.
인간이 왜 불안하고 근심할까? 내 욕심이 내 운명보다 지나치기 때문이다. 내게 안배된 법칙을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不過),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아, 나는 내가 왜 불면의 밤을 지새웠는지 알았다.
나는 과(過)했던 것이다. 그저 나의 그릇 안에서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했다. 삶의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지나침’ 때문에 밸런스가 깨진 것이다.
삶의 파도가 연달아 덮쳐올 때, 인간은 대개 그 거품 속에서 길을 잃는다. 나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인과관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운의 굴레에 갇힌 것 같은 절망감을 느낀다. 심신이 지쳐 '왜 나인가'라는 질문이 비명처럼 터져 나올 때, 우리는 『주역(周易)』 계사전의 오래된 지혜와 칼 융(Carl Jung)의 현대 심리학, 그리고 명리학(命理學)의 준엄한 식견에서 예기치 못한 위로를 발견한다.
칼 융은 서구적 합리주의가 놓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두 사건이 '의미'를 매개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에 주목했다. 융의 눈에 비친 우주는 낱개의 사건들이 파편화된 곳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망으로 연결된 유기체다.
우리가 겪는 '계속되는 나쁜 일'은 융의 관점에서 단순한 통계적 불운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의 무의식과 외부 세계가 공명하여 보내는 일종의 신호다. 융은 이를 '우연의 가면을 쓴 필연'이라 보았다. 지금 겪는 지독한 고통이 내면의 '자기(Self)'를 실현하기 위해 낡은 자아를 허무는 과정이라면, 그 고통은 파괴가 아니라 재창조를 위한 필연적인 진통이다. 우주는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이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지시하기 위해 고통이라는 강렬한 언어를 선택한 것이다.
명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은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기운의 순환이다. 흔히 운이 나쁘다고 말하는 시기는 명리학적으로 용신(用神)이 힘을 잃고 기신(忌神)이 득세하는 시기이거나, 대운의 흐름이 바뀌는 교운기(交運期)인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점은 명리학에서 말하는 가장 어두운 시기가 곧 새로운 빛을 잉태하는 시기라는 사실이다. 겨울의 끝자락에 만물이 꽁꽁 얼어붙는 것은 생명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봄에 터뜨릴 생명력을 응축하기 위한 우주의 철저한 안배다. 명리학적 식견은 우리에게 "지금 이 고통은 당신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계절이 겨울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우주의 법칙은 공평하여 영원한 밤도 영원한 낮도 허락하지 않는다. '불과(不過)', 즉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정교한 배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우주의 안배를 신뢰하게 될 때, 인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지금의 시련조차 나를 완성하기 위한 정교한 설계임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근심은 사라진다.
계속되는 나쁜 일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우주의 법칙이 안배되어 있다는 사실은 차갑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지금 고통은 무의미한 소음이 아니야"라는 본질적인 긍정이다. 우주는 목적 없는 고통을 낭비하지 않는다.
융이 발견한 동시성과 명리학이 증명하는 순환의 질서 속에서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인간의 삶은 거대한 우주의 드라마 속 한 장면이며, 지금의 지침은 다음 막이 오르기 전의 깊은 정적일 뿐이다. 혼란스러운 우연들 속에서 필연의 질서를 끌어당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마음의 주인(主)을 잡아야 한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나쁜 일들은 사실 당신을 더 단단하게 보호(護)하고, 결국 세상의 도(道)로 이끌기 위한 우주의 정교한 안배다. 그 법칙을 신뢰할 때, 고통은 비로소 ‘나다운 나’로 가는 길이 된다.
2026년 2월 26일, 글쓴이 흔덕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