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공평함, 죽음?

지금, 공평함의 정의를 다시 추려볼 때

by 흔덕헌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공평함, 죽음?

지금, 공평함의 정의를 다시 추려볼 때


우연히 들어간 한 작가의 브런치에서 ‘세상에 공평한 건 죽음밖에 없을까?’라는 주제를 만났다. 사실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현상이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철학자들도 동의해 온 지점이다. 신분, 재산, 재능, 심지어 선악과 상관없이 모든 생명체에게 예외 없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죽음은 가장 강력한 평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죽음’뿐이라는 탄식은 역설적으로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 쥐어지는 수저의 종류, 타고난 외모와 지능, 그리고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행운과 불행의 편차를 보면 ‘공평’이라는 단어는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명리학’과 내면의 질서를 분석하는 ‘심리학’의 관점을 교차해 살펴보면, 공평함은 결과의 동일함이 아닌 ‘역동적인 균형의 상태’로 우리 삶에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명리학적 관점의 공평함 - 절대적 결핍과 상대적 과잉의 총량 법칙

명리학의 핵심은 ‘중화(中和)’에 있다.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사주팔자에서 모든 기운을 완벽하게 갖춘 명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재물운(財星)이 넘치지만 건강이나 고립감을 감내해야 하고, 누군가는 명예(官星)를 얻었으나 내면의 표현 통로(食傷)가 막혀 답답함을 겪는다.


여기서 명리학이 제시하는 공평함은 ‘총량의 법칙’을 떠올리면 된다. 명리학적 관점에서는 ‘득(得)’이 있으면 반드시 ‘실(失)이 뒤따른다고 본다. 대운(大運)의 흐름 속에서 찬란한 전성기를 구가한 이는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모하며, 추운 겨울의 혹한기를 지나는 이는 내면의 단단한 뿌리를 내릴 기회를 얻는다.

즉, 명리학은 삶의 단면이 아닌 ‘전 생애의 주기’를 놓고 보았을 때, 모든 인간은 각자에게 배정된 오행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채우는 과정을 공평하게 겪는다고 본다. 하늘이 한 사람에게 모든 복을 다 주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길을 다 막아버리지도 않는다는 ‘천도의 공평함’이다.


심리학적 관점의 공평함 - 고통의 민주주의와 해석의 자유

심리학, 특히 실존주의나 아들러(Adler)의 심리학은 공평함을 외부 환경이 아닌 ‘내면적 반응’에서 찾는다. 객관적인 조건이 아무리 훌륭해도 인간이 느끼는 결핍과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억만장자가 느끼는 고독과 평범한 이가 느끼는 상실감의 밀도는 주관적 세계 안에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민주주의’다.

또한, 칼 융의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자신의 그림자(Shadow)를 마주하고 통합해야 하는 공평한 숙제를 안고 태어난다. 사회적 성취가 높은 이일수록 그 이면의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지며, 이를 통합하지 못한 자는 내면의 붕괴를 경험한다. 결국 외부적 조건은 다를지라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탐구하고 온전한 자기(Self)로 나아가야 하는 ‘정신적 투쟁의 기회’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두 관점의 조우 - ‘운명적 배분’과 ‘주체적 수용’

명리학이 ‘어떤 카드를 들고 태어났는가’에 대한 설계도라면, 심리학은 ‘그 카드를 어떻게 플레이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점이 만나는 지점에서 진정한 공평함의 의미가 도출된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화려한 결과(명리학적 성취)만을 보고 불공평을 논하지만, 그 성취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심리적 비용(심리학적 고뇌)은 보지 못한다. 명리학적으로 강한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그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평생을 투쟁해야 하며, 약한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주변과의 조화를 배우며 삶을 지탱한다.


결국 세상이 공평한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재물이나 명예를 나누어 주어서가 아니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와 자기완성의 과제가 각자의 그릇 크기에 맞춰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공평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차이를 지우는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각자가 짊어졌던 그 고유한 무게를 내려놓게 하는 유일한 쉼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공평함을 다시 정의

공평함을 고정된 결과물로 정의하면 세상은 불공평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애 전반에 걸쳐 흐르는 동적인 과정’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층위의 질서가 보인다. 결과로서의 공평함은 ‘모두가 같은 크기의 빵을 나누어 갖는 것’을 의미하지만, 흐름으로서의 공평함은 ‘각자의 허기만큼 채우고 각자의 그릇만큼 비워내는 순환의 원리’에 가깝다.


명리학에서의 공평함은 결코 동시성을 갖지 않는다. 어떤 이는 초년에 찬란하고, 어떤 이는 만년에 결실을 본다. 이는 명리학의 근간인 오행이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기 때문이다. 木의 발산이 있으면 金의 수렴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원리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발산하고 이루는 시기가 있었다면, 반드시 그 에너지를 정리하고 수렴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지금 당장의 불공평함은 그저 ‘흐름’의 단면일 뿐이다. 인생이라는 큰 바다에서 밀물과 썰물의 총량이 같아지는 지점이 공평함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즉, 공평함이란 ‘시간이라는 변수가 개입된 균형’이다.


심리학에서의 공평함은 ‘쾌락 적응’과 ‘빛과 그림자’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조건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한다. 예를 들어 하나를 가진 자가 둘을 갈망하며 결핍을 느끼는 것과, 열을 가진 자가 열하나를 갈망하며 결핍을 느끼는 경우를 비교해 보자. 외부에서 보기에는 열을 가진 사람이 훨씬 풍요롭게 보이지만, 인간의 감각은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변화의 폭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 결핍의 밀도는 같다는 이야기다.

또 칼융의 관점에 따르면 외적인 페르소나가 단단하고 화려한 사람일수록 그 내면의 그림자 또한 깊고 어둡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자가 치러야 할 정신적 비용과 고립감은 평범한 자의 그것보다 훨씬 가혹할 수 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다는 법칙은 내면세계의 가장 엄격한 공평함이다.


결국 공평함의 정의를 다시 내린다면, 그것은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큰 배는 큰 풍랑을 견뎌야 하고, 작은 배는 좁은 물길을 조심해서 지나야 한다.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그 사람의 그릇에 비례하여 주어진다는 점에서 흐름은 공평하다.

또 고정된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흐르는 과정은 나의 해석과 태도에 따라 방향을 주도적으로 잡을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와 ‘죽음이라는 종착지’가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 사이의 과정을 어떻게 흐르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전권을 각자에게 부여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공평함을 ‘상태’로 인식하면 늘 결핍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로 이해한다면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지금 내가 겪는 불균형은 더 큰 균형으로 가기 위한 흐름의 일부인 것이다. 공평함의 정의를 결과에서 흐름으로 옮겨올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라는 지옥에서 벗어나 나만의 궤도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나만의 궤도에서 찾는 공평함

공평함을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으려 할 때 세상은 지옥이 된다. 하지만 명리를 통해 나의 명(命)을 깊이 이해하고, 심리를 통해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창조해가는 주체적 의지를 발동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공평함을 발견한다.

나에게 주어진 오행의 편차는 나만의 독특한 빛깔을 내기 위한 장치이며, 내가 겪는 심리적 갈등은 성장을 위한 필연적인 통과 의례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평등 앞에 서기 전까지,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공평한 권리는 ‘나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를 나만의 철학으로 해석하고 살아내는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삶은 결코 불공평하지 않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악보를 들고 있을 뿐, 자신만의 고유한 악보를 완주해야 한다는 숙명만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2026년 3월 12일, 글쓴이 흔덕헌(欣德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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