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의 전이 - 보라색 드레스의 귀가

엄마가 돌아가신 날의 꿈 해석

by 흔덕헌

눈빛의 전이, 보라색 드레스의 귀가

엄마가 돌아가신 날의 꿈 해석


2024년 4월 7일 <일기> – 새벽의 꿈


늘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콧날, 눈매, 성격.......큰 키에 분위기도 외할아버지와 꼭 비슷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엄마의 얼굴에 외할머니의 돌아가시기 전 요양병원에서 뵌 얼굴이 자꾸 겹쳐 보인다.


그전에는 외할머니와 엄마가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눈빛. 눈빛이 꼭 닮아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 허공을 보는 눈빛, 그 모든 눈빛과 안광이 외할머니가 병원에서 나에게 보여주셨던 그 눈빛과 닮았다. 엄마의 눈빛이 변했다.


오늘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


옛날 외할머니 집, 세류동 옛집. 지금은 없어졌을 그 집. 거기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돌아오시려나.......안방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엄마가 들어오시는 인기척이 났다.


난 안보는 척 안방에서 나오지 않다가, 화장실에 들어간 엄마를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 문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걸 보니 엄마가 귀가하신 게 분명해’ 하며 엄마를 기다린다.


이내 덜컥, 오래된 문소리를 내며 젊은 시절의 검은 머리를 한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셨다. 검은 머리카락, 뒤로 하나로 묶은 머리, 화려한 색감의 홈드레스.


반가운 엄마가 집에 돌아오셨다.




눈빛의 전이, 보랏빛 드레스의 귀가


생의 마무리는 어쩌면 가장 화려한 시절의 옷을 입고 내면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평생 엄마의 상징과도 같았던 외할아버지의 강직한 콧날이나 단단한 체구가 아니었다. 엄마의 눈동자 너머로, 오래전 요양병원 침상에서 나를 응시하던 외할머니의 눈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살아생전 엄마와 외할머니가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엄마의 눈빛은 세상을 관조하고, 허공을 응시하며, 나를 투과해 저 너머의 심연을 보고 있었다. 안광(眼光)의 전이.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녹아드는 신비로운 의식이었고, 다가올 이별을 알리는 고요한 전조였다. 칼 융은 이를 ‘동시성(Synchronicity)’이라 불렀다. 외적인 관찰과 내적인 예감이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며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 눈빛을 마음에 품고 잠든 새벽, 나는 시간을 거슬러 세류동 외할머니의 옛집으로 소환되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집은 나의 무의식이 지어 올린 원초적인 성소이자 안식처다. 융의 관점에서 집은 인간의 정신 구조를 상징한다. 특히 ‘옛집’은 현재의 의식 아래 깊숙이 잠겨 있는 개인적 무의식의 층위다. 나는 그 무의식의 안방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이윽고 덜컥, 하는 낡은 문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화장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엄마가 돌아왔다. 나는 안방 문 뒤에 숨어 숨을 죽였다. 잠시 후,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여인은 내가 알던 백발의 엄마가 아니었다.

융은 화장실이나 욕실을 ‘연금술적 변용(Transformation)의 장소’로 보았다. 낡은 찌꺼기를 배설하고 씻어내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공간이다. 엄마는 그곳에서 육신의 고통과 노쇠함이라는 ‘낡은 껍데기를 정화하고, 영혼의 원형(Archetype)인 가장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복원되어 걸어 나왔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의 검은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홈드레스는 눈이 시릴 만큼 화려했다.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면서도 보라색의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고, 열대의 식물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문양들이 옷 위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엄마가 가장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 실제로 집에서 자주 입으셨던 옷이었다.

융의 색채 심리학에서 파란색은 ‘정신성’과 ‘사고’를 상징하며, 보라색은 ‘영성’과 ‘변용’의 색이다. 이성과 영성이 교차하는 그 보랏빛 에너지는 엄마의 영혼이 이승의 한계를 넘어 초월적인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열대 식물 같은 강렬한 보색 대비와 기하학적 문양은 평생 현모양처라는 페르소나(Persona) 뒤에 억눌려 있던 엄마의 원초적 생명력, 즉 ‘아니마(Anima)’의 화려한 분출이다.

이 기하학적 문양은 마치 내가 매일 공들여 그리는 디지털 만다라처럼 정교했다. 융은 만다라를 ‘자기(Self)의 통합’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았다. 엄마의 옷에 새겨진 문양은 엄마의 영혼이 스스로를 질서화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의 증거였다. 엄마는 그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하나의 완벽한 질서로 통합하여, 당신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만다라가 되었음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그것은 냉담함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이라는 이분법적 감정을 넘어선 ‘초월적 자기’의 상태다. 융은 이를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고요한 관조의 상태로 보았다. “나는 이제 모든 인연의 매듭을 풀고 평온에 이르렀다”는 성스러운 무언의 선언.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모성적 에너지가 비로소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꿈에서 깨어난 다음 날, 엄마는 그 화려한 드레스의 잔상을 남긴 채 이 세상을 떠났다. 임종 전날의 이 꿈은 융 학파에서 말하는 ‘초월적 기능’의 발현이다. 엄마는 슬퍼할 딸을 위해 당신의 영혼이 얼마나 깨끗하게 씻겼는지, 얼마나 당당한 모습으로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는지를 마지막 선물로 보여주신 것이다.


사주 명리에서 경금(庚金)은 숙살의 기운이며 단단한 의리의 기운이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강직했던 엄마의 삶은 평생 정화(丁火)라는 책임의 불꽃 속에서 아름답게 제련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임수(壬水)라는 맑은 물에 씻겨 ‘금백수청(金白水淸)’의 투명한 광채를 얻은 순간, 엄마는 가장 화려한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우주로 귀환했다.


비록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엄마의 눈빛은 내 안에 머물고 엄마의 화려한 문양은 나의 만다라 속에서 다시 피어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의 귀가’다. 나는 이제 매일 새벽, 내 마음속 세류동 옛집의 문을 연다. 그곳에는 여전히 검은 머리를 한 엄마가, 보랏빛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무표정한 평온함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엄마는 이제 나의 무의식 속에서 영원히 젊고 화려한 여신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생은 이토록 신비롭고, 이별은 이토록 눈부시다.


2026년 3월 19일, 글쓴이 흔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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