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동산

I miss you #2

by 규니동


어릴 적, 나는 시(市)에서 운영하던 수련원에 수영을 배우러 다녔었다. 당시 주 2회 부지런히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내 또래인 엄친아(그냥 엄마친구아들)와 함께 다녔었는데 서로 수업시간이 달랐고 30분 정도 일찍 끝나던 나는 항상 그 아이가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엄마와 아줌마(엄친아의 엄마)가 벤치에 앉아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수련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수련원 뒤에는 자그마한 동산 형태의 공원이 있었는데 탁 트인 가을 하늘과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 황갈색 잔디들이 어우러진 멋진 곳이었다. 마치 세상의 가을이 그 공원에서부터 시작되어 바람에 실려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곳을 홀로 거닐며 가을에 취하곤 하였다. 그러던 여느 때와 같던 어느 날이었다.그날도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원으로 향했다.


늘 봐오던 풍경과 뭔가 달랐다.


동산의 반구형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벤치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무언가 침범당한 듯한 기분이 들어 언짢아졌다. 천천히 돌아 걸어가며 모습을 살폈다. 지극히 평범한 차림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성시경표 무테안경, 뱃살처럼 늘어나 있는 맨투맨 티, 초등학생이던 내가 '실례합니다'하고 들어가도 될 정도로 통이 넓은 청바지 차림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고 있는 너드(nerd) 스타일의 남자.


그는 혼자이던 공간에 내가 나타났음에도 책에만 몰두했다. 눈대중이 대충 끝난 나도 곧 그에게 흥미를 잃었고 경계심도 누그러들었다. 그러던 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물 만난 고기처럼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으려 펄쩍거리던 메뚜기들이었다. 벌레를 보며 신기해할 나이는 지났고 나는 당장 지루함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불쌍한 메뚜기들은 그렇게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 돌 하나가 휙 날아와 내 옆에 떨어졌다. 적의에 차 뒤를 돌아보았다. 성시경은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체 불상처럼 앉아있었다.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의 무심함에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났다. 메뚜기를 찾아 도망치는 그림자를 전력으로 밟아댔다. '휘익'하고 다시 돌이 날아들었다. 얼른 뒤돌아봤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상관없다는 듯 얄밉게 책만 읽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신경전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그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뭐라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꼬마야?"


"친구야?"


아니면 그냥 "야?"


의외로 상냥한 목소리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밟아 뭉개놓은 메뚜기들을 위로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설파했다. 길어지는 설교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 즈음 그는 옅은 미소를 살짝 내보이더니 그만 가보라며 속삭이듯 말했다.


등을 돌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말라니아나 옮기고 다니는 쓸모 없는 모기 같은 해충들도 죽여선 안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뒤돌아선 찰나, 빈 벤치만이 덩그러니 나를 반겼다.

반구형 동산의 가장 중심부에 놓여있던 벤치.

내가 등 돌렸던 시간은 2초 남짓.

주변은 장애물 없이 탁 트인 잔디밭이었다.

그렇게 그는 증발이라도 해버린 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붉게 노을 지던 초저녁의 공원.

그곳엔 나와

메뚜기

그리고 가을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성인이 되었고 입대를 앞두고 그 공원을 다시 찾아갔다. 내가 변한 만큼 그곳도 많이 변해있었다. 훌쩍 커버린 나를 담아두기엔 동산은 너무도 작아 보였다. 어릴 적 내가 달려가 폭 안겨도 채울 수 없던 그 곳은 이제는 동산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조그마한 흙무덤에 불과했다. 추억의 터는 널브러진 철근과 쓰레기들로 많이 늙고 지쳐 보였다. 오래전의 그 벤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너무도 작아져버린 그 공간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러다 정갈히 쌓여진 벽돌더미에 앉았다. 기억과는 너무나 달라져 버린 이곳. 그리고 순수를 잃어버린 나. 왠지 모르게 서로 닮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돈 순간 문득 오래전 그가 지었던 미소가 떠올랐다. 거울을 본다면 지금 내 표정도 그와 비슷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제자리에 서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고 쓸쓸했지만 아마 얼마 남지 않은 입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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