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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고먐미 Nov 25. 2023

퇴사를 결심했는데 너무 무서워요

떨리는 손끝, 다운로드 폴더에서 썩어 가는 사직서

내 나이 32세, 만 5년을 꽉 채운 회사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회사'를 그만둔다기보다는, '직장인'을 그만두기로.



상기 본인은 2023년 2월 29일 부로 ... 사직하고자 합니다.


지난 목요일, 비장한 표정으로 사직서를 썼다. 막상 휘갈기는 데에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홀가분하고도 초연하다. 이 한 장으로 이 회사와의 질긴 인연은 정말로 끝이 나는 것인가. 씁쓸함을 머금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본다.


인쇄한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떠내보내는 마음으로 종잇장을 쓰다듬어 본다. 그런데 아차, 퇴직 날짜에 오타를 낸 것을 발견했다. 2024년이라고 써야 되는데 2023년이라고 썼다. 이렇게 쓰면 과거에 사직한 셈이잖아. 본인이 현자라도 된 마냥 초연했던 표정은 순식간에 ADHD를 지닌 말썽꾸러기의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사직서 파일을 다시 열어 숫자를 똑바로 고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오늘 팀장님이 안 계신다. 그럼 어차피 오늘은 못 내는 셈인데, 굳이 오늘 뽑을 필요는 없지. 내일 다시 인쇄해야겠다.



* * * 


그렇게 사직서를 다운로드 폴더에 그대로 묵힌 지 어느덧 일주일째다. 그렇게 세상만사를 초월한 표정으로 결의를 다져놓고서 막상 제출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역시 '우유부단'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우리 멋진고먐미 씨. 이처럼 하나도 멋지지 않은 점이 바로 멋진고먐미의 멋짐이다.


'신중함'이라는 가치를 이마빡에 간판으로 내어걸고, "아무래도 급할 건 없으니까요, 호호" 하고 잘난 척을 해 본다.


하지만 나는 사실 알고 있다, 그냥 두려울 뿐이라는 걸. 대책도 없이 멀쩡한 직장을 그만둔 것을 후회할까 봐, 돈 안 되는 일만 전전하며 내 밑바닥만 보게 될까 봐, 그러다가 동종업계의 시덥잖은 직장에 계약직으로라도 뽑아 달라고 애원하게 될까 봐. 막연히 이곳을 떠나기로 했을 때는 즐거웠는데, 막상 이 모든 게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걸까? 며칠을 오들오들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어떻게든 잘 해낼 거야." 하는 이중적인 자신감이 상수처럼 발견된다. 이 근거도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뻔뻔하게도 고요하고 평안하다.


부산스러운 불안감과 이상스러운 평온함. 이미 머릿속은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글러먹었다. 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내면에 휘둘리는 바람에, 어느덧 사직서 제출은 기약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 * *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이 직장에서 얻고 있는 것과 잃고 있는 것을 메모장에 나열해 본다. 의외로 '얻고 있는 것'의 항목이 구구절절 더 길다. ▲안정감과 사회의 인정(즉, 제1금융권의 자비로운 대출), ▲좋은 동료들과의 업무적·정서적 교류, ▲업무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됨, ▲직무 자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감사를 받는 일이라는 점이 좋음, 그리고 ▲현재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도 오를 일만 남은 호봉제의 급여. 이런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면 모두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잃고 있는 것(퇴사를 해야 하는 이유)'을 나열해 볼수록 어린애의 떼씀처럼 느껴진다. ▲신체와 시간의 자유가 없다는 둥, ▲살아 있지 않은 느낌이라는 둥, ▲감옥에 갇힌 느낌이라는 둥, ▲내 업무의 존재가치에 대해 냉소적인 느낌이 든다는 둥, ▲더 이상 이 직업이 설레지 않는다는 둥, 죄다 '느낌'에 대한 칭얼거림들뿐. 왜 퇴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누군가를 납득시킬 수 있는 그럴듯한 사유는 하나도 제시되지 않는다.


항목을 나열할수록 "배때지가 불렀군."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직장 덕분에 지금 네가 누리는 걸 누릴 수 있는 거야, 이 자식아!" 하는 아버지의 야단 소리와, "네가 드디어 호강에 받혀서 요강에 똥을 싸는구나." 하는 어머니의 비아냥도 들린다.


그런데도 나는 내 온 영혼이 '퇴사'를 강인하게 가리키고 있음을 느낀다. 어떤 말로도 설득이 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다. 애초에 설득을 할 의지도 들지 않는다. 이것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회사를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 버렸다. 이곳과 나의 인연은 끝났다는 것을, 여긴 더 이상 내가 몸담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버린 이상 무를 수는 없다.


내 영혼은 이미 회사를 나간다는 현실에 단단히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얼른 이 몸뚱이도 그곳으로 따라오길 자애로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오들오들 몸을 떤다. 그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두렵다. 그 두려움을 직면하기를 어영부영 미루면서 시간을 보낸다. 결심을 했으면 과감하게 실행이나 할 것이지 갑갑하기 그지없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가?

결국 나는 내 두려움을 직면하기로 했다. 사직서를 호기롭게 내지 못하는 자신을 '노간지'라며 비난하는 대신, 무엇이 나를 막고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했다. 내 속에 똬리를 튼 공포감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인정하고, 품어안기로 말이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나를 위축되게 만드는 두려움의 실체들을 따숩고도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전쟁통이 되어 버린 마음을 차분히 정돈하고, 진짜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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