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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고먐미 Mar 06. 2024

처장님과의 퇴사 면담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처장님 말마따나, 나는 그냥 번아웃이 왔던 것일까?

팀장님과의 퇴사 면담이 끝난 후, 나는 시무룩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강지훈 팀장님이 처장 결재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나를 부르더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꺼냈다.


    "처장님이랑 네 얘기를 했어. 시간을 내 주신다고 하니까, 한번 찾아가서 이야기 나누고 와. 아마 처장님이 나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갑자기 처장님과 면담이라니? 흡사 썩은 동태눈깔이던 내 눈깔이 일순간 '띠용' 하고 떠졌다.




뜬금 고백, 나는 대학 교직원이다


되도록이면 내 업종과 직업을 밝히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이쯤에서 글의 전개를 위해 일부분 밝힐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나는 현재 '대학 교직원'으로 재직 중이다. (구체적인 직렬은 비밀이다. 아무도 안 궁금해하는 비밀...)


대학이라는 조직에서 처장은 교수가 맡는 보직이다. 직원이 날고 기어 '부장'까지 오른다면, 그 위에는 언제나 '처장'이라는 이름의 교수가 있다. 대강 아래와 같은 체계로 보면 무방하다.


총장 ─ 처장  ─ 부장 ─ 팀장  ─ 직원


그러니까 '처장님'이라 하면 우리 부서의 우두머리이자 우리 대학의 교수님인 것이다.




멋쟁이 처장님과 갑자기 퇴사 면담을


처장님이 우리 부서에 부임한 것은 약 3년 전이었다. 그분은 외모부터 범상치 않았다. 바로 머리카락이 단 한 올도 없으셨던 것이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스킨헤드'에 사람 좋아 보이는 다정한 미소. 언제나 재미난 자극을 찾아 헤매는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그분의 첫인상은 완벽했다.


처장님은 외모만큼이나 성정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부서원들의 의견을 겸손하고 호기심 어린 태도로 경청했으며, 그 어떤 암울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지혜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개성만점 헤어스타일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소탈하고 유쾌하고 당당한 그의 인격은 이 보수적인 조직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야말로 '특이한' 것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부서원 모두의 마음을 재빨리 사로잡았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마음 깊이 따르고 존경했던 것은 아마도 나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자유분방함과 지혜로움, 그리고 그 완벽한 스킨헤드(겨울에는 추워서 모자를 쓰신다)를 진심으로 동경하고 사랑해 마지않았다.


그런 처장님과 갑자기 면담을 하게 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어요, 저러다 반드시 병이 날 거라고요


처장님을 만나기 위해 쑥쑥하게 교수연구실을 찾았다. 노크한 후 문을 열자 처장님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차를 내어주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그가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몇 년 전에 최선생님이 업무 성과를 발표했었지요.
그때 저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저렇게까지 일에 '진심'을 가득 담는 사람이 있다니, 하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했어요.
'저렇게 일했다간 반드시 번아웃이 올 텐데...'
싶었거든요."


죽상으로 '퇴사'를 말하는 내 앞에서 그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의 밝은 표정을 마주하고 있자니, 지금껏 세상 심각했던 내 모습이 한층 머쓱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나는 단순히 번아웃을 맞은 것뿐일까? 일을 지나치게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에? 


많은 성찰 끝에 일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은 스스로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일과 나 자신을 전혀 분리하지 못했다. 지난 세월 동안 이 지독한 동일시는 나에게 많은 괴로움을 가져다주곤 했다.


나에게 있어 '일'은 나를 오롯이 담아내고 표현하는 반영물이어야만 했다. 나는 일을 나의 분신처럼 대했다. 일은 반드시 나를 닮아야 했고,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내 업무 결과물에 쏟아부어야 했다. 하지만 일은 당연히 내가 아니다. 그런 미련한 시도는 당연히 많은 실패를 불러일으켰다.


하물며 일개 직장인, 그것도 이런 경직된 조직의 일원으로서 이런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실망'이라는 필연적인 결과를 향해 광속으로 내달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직장에서 어떻게 나를 꼭 닮은 일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무리 지랄맞은 광인이라 해도 일은 얌전하고 모범생 같은 놈이 주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꼴을, 그 상이함과 괴리감을 견딜 수 없었다. 나를 반영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주기적으로 내게 번아웃을 일으켰던 메커니즘이었다. 누구든 이 마인드만 따라한다면 성공적으로 번아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단연코 장담한다.





단순한 번아웃인가, 그 이상의 아득한 절망감인가?


처장님의 말을 듣고, 나는 내가 2023년 12월 현재 심각한 번아웃에 걸려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만이 문제였을까? 나는 이 괴랄한 성정 덕에 번아웃이라는 놈은 지난 5년여 동안 이미 수차레 겪어 왔다. 하지만 이번에 퇴사 면담이라는 상황까지 나를 끌고 온 극심한 괴리감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내가 느꼈던 진짜 절망감은 "이런 의미없는 일을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이어갈 인생"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를 하루하루 버티게 하는 월급이라는 안정감에 잠식당해, 진정한 나의 일은 끝끝내 하지 못한 채 정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일에 너무 목숨을 걸어 왔다는 나의 문제는 인정하면서도, 나의 이 아득한 절망감은 꼭 처장님께 토로해 보고 싶었다.


    "처장님, 저는 정년퇴직이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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