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내 모습

삶은 끊임없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

by 클로드

다음달이면 서울 국제 도서전이 열린다. 작년에 먼 발치에서 구경만하던 아쉬운 기억이 떠올라 이번에는 미리 일정을 빼놓고 얼리버드 예약을 진행했다. 다른이의 사진으로만 보던 도서전의 풍경을 직접 만나볼 생각에 무척 설레기 시작했다. 수많은 출판사들이 준비한 부스를 돌며 책을 고르고 굿즈를 사모으는 모습. 그러다 문득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이 시간도 분주히 일하고 계실 출판사분들이 떠올랐다. 행사 당일 누구보다도 에너지를 쏟을 그 분들이. 그리고 이 생각은 정말 생각지 못한 바람을 타고 12년 전 사회초년생 시절로 나를 데려갔다.


기업 연구직으로 일하면 한번 씩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 공부하기 위해 학술 행사에 참석한다. 그 해에는 내가 일하는 분야의 세계적인 학술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고, 우리 회사가 스폰서로 지원했다. 자연스레 나도 행사를 위한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4일간 열리는 대규모 학회를 위해 동료들과 전날부터 가서 행사장을 살폈다. 제품 홍보 부스가 설치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심포지엄이 열릴 장소를 체크했다. 대학원때부터 학회를 가보기만했지 이렇게 설치되는 과정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내가 행사의 굵직한 부분을 맡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현장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학회 당일, 부스에 오는 많은 손님들을 보았고 그들을 응대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심포지엄이 열릴 장소에서 브로셔와 도시락을 자리마다 준비하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행사가 시작될 무렵, 강연장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며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가 준비한 심포지엄을 들으러 온 많은 연구자들, 그리고 해외 연구자들을 보니 내가 이 큰 준비의 일원임이 실감났다. 한명 한명에게 입장을 안내하고 제품 샘플을 나눠드리는게 나의 일이었다. 태어나 처음 해보는, 경험 없고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웃으며 손님을 응대하는 내가 신이나 있었다. 사회적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진심으로 반가웠다. 낯선 이들과 심지어 외국인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는 일들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샘플의 수량을 체크하고 원활한 입장을 안내하느라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일이 몹시 즐거웠다. 참 이상한일이다. 나는 무척 내향적인 사람인데, 타인을 응대하는 일에서 이토록 즐거움을 느끼다니. 그때의 감정이 그리고 생각이 지금도 제법 선명히 남아있다.


그러고보면 이와 연결되는 경험이 또 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대학생 시절, 축제가 한창이던 계절이었다. 하지만 여느때 축제와 달리 내가 직접 일하는 축제였다. 과에서 주점을 열었고, 당시 과대표 선배와 친분이 있어 주점 일에 투입하게 된 것이었다. 캠퍼스에 현수막이 설치되고 그 아래서 나는 계란말이를 부치고 또 부쳤다. 그 전에 계란말이를 부쳐본 적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내가 계란을 톡톡 깨트려 넣고, 소금 솔솔, 다진 야채 한줌 넣으며 계란물을 휘저었다. 처음엔 하나하나가 망설임이었다. 계란은 몇개를 쓰지? 소금은 얼만큼을 뿌리지? 채소는 이정도면 되려나? 무엇 하나 확신에 찬게 없었다. 하지만 한 판 한 판 만들어내며 점점 마음에는 자신감이, 손에는 리듬감이 붙었다. 그리고 어느새 눈앞에 넓적한 계란판이 쌓이고 쌓여 탑을 이뤘다. 이 날 계란말이는 정말 불티나게 팔렸고, 내 손은 계란 물로 쪼글쪼글 불어있었겠지.

어둔 밤, 전구 조명아래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면서 만들었던것 같기도 하다. 주막을 가득 채운 학생들로 주변은 시끌시끌했고, 서빙팀은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가느라 동분서주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 주방팀은 각자 맡은 메뉴를 충실히 만들어내며 우리끼리 까르르 참 웃기도 많이 웃었다. 대학생들이 요리를 얼마나 해봤을까. 우왕좌왕 어수선하고 왁자지껄했겠지. 그럼에도 만들어낸 결과물은 그럴싸했던것 같다. 반응이 제법 좋았던 걸 보면. 어쩌면 모두 축제라는 분위기에 취해있던 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닥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는 대신, 나는 축제기간 저녁마다 그렇게 서서 주방일을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대학 4년, 봄과 가을 모든 축제를 통틀어 그 축제가 가장 재미있었다. 그저 부스를 찾아가 놀고, 주점에 앉아 먹고 마시던 다른 축제 때 보다 두 발로 뛰고 정신없이 일하던 그 축제가 백배 더 신나고 즐거웠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차려진 행사에 참여자로만 가는 것 보다 이렇게 주최자가 되는건 또 다른 재미라는 걸. 나는 거기서 더 큰 재미를 느낀다는 걸 말이다. 이때도 나는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즐거워하긴 하지만 별로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렇게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어서.


마흔이 된 지금 과거를 돌아보며 한가지 생각이 추가되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 나를 다 알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가 나를 아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가 의외라고 느껴지던 순간들을 우리는 한번 씩 만나곤 한다. 나를 알고 있는게 아니라 규정했던게 아닐까? 자신을 다 안다는게 가능한 일일까?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 과정을 기꺼이 밟아 나가보고 싶다. 스스로에게 더 많은 경험을 열어주며 의외의 나를 발견할 때마다 즐거이 웃어주고 싶다. 혹여 반갑지 못한 모습을 만날지라도 훗날 보다 푸근한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길 바라는 마음 하나도 덧붙여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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