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늦게 퇴근한 남편이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어, 아니...! 안 괜찮아."
그 찰나에 나는 대답에 대한 마음을 고쳐먹었다. "How are you?"의 짝꿍 "Fine, thank you."처럼 "괜찮아?"라는 질문에 우리는 너무 무심히도 "응, 괜찮아."라고 대답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날따라 유독 퇴근 후 숨 가쁘게 주부 모드로 돌입했다. 퇴근길에 동네 과일 가게에서 장을 보고, 집에 와서 환기를 시키며 청소기를 밀었다. 아이 올 시간을 확인한 뒤 후다닥 쓰레기를 들고 나와 버리고 학원 버스 하차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녁 6시. 추위와 어둠을 뚫고 노란 버스가 들어오고 아이와 처음 인사를 나눈다. 아침 일찍 자고 있을 때 출근을 하니 이 시간이 우리의 하루 첫 만남이다.
작고 말랑한 손을 잡고 들어와 부지런히 저녁 준비를 한다. 어제 먹다 남은 불고기에 방금 사 온 양송이를 한가득 넣어 볶고, 다른 한쪽에서는 브로콜리를 데친다. 제발 이번에는 물렁해지기 전에 얼른 빼야지! 브로콜리를 향한 결의가 제법 굳다. 찬 물에 재빠르게 헹구고, 초장 대신 처음으로 참기름과 소금 간으로 조물조물 무쳐본다. 배고파 참새 입을 하고 있는 아이 입으로 한 조각 넣어주니 "음~ 맛있어!" 흥겨운 감탄이 흘러나온다. 이번엔 성공이다!
이것저것 욕심부리느라 저녁이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 후다닥 먹고서 아이가 다 먹기를 앉아 기다리는데 옆에서 스윽 주먹을 내민다. 묵찌빠 타임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심심하다는 아이는 식탁에서 묵찌빠나 끝말잇기를 즐긴다. 그렇게 한바탕 식사와 놀이가 끝나고 설거지를 한다. 마치고 나니 오늘의 에너지를 다 소진한 듯, 잘 때 말고는 웬만해서는 눕지 않는데 망설임 없이 소파와 한 몸이 되어버렸다. 눈앞에 앉아 혼자 놀던 아이는 "엄마 심심해." 하며 뒤를 돌아보더니 "엄마 졸리는구나?" 하며 이내 단념한다. 그 마음을 일으켜주지 못한 채 15분쯤 누웠을까, "엄마 배고파" 소리가 들려온다. 뜨아아... 설거지 마친 지 15분 만에 간식 대령 시간이 왔구나. 아이의 배고픔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엄마의 책임이기에 몸을 일으켜 딸기를 씻는다.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남편이 온 것이다.
피곤의 기색이 역력한 나를 보고 괜찮냐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괜찮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남편에게 한 대답인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한 답이기도 했다. 그날따라 정말 일이 많았다.
시간을 아침으로 되돌려보면, 새벽에 배송오기로 한 요구르트와 밀키트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저녁에 해 먹으려고 계획했는데 예약한 아침 시간에 오지 않은 것이다. 낮에 업체에 메시지를 남겼고, 확인해 보겠다는 답을 받은 뒤 또다시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고 예약 시간을 12시간 넘긴 저녁 8시에 "배송 완료했습니다."라는 문자가 달랑 온 것이다. 아무런 사과도 없이. 심지어 요구르트는 평소와 달리 냉기가 없었다. 매우 화가 났지만 사과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내 머릿속에서 치워놓고 싶기도 했다.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오후에 핸드폰을 울린 은행 메시지. 대출 기한이 끝나가니 미리 연장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아, 이것도 해야 하는구나. 필요한 서류도 떼야할 거고, 은행은 또 언제 가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도 전혀 줄지 않은 대출에 마음이 돌덩이가 되었다. 이런 거 생각 안 하며 살고 싶은데 이렇게 한번씩 급 다운된다.
아 하나 더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동네 디저트 가게에 케이크를 예약했다. 그런데 낮에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유명한 데에 케이크를 예약해 줬다고 말이다.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어야 하는데 짜증 비슷한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두 개의 케이크를 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예약한 케이크를 취소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돈도 다 낸 상황에 취소 연락을 하는 게 참 죄송스럽기도 하고 스스로도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영 괴로웠다.
이런저런 감정 소모가 엎치고 덮친 데다가 나는 무슨 파이팅이 넘쳐 퇴근 후 장도 보고 요리까지 나섰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다운될 수밖에. 하나 하나로 보면 참 별거 아닌 일 같지만 이 모든 게 얹히니 밤새 눈 쌓인 지붕처럼 버티기 무거웠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 현재의 일처리는 치워놓고 엉뚱한 데에 몰입하며 환기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누워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도피였다. 그렇게 괜히 애꿎은 남편만 눈치 보게 만들었다.
다음날 오전, 남편은 카톡으로 나의 안부를 물었다. 일부 해결된 것도 있고 스스로 조금 정리가 된 덕에 나의 지난 시간을 장문의 카톡으로 쏟아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그랬노라고.
그 후 시간이 지나서일까, 동료와 수다 떨며 잊어서일까, 어떤 일들이 정리되어서일까. 퇴근 후 밤에 요가를 다녀오고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두통만 좀 남아있어서 홍삼 진액을 꿀꺽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맞이한 오늘, 새 날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 시작은 좀 우스웠다. 한창 꿈을 꾸다 일어났는데 그 꿈이 스스로도 참 허탈했다. 연락이 드문 드문 끊긴 친구가 청약이 당첨되어 내가 사는 지역 쪽으로 이사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간다는 동네가 내가 한때 무척 가고 싶었지만 금액의 장벽으로 가지 못한 동네였다. 그리고 나는 조건과 상황에 맞춰 전혀 기대되지 않는 동네로 이사를 갈 예정인 상태다. 점점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너무도 생생했다. 바로 친구와 나의 상황을 비교하며 좌절감마저 느꼈다. 그렇게 감정이 푸우욱 추락하는 동안 잠에서 깨었다. 그때의 허탈함이란! 그리고 이내 못난 내 마음을 직시했다. 어쩜 꿈에서도 이렇게 못났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이상했다. 그렇게 못난 나를 마주하고 허탈이 웃고 나니 요 며칠의 모난 마음들이 뭉그러지는 듯했다. 등에 맨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개운했다. 이건 뭐였을까? '에그, 참 못났다.' 하며 웃음과 함께 내뱉은 한숨 속에서 나를 또렷이 직시한 것일까? '그래, 그건 참 별거 아닌 일이었어.'하고 깨닫게 된 것이었을까.
그러고 나서 새벽에 이어서 책을 읽고 마인드 셋 영상을 보며 그동안 푹 꺼져있던 마음이 일으켜졌다. 오늘따라 책에서 만난 문장도, 영상에서 들려온 이야기도 마음을 시원하게 두드렸다.
그 결과 오늘은 지난 이틀의 다운을 만회하려는 듯 더 밝은 모습으로 가족을 대할 수 있었다. 나 자신도 훨씬 개운하고 행복했다.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있는데, 나는 뭐 하러 그렇게 감정의 땅을 파고 있었던 말인가.
스스로의 못난 마음을 똑바로 바라본 게 도움이 되었다. 나의 고단함에 대한 인정과 그 일은 그리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정이 조화를 이루며 자유를 되찾았다. 이 경험과 느낌이 요 며칠을 지나며 얻은 신선한 교훈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괜찮냐는 질문에 반사적인 대답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 "아니, 안 괜찮아."라는 대답으로 나와 상대에게 솔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큰 무거움을 예방했다고 생각한다. 묻어둠의 무거움.
"못났다."
"안 괜찮아."
둘 다 부정적인 말이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이 두 말 덕분에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 말들이 가진 더 깊은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며 살아야겠다. 이 경험을 잘 활용하며 나를 건져 올리고 가족에게 덜 모난 사람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