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회사에서 연말 성과 발표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 전부터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오랜 발표불안과 회사에서 발표하며 떨었던 경험은 발표 앞에 나를 점점 더 쭈그리게 하고 있었다. 힘들었던 경험만 자꾸 떠오르며 부정적 암시에 휩싸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지난 한 달 동안 반대의 긍정적 암시가 이곳저곳에서 찾아오고 있었다. 정확히 한 달 전 공저책 <나는 글을 쓰며 매일 단단해져 갑니다>를 출간했다. 책의 한 꼭지로 "두려워도 스피치"라는 글을 써냈는데, 막상 책으로 나오니 나의 오랜 불안을 드러내는 게 치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콤플렉스를 커밍아웃 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혼자 끙끙대는 콤플렉스가 아니구나라는 가벼움이 들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노력했고 나아지는 과정을 세상밖으로 꺼내놓음으로써, 그리고 그 이야기를 가족과 지인들이 조금씩 알게 됨으로써 한발 더 치유되는 것 같았다.
요즘 <내면 소통>의 저자 김주환 교수님의 유튜브 강의를 보며 또 다른 저서 <회복 탄력성>을 읽고 있다. 지금 내게 절실한 회복 탄력성, 자기 조절, 내면 소통 이 모든 것에는 자기 인식, 타인 인식, 상호 소통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타인과의 관계, 소통이 나의 회복 탄력성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이 내용은 내게 매우 새로운 환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창은 잊고 있었던 다른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곧이어 다른 책이 생각났다. 11월에 엘슈가님의 브랜딩 스터디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읽은 커리책, 이근상 저자님의 <당신의 브랜드는 브랜드가 아닐 수 있다>. 브랜딩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연결하는,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책의 말미에 쓰여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브랜딩은 결국엔 사랑"이라는 이 말에 꽂혔었다.
나와 타인의 소통, 사랑에 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이전의 기억을 데려다 놓았다.
작년에 스피치 라엘 선생님으로부터 스피치와 보이스 수업을 수강할 때 이런 말씀을 자주 듣곤 했다.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해야 진정한 스피치를 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이 말이 와닿지 않았다. 나를 무척 아끼긴 하지만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고, 청중을 사랑한다는 건 더더욱 공감되지 않았다. 청중은 그저 홀로 서서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들키게 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모든 것들이, 온 우주가 내게 하나의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사랑!! 그 메시지가 내게 서서히 스며들 때쯤 동료 앞에서 굉장히 긴장되고 걱정되는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동료의 시선에 대한 경직된 마음이 아닌 애정의 마음을 담으니 긴장이 사라지고 순수하게 상황에 몰입할 수 있었다. 사랑으로 두려움을 몰아낸 경험이었다.
이 모든 암시와 작은 경험을 붙잡아보기로 했다. 발표할 때 청중을 사랑하기로 말이다. 요즘 루이스 헤이의 <미러>를 읽으며 거울을 보고 나를 사랑하는 미러워크를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 내가 받은 메시지를 더하며 거울 앞에 서 보았다. "나를 사랑해.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할 거야."
긍정확언이 유행이어서 따라 해보았지만 별 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나의 절박함과 깨달음에서 온 메시지를 거울 앞에서 선언해 보니 그 느낌이 달랐다. 양팔에 전율이 지나가며 자연스럽게 피어난 미소를 마주했다.
스피치 선생님께 배운 청중을 사랑하는 마음, 질문으로 소통하기, 발성과 복식호흡 연습으로 발표일을 기다리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였다. 이것을 선명하게 결심하고 나니 발표를 앞둔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신나는 감정으로 바뀜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마냥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두려움 사이로 긍정적 감정이 싹트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봄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대망의 발표 날, 여전히 긴장감 때문인지 아침밥을 먹는 입맛이 영 멀미가 났다. 하지만 다시 거울 앞에 서서 외쳤다. 나와 눈을 마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겠노라고. 출근길 운전을 하며 호흡과 발성 연습을 했다. 그리고 딱 하나만 바랐다. 오늘의 발표가 긍정적 경험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팀 발표회 시간이 되었고 내 앞의 발표자들이 한 명, 두 명 발표를 해나갔다. 점점 내 순서가 다가왔다. 예전 같으면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그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공황 발작으로 상비하고 있는 약도 오늘의 발표 앞에서는 복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맡겨보기로 했고, 다행히 그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평온했다.
피할 수 없는 시간, 내 차례가 왔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또박또박 걸어 나가 청중을 마주했다. 두 손에 레이저 포인터를 쥐고 고심해서 만든 발표 슬라이드를 짚어가며 발표를 시작했다. 나는 지식적인 내용보다는 순수한 나의 생각과 소신을 말할 때 깊이 몰입하며 긴장하지 않는다. 면접 때도 그랬고 발표의 질의응답 때도 그랬다. 이번 발표에서도 도입부에서 업무를 대하는 나의 마음 자세를 소신 있게 말했다. 그 시작이 좋았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업무 내용을 발표했다. 순간순간 얼어붙기도, 포인터를 쥔 손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의 중심을 찾았다. 요가에서 흔들흔들하다가도 균형을 잡아내듯이 말이다. 멘트에 질문을 섞어가며 말하니 자연스레 청중의 표정을 살피게 되었다. 나를 향해 경청과 미소를 보여주는 청중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에게 존중과 애정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를 건네듯 발표를 이어갔다. 긴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지만 찰나의 어떤 즐거움도 느꼈다.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는 희열감!
그렇게 발표와 질의응답이 무사히 끝났다. 두려워하던 목소리 떨림이나 갈라짐 없이, 오히려 힘 있게 또박또박 말한 것 같다. 과거에 청중으로부터 받던 시선의 압박감이 아닌 내가 먼저 청중을 관심으로 바라보며 주고받는 소통의 연결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일에 대해 갖고 있는 소신을 마음껏 전했다.
기뻤다. 처음으로 발표를 끝낸 뒤 기쁨이 찾아왔다. 수치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쭈그리는 게 아닌, 행복한 얼굴로 환하게 다음 시간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료들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이해가 쏙쏙 되었다, 감동적이다, 신뢰감 간다, 오늘 발표 참 좋았다, 공감된다." 동료들로부터 얼마 만에 받아보는 발표 칭찬인지! 그 말씀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의 시간을 지나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스스로를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나의 간절한 바람대로 어제의 발표는 스피치에 대한 긍정적 경험이 되었다. 이제 이 경험들을 계단 오르듯 하나씩 쌓아가고 싶다. 길고 길었던 터널을 지나오며 햇살을 발견한 기분이다. 지난 2년 동안 온라인 세상에서 열심히 연습한 시간들이 이제 오프라인의 나에게 힘이 되어줌을 실감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강의, 책, 영상 등등 찾아다니던 내게 모든 것들이 하나의 메시지로 결정적 힘을 실어준 것 같았다.
축하해. 애썼어. 포기하지 않길 정말 잘했어. 진짜 많이 좋아졌어. 더 좋아질 거야.
다시 한번 나에게 축하를 건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