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 요물 같은 방송
트롯판 '만국박람회'가 무대에 올랐다.
아내와 사별한 후 홀로 두 자녀를 키우는 청원경찰 아빠가 등장한다. 아이돌, 개그맨, 대기업 과장님, 1타 수학강사, 이종격투기 선수, 미스터 코리아, 농부, 판소리대회 우승자, 뮤지컬 배우, 록가수가 트롯을 부르기 위해 오디션을 거쳐 예선무대에 올랐다. 초등학생 꼬꼬마부터 중. 고등학생, 대학생을 거쳐 서울대 로스쿨에 다니는 대학원생까지 트롯을 부르기 위해 출전했다. 온몸의 핏줄에 적혈구, 백혈구와 함께 '도롯또 감성'이 도도히 흐르는 트롯 신동부가 등장한다. 현역 트롯가수들은 계급장을 떼어 던지고 '초심'으로 옷을 갈아입고 대열에 섰다.
태권도 세계선수권자는 무대 위에서 공중돌기를 하며 트롯을 부른다. 현역 마술사가 마술을 하며, 아이돌이 현란한 춤 동작을 하며 트롯을 부른다. 심사위원으로부터 '괴물 보컬'이라는 극찬을 받은 클래식 성악가 김호중은 트롯곡 '태클을 걸지 마'를 '트롯'으로 불렀다. 케냐에서 온 대한 외국인 프란시스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을 이야기하며 '화개장터'를 불렀다. 의상과 메이크업으로 반은 여자, 반은 남자로 꾸민 한이재는 여성 목소리와 남성 목소리를 번갈아 내며 트롯을 불렀다. 예선에서 떨어지는 '어떻게 그런 일이'와 같은 안타까운 과정까지 더해져 그는 이번 예선전의 '아수라백작'이다.
'끼'의 향연이다. 한강이 이쪽저쪽 골반을 슬며시 열었다가 닫으며 '카멜레온'을 부를 때 웃느라 생긴 내 뱃살의 주름은 그때 접힌 체 그대로이다. 느끼한데 느글거리지 않는 한뤼~바의 끼는 다시 봐도 역시 재밌다. 한강의 수시 개방형 골반에 자지러지는 방청객과 심사위원의 모습을 보며 '거저슨 바로 나의 모습'을 외친다. 데스매치에서 김희재가 무대에 올린 ‘꽃을 든 남자’는 ‘끼’의 전국구 맛집이다. 이 사나이는 심지어 마이크를 집어 드는 동작에도 농염함을 흩뿌린다.
‘끼'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나이 영탁, 그가 예선전에서 부른 ‘사내'를 내 멜론 '마이뮤직'에 얼른 집어 담았다. 반주가 시작되면 영탁은 얼굴을 반 바퀴 사악 돌린다. 두 팔을 좌악 펼친 후, 오른손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우리의 시선을 남김없이 거둔 후 냅다 가두어 버린다.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어 주고, 야릇한 눈빛으로 그 감옥의 빗장 문을 닫는다. '바램'의 임영웅을 이미 품었지만 또한 나는 영탁의 감옥에서도 나오고 싶지 않다. 영탁은 '막걸리 한잔'으로 '탁걸리', '추억으로 가는 당신'으로 '리듬탁'이란 귀중한 캐릭터를 얻었지만 내가 특히 좋아하는 그의 면모는 다른 것이다.
현역 A부가 우리를 열광하게 만들었던 무대 '댄싱퀸'의 후반부에는 영탁의 솔로 파트가 있다. '춤을 춥시다아, 밤이 새에도록, 그으대의 날이랍니다하아아.'라는 부분의 영탁 목소리에는 일반적으로 대중이 그에 대해 좋아하는 정확한 음정, 도드라지는 꺾기, 간드러짐과 교태 이상의 무엇이 한 방울 섞여있다. 청아하면서도 처연하다. 슬픈데 맑다. 영탁이 언젠가는 이런 면모를 잔뜩 살린 노래를 우리에게 선물할 날을 조용히 희망한다. 이제까지 경연에서, 대기실에서, 바디와 얼굴을 많이 썼으니 이번에는 무대에 두 다리를 껌딱지처럼 붙이길 바란다. 더! 더 슬프게!, 조영수 마스터 버전) 부르길, 더 더 깊이 심연으로 들어가 슬픔을 끌어올리길 바란다. 오로지 처연함만으로 고요히 그러나 치열하게 노래 부르는 영탁을 언젠가 한번 보게 되기를 희망한다.
팀전 경연곡들은 길이도 길거니와 잡채밥 같은 느낌 때문에 멜론의 '마이뮤직'에 담지 않는데 현역 A부의 '댄싱퀸'은 고민하지 않고 쓸어 담았다. 이 무대는 ‘킬포’가 워낙 많아 이에 대해 다 쓰려면 몇 문단으로도 부족하다. 신성이 부르는 '새침한 아가쒸이~, 지적인 아가쒸이~, 말쑥한 아가쒸~'는 미스터 트롯 경연 전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프닝이다. 신성이 열에서 나와 뱅그르르 돌면서 무대 전면에 등장하는 방식, 그의 음색 그리고 눈썹 까닥임 등은 현역 A부가 보여주려는 무대에 대한 청사진으로 부족함이 없다. 나의 '픽'인 임영웅'이 그곳에 있다. 여성댄서들과의 커플댄스를 중간에 넣은 A-B-A구성, 로맨스 & 개그적인 스토리 전개, 그 와중에도 빛나는 6명 멤버의 가창력에서 그들의 연습량과 탁월한 기량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탁의 '뽕필'에 배어 있는 ‘처연한’ 솔로 파트가 '댄싱퀸'을 '마이뮤직'에 담아 소유하는 이유이다.
미스터 트롯의 인기에는 자막도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 일부 팬들이 제발 폰트 좀 작게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눈에 확 들어오는 크기, 여과 또는 은유와는 담을 쌓은 돌직구 직선 화법의 자막을 보면 흥과 웃음이 배가된다. 귀여운 외모의 새내기 대학생 옥진욱이 눈웃음을 마구 날리며 '누나들의 연하남 옥진욱이 되겠다’라고 인사를 하면 ‘오늘부터 전국 누나들의 마음 옥살이, 누나는 이미 진욱이네 옥살이중'이라는 라임과 위트 범벅의 자막이 뜬다. 미스터 트롯의 자막만으로도 글 하나 분량은 족히 나오겠다. 미스터 트롯에서 자막이 없다면?이라고 상상해보면, 이 경연에서 자막이 하는 역할을 가늠할 수 있다. 가요무대나 KBS의 열린 음악회를 떠올려 보면, 자막이 미스터 트롯에 역동성과 젊음을 불어넣었음을 쉬이 알 수 있다.
예선을 치르고 나자 참가자들의 실력과 함께 그들의 절실함이 두드러졌다. 아이돌부가 팀전을 마치고 올 하트를 받은 후 땀벅벅이 되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망돌, 망한 아이돌'이라고 자칭할 때, 무대가 없는 가수들의 아픔에 내 마음도 같이 아팠다. 관련 신문 기사, 유튜브 영상, 팬카페, 디시갤 등의 정보를 보면 참가자 모두에겐 무대에 대한 심한 갈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무대를 마치면 그들은 수도꼭지를 틀고 운다. 사나이들이 울고 또 운다. 절실함의 우물을 퍼올린다.
가수 경력 24년 차인 장민호를 비롯해 짧지 않은 경력의 가수들이 열악한 현장에서 그리고 주목받지 못한 무대에서 노래 부르며 쌓아온 내공이 각자 혹은 합을 이루며 무대를 '씹어버린다'. 노래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고 놀라고 또 놀라다가 날개를 단 듯한 시청률에 다시 한번 더 놀란다. 코로나 사태로 활동량이 집으로 제한된 것이 미스터 트롯의 인기에 한몫을 차지한다라는 의견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는 미미한 '코로나 효과'가 왜 미스터 트롯에 집중되었나? 수년, 수십 년 재야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무장한 가수들이 제각각의 사연을 품에 안고 무대를 준비한다. 절실함으로 배수진을 친 후 무대를 향해 걸어 나온다. 우리는 무대 앞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커튼이 올라간다. 우리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그들을 맞이한다. 이 세상의 끝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인양 그들은 흥 또는 끼, 그리고 실력, 그 모든 걸 토해낸다. '내일은 미스터 트롯'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이제 결승전을 목전에 둔 ‘내일은 미스터 트롯’ -
이 요물 같은 방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