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을 넘는다는 것 (2022.07.16.토) *

by clavecin

* 선을 넘는다는 것 (2022.07.16.토) *


초보 운전을 하던 그 옛날, A가 말했다.


- 달리고 있는데 빨간 신호등이 걸릴 것 같으면, 멈추는 것이 안전할까요.. 아님 그냥 더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안전할까요...

- 글쎄요...멈춘다..??

- 아닙니다... 그냥 더 빠르게 직진해야 부딪히지 않아요....멈추면 사고가 나죠...



시속 50Km를 지키면서 운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성격이 급하고 거친 나는 때때로 과속하기 일쑤다. 운전할 때는 머리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니까 손과 발과 머리가 각각 따로 돌아간다.


언젠가는 노란불일 때 페달을 밟아서 횡단보도 앞 정지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횡단보도 중간에서 멈춰버린 적도 있다. 중간에 떡하니 정차되어 있는 내 차를 사람들이 노려보면서 지나갔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 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다른 곳을 보면서 못 본척해야 한다. 무서워서.... 가끔은 내 차를 가리키면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발로 차는 시늉을 하는 엄청난 사람들도 있다. 뭐 할 말이 없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수 밖에....


정지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면 미끄러져서 차도 앞으로 쏠리고 내가 예상했던 지점에서 멈출 수도 없다. 신호등을 멀리서 보면서 멈춰야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정지선 앞에 차분하고 예쁘고 안전하게 정지할 수 있다.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필수다.



교통법규 위반통지서가 날아왔었다. 사진을 보니 내 차량번호이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 또 무엇을 잘못 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재작년에 받았던 통지서는 그냥 범칙금을 내고 말았었다. 그런데 작년에 받은 통지서에 벌점까지 있다고 적혀있는 멘트에 깜짝 놀라 일단 가까운 지구대로 갔다.


- 무엇이 잘못된 건가요?

- 사진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차선 바꾸기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 ????.. 차선이요??

- 그런 것 같아요...

- 여기에 범칙금 내면 되는 건가요??

- 여기서는 안되고 큰 경찰서로 가셔야 해요..


놀라서 큰 경찰서로 갔다. 무언가 조회를 하더니 영상을 보여준다.


- 합류하는 지점이고, 실선인데 차선을 바꾸셨네요..

- 그걸 어떻게 알아요??

- 뒤에 있던 차가 신고했는데요....


나는 깜짝 놀랐다.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뒷차가 신고를 했다고 한다. 포상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차의 블랙박스 영상을 시간을 들여서 깔끔하게 자르고 편집해서 신고했다고 한다. 경찰관도 말한다.


- 글쎄... 이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재작년에도 같은 지점이었던 것 같은데요....


벌점이 쌓이게 되면 일정 기간 운전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어디인지 자세히 보니 매일 출근하는 어느 지점이었고, 지금까지 그곳을 수십 년 다니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실선 – 점선’ 차선이 있는 합류 지점이었다. 점선에서는 차선을 바꾸어 넘어가도 되지만, 실선에서는 차선을 바꾸면 안된다는 것을, 작년에 처음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재작년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던 것을, 2번째 경고에서야 배우게 되다니... 지금까지는 별생각 없이 차선을 바꾸었었는데 이제는 실선과 점선을 매번 확인하고 바꾸게 되었다는, 뒤늦은 깨달음..... 이제껏 다른 사람들이 그냥 봐주었지만, 내 빨간 차를 주시했던 어떤 아저씨가 이제는 더이상 못봐주겠다는 의미로 신고한 것은 아닐지...생각해 본다.



오래전 B가 말했었다.


- 다른 사람을 사귀어 본 사람이면 좋겠어요..

- 어떤 의미인가요..

- 누군가를 사귀어 본 경험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어설픈 실수를 좀 덜 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들은 C가 말했다.


-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서로 노력을 해야지....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본 사람이라면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은 있을테니, 그 처음에 해당되는 그 누군가는, 그 어설픈 과정들을 직접 몸으로 감정적으로 겪게 될텐데... 그리고는 서로 잘 견디면 지속되는 관계가 되겠지만, 삐걱거리게 된다면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되겠지.....


D가 E에게서 ‘선을 넘어오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횡단보도 앞 정지선인데 그 선을 넘었다는 걸까...실선인데 점선으로 착각하고 넘어갔다는 걸까.... ‘내 영역에 넘어오지 마’라는 말일까...


D는 왜 넘어갔을까... 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까...왜 처음에는 몰랐을까...나중에 알게 된걸까....왜 넘어간걸까... 몰랐던걸까...알고도 넘어간걸까....왜 몰랐을까....왜 그때까지 몰랐을까....


E는 왜 넘어오지 말라고 했을까... 서로에게 선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걸까... 왜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을까...너와 이야기는 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서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다’는 것을, E만 알고 있었던 걸까...아님, 선이 있는 줄 몰랐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인걸까...아님...나중에 선을 그어서 만든걸까....서로 더 가까워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클로즈 토커(Close Talker)’라는 단어가 있다. 대화하는 상대방이 편하게 느낄만한 거리인 개인 공간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다가서서 말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정신과 전문의 F에 의하면 ‘너무 빨리’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사람, ‘처음부터’ 너무 깊이 들어오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사람을 사귀게 될 때 대부분 ‘처음에는’ ‘탐색하는 의미 없는 대화’로 시작하게 된다. 탐색하는 의미 없는 대화를 하면서 이 사람과 이야기를 지속해도 될지, 더 깊은 대화로 넘어가도 될지, 아니면 하하호호 의미 없는 대화로 도배를 해도 괜찮을지, 아님 여기서 대화 자체를 멈춰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얼굴을 안지 수십년이 지났어도 탐색하는 의미 없는 대화조차 하지 않는 관계도 있고, 의미 있는 대화를 해도 될만한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었지만 어느 순간 멈춰버린 사람도 있고, 수십년 동안 탐색하는 의미 없는 대화만 주구장창 하는 사람도 있다.


탐색하는 의미 없는 대화를 넘어서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게 되는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그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서로에게 ‘의미 있는, 가치있는 진중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닐까... 즉, 클로즈 토커의 단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그 경계선을 지키면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을까...대화를 하면서 이것을 가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 관계를 멈춰야 한다는 슬픈 말이 아닐까...


운전 경력 3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점선과 실선을 구분하여 운전하게 된 나,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어설픈 대화를 하면서 잘 몰랐던 서로의 개인적인 경계선을 넘어갔던 D, 대화는 하고 싶었겠지만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선을 넘어오지 마’라는 말을 했던 E...


내가 아닌 타인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하는 그 순간이 의미가 있고 아름답기 때문이고 또 그를 통해서 나와 그가 변해간다는 것이며, 무엇보다 원래 서로에게 뚜렷이 있었던 경계선이 어느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사귀고 알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겹고 머리 굴리고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내 앞에 놓여진 이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쓰고 힘겨워하고 속끓이기보다 차라리, 휙 하고 뒤돌아서 아예 그 선을 보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 경계선을 없애기 위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서로의 경계선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 횡단보도 앞 정지선에 스르르 정차하기 위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신호등을 볼 때마다...

- 차선을 바꿔야 할 때는 점선인지 실선인지 확인한다. 아무 때나 넘어가지 않는다...

- 눈앞에 있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노력을 해야 할지, 두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서서 그 선을 아예 보지 않는 것이 나을지 생각해 본다.....

- 아...제대로 멈추기 위해서는 노란불, 황색 신호등이 들어오는 순간을... 민감하게 잘 감지한다...

- 만약.,, 만약에 그 순간을 감지하지 못했는데, ‘멈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횡단보도 중간이라도 멈춰야 할까...아님.... 범칙금 통지서를 받더라도 그냥 모른 척 빠르게 지나가 버려야 할까.......

- A는 빠르게 직진으로 달려버려야 안전하다고 했는데......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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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학교 자율교육과정 프로젝트 발표수업으로 아이들이 무척 바빴다.


국어, 영어, 수학, 음악...각각의 경계가 뚜렷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의 화두는 ‘융합’이다. 학문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


‘선을 넘어오지 마’가 아니라, ‘너와 나의 선을 넘나들어서 허물어버리고 하나가 되어보자’가 주제인 시대...


어느 학급에서 만들었던 프로젝트 수업 포스터....

강렬한 포스터에 시선이 멈추어 버렸었던...


1. 홍보 문구 : 다만 약에서 구하소서

2. 제목 : 역사를 통한 약과 독의 상관성과 토론으로 배우는 약에 대한 태도

3. 과목 : 과학 + 국어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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