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에 대하여

거리의 게릴라 아티스트 뱅크시(BANKSY)

by 삶은 예술 박기열
1.토트넘 핫스퍼 경기장 인근에 그려진 손흥민 벽화_MurWalls그룹 제작.png 토트넘 핫스퍼 경기장 인근에 그려진 손흥민 벽화

영국 런던, 토트넘 핫스퍼 경기장 인근에 손흥민이 그려진 대형 벽화가 들어섰다.

토트넘에서 10시즌을 보내면서 구단의 레전드로 활약한 손흥민 선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구단과 팬들의 헌사이고 선수 개인에게도 매우 영광스러운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손흥민 벽화에서 차로 15분 떨어진 핀즈버리 파크(Finsbury Park)에도 커다란 벽화가 하나 그려져 있는데 초록 물감이 줄줄 흘러내리는 커다란 나무 그림은 뭔가 싸늘하게 느껴진다.

이 벽화는 대체 뭘 기념하기 위한 것일까?

2.핀즈버리  파크에 그려진 나무(2024년 3월)_뱅크시.jpeg 핀즈버리 파크에 그려진 나무 (2024년 3월) _ 뱅크시

낙서 비긴즈

아기가 엉금엉금 기고 크레파스 하나 손에 쥘 정도의 물리력을 장착하는 순간 비로소 인간의 낙서가 시작된다. 중학교 시절, 내 수학 교과서는 숫자보다 낙서로 가득 차 있었는데 숫자와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 후부터는 더욱 치열하게 낙서에 집중했다.

떡잎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당시 내 낙서의 아이템은 주로 만화 주인공이나 동물들이 많았었고 특히 자랑할 만한 지점은 모든 교과서의 모서리마다 후루룩 넘기면서 감상하는 움직이는 그림들로 빼곡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제일 인기가 많았던 건 각 과목의 선생님들을 희화시킨 일러스트들이었는데 만일 당신이 회의 때마다 다이어리에 사장님이나 동료들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면 그건 일과 회사로부터 당신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3.회의 중 김대리가 그린 사장님 얼굴 AI works by 박기열.jpg 회의 중 김 대리가 그린 사장님 얼굴 _ AI works by 박기열

낙서는 심심해서 그냥 끄적거리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않을 때, 혹은 소통이 되질 않아 불만은 있지만 말하기 불편한 경우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무의식적인 행동 표출의 일종이기도 하다. 무의식의 표출 외에도 낙서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거나 갖가지 정보와 다양한 메시지를 제공하는 도구이기도 한데 어릴 적 동네 담벼락에 쓰여 있던 '철수바보똥개’처럼 사실확인이 어려운 정보부터 학교 이사장의 비리가 적혀있는 대학가의 대자보는 물론이고 터미널 화장실에 가보면 모두 암호화가 되어 있어 약간의 해독이 필요하지만 신장 매매 관련 메디컬 컨설팅부터 같은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 간의 매칭 매니지 먼트까지 그 종류와 범위가 실로 방대하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이런 식의 정보는 간혹 설악산 흔들바위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석벽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먼 타국 땅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이 우리의 위대한 한글을 영역표시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모습을 볼 때 낙서의 씁쓸한 이면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나저나 내가 근래에 낙서를 해본 것이 언제였던가?

스마트폰과 PC가 보급되고 나서부터는 모든 종류의 펜을 손에서 아예 놓아버린 것 같다.

화가들이 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대다수의 문학가들조차 원고지와 펜 대신 노트북으로 창작하는 요즘, 카드 결제 후에 하는 낙서 비스무리한 사인 말고는 손에 펜을 쥘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낙서를 멈추게 되면서 나의 무의식적인 감정표출도 함께 멈췄으니 내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던 큼지막한 통로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얼굴 없는 예술가 뱅크시(BANKSY)!

4.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출연했던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속 뱅크시 복사.jpg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출연했던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속 뱅크시

그라피티(graffiti art)를 기반으로 하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스트리트 아티스트 뱅크시.

이 사람의 특이점은 영국 전역의 예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가 1위로 꼽힐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이지만 여지껏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길거리 그림인 그라피티는 명백한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걸고 활동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익명성이 유지될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뱅크시라는 이름 역시 그의 본명은 아니다.

35년 간 영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 낙서를 남겼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그의 이름이 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뱅크시를 더 신비롭게 만들고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른다.

5. 변장을 하고 미술관에 들어가 그림을 붙이는 뱅크.jpg 변장을 하고 미술관에 들어가 그림을 붙이는 뱅크시


뱅크시가 처음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세계 유명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걸어두고 온 ‘미술관 습격’ 사건 이후부터이다.

영국의 테이트 갤러리, 프랑스의 루브르, 미국의 자연사 박물관과 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변장을 하고 들어가 초강력 본드로 자신의 작품을 벽에 붙여 도둑 전시를 했던 뱅크시의 작품들은 몇 주가 지나서도 미술관 관계자조차 알아채지 못했고 인터넷을 통헤 뱅크시가 고백을 한 후에야 부랴부랴 철거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은 바 있다.

자신이 습격할 공간에 대한 사전 분석, 치밀한 전략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6. 가짜 고대유물을 박물관 벽에 붙이고 있는 뱅크시.png 가짜 고대 유물을 박물관 벽에 붙이고 있는 뱅크시


고대 유물전에서는 시멘트 조각에 쇼핑카트를 끌고 가는 원시인을 그려 넣은 작품을 마치 유물인 것 마냥 만들어 붙여 놓았는데 관람객 대부분이 카트가 그려진 원시시대 돌조각을 신기하게 생각했을 만큼 뱅크시의 작품을 진짜 유물이라 착각했다는 후문이다.

그 외에도 많은 작품들을 패러디 해 미술관의 진본 옆에 걸어두는 과감한 게릴라 전시를 감행하면서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캠코더로 그 장면을 촬영한 후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하면서 대형 미술관 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뱅크시 작품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길거리 곳곳에 낙서하듯 그려 놓은 그라피티 작품들이다. 뱅크시는 특정 건물에 대형사진을 출력해 풀로 붙이거나 직접 만든 조형물을 설치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은 두꺼운 종이에 미리 그림을 투각해 벽에 대고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스텐실(stencil) 기법이다.


7. 스텐실 기법으로 거리 그림을 그리는 뱅크시.jpg 스텐실 기법으로 거리 그림을 그리는 뱅크시


이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속도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 할 길거리 예술가에게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주로 밤에 활동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찰의 단속에 재빨리 대처를 하려면 여러 개의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서는 어림도 없다. 하지만 뱅크시는 저 멀리 경찰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않고 미리 도안을 해 간 종이를 벽에 댄 후 스프레이 라카를 분사하고 유유히 도망가면 끝.

미리 그림을 디자인할 수 있는 스텐실은 어느 정도 그림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는 데다가 빠르고 간편하기 때문에 어제까지 없던 뱅크시의 그림이 다음 날 아침 떡하니 그려져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8. 자신의 낙서를 지우는 그림을 그린 그림.jfif 자신의 낙서를 지우는 그림을 그린 그림


뱅크시는 자신의 낙서를 통해 인간계의 부조리와 공권력의 치부는 물론 소외 계층, 세계 평화와 인종차별 등 각종 사회문제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바람을 피우다 들켜서 창문에 매달려 있는 정치인의 모습이나 쓰레기를 커튼 뒤로 몰래 버리는 비양심적인 메이드의 모습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도덕한 군상들의 일탈을 그리기도 했고 국가가 시민들을 도청하고 있다는 메시지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항만 노동자들의 억울한 혼령을 버려진 배에 그려 넣으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건드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9. 팔레스타인 장벽에 그려진 뱅크시의 그림 중 하나.png 팔레스타인 장벽에 그려진 뱅크시의 수많은 그림 중 하나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뱅크시의 활동은 비단 국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총탄이 오고 가는 팔레스타인 장벽에 평화와 자유의 그림들을 넣었고 서양인들에게 착취당하는 제 3세계 어린이들의 모습을 그리는 등 국제적인 이슈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티켓을 사서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연히 그 거리 그 담벼락을 지나치는 불특정 다수이다.

뱅크시의 작품은 온통 하얀 벽으로 채워진 부담스러운 갤러리에 걸려있는 대단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누구든 그 그림을 그냥 지나치거나 훼손할 수 있는 ‘거리’라는 열린 공간으로 뛰쳐나와 위정자들이 불편해할 이야기들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사람들은 서서히 뱅크시의 낙서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그런 그의 그림이 이제는 단지 불법과 합법으로 판단하던 단순한 거리 낙서의 수준을 넘어 예술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기 건물에 낙서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건물주가 있다면 웃긴 일일까?

뱅크시라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라피티가 반사회적 행위로 규정되어 있는 영국에서조차 뱅크시가 낙서를 하고 나면 관광 상품 내지는 관광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건물주들은 뱅크시가 남겨놓은 그림에 아크릴 판을 덧씌워 아무도 훼손할 수 없게 보호를 하고 그림이 더 잘 보이도록 꼼꼼히 닦으며 관리한다.

만약 당신이 영국에 갈 계획이 있다면 뱅크시의 그림이 어디에 그려져 있는지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이미 곳곳에서 뱅크시 맵(banksy map)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뱅크시의 거리 그림은 갤러리를 통해 팔리기도 하는데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는 헤지펀드나 연예계 종사자들이 주로 뱅크시의 그림을 선호하여 수 천 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데 갤러리에서 작품을 판매한 뱅크시는 며칠 후 그 그림들을 단돈 몇만 원에 거리를 지나가던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팔기도 했고 자신의 작품이 비싼 가격에 낙찰되자마자 미리 숨겨놓았던 원격장치를 이용해 작품을 파쇄하면서 경매장을 혼돈으로 몰아넣었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작품을 시장에 내놓아 가격을 형성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는 진정한 거리 예술가의 면모와 제도권에 도전하는 뱅크시의 삐딱한 예술가 정신을 명확히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 십 년간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감추며 거리의 관객에게 사회적 현안과 문제를 제기한 낙서들로 이슈를 던져 왔던 뱅크시가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런 그의 낙서가 더 이상 낙서가 아닌 이유.

그런 이유들을 곱씹으면서 맨 처음 방문했던 핀즈버리 파크의 음산한 나무 앞에 다시 가보자.

10. 핀즈버리 파크 나무의 전과 후.png 핀즈버리 파크 나무의 전과 후

벽면 바로 앞에는 가지가 모두 잘려진 앙상한 실제 나무가 서 있고, 그 뒤쪽 건물 외벽에 초록색 페인트를 거칠게 뿌려 마치 나무의 풍성한 잎사귀처럼 보이게 했다. 벽면 왼쪽 아래에는 고압 세척기를 든 여성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마치 이 여성이 초록색 페인트를 뿌려 나무를 복구했음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자연 파괴에 대한 경고와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담고 있다. 잎이 다 떨어진 죽어가는 나무에 인위적으로 초록색 칠을 한 모습은, 우리가 파괴한 자연을 다시 되돌리려는 인간의 노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자연 그 자체가 아닌 인공적인 녹색에 의존해야 할지도 모르는 앞으로의 현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11. 작년 12월에 그려진 뱅크시의 최신작 _ 별 보는 아이들.png 작년 12월에 그려진 뱅크시의 최신작 _ 별 보는 아이들


작품은 미술관 안에만 있지 않다.

당신이 걷는 거리, 당신이 만난 사람, 당신이 먹는 음식,

그리고 어쩌면 무심코 그려둔 낙서 속에 당신이 찾고 있던 가치와 해답이 이미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책상 위의 펜을 집어 들고 수첩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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