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없는 과학, 예술 없는 기술

기술 패권자들의 패착과 착각

by 삶은 예술 박기열


오랜 시간 미술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필자가 기업교육 현장에 발을 들인 지도 어느덧 10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수많은 기업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아트 리더십과 예술 인문학을 강의하며 다양한 산업과 정책의 결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왔는데 유독 단 한 번도 접점이 없었던 산업군이 있다. 그들은 바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IT 플랫폼 기반의 거대 테크기업들이다.“

사진1) 다양한 테크 기업들이 모여있는 판교 테크노벨리.jpg 다양한 테크 기업들이 모여있는 판교 테크노밸리

대한민국의 IT 붐을 타고 급성장한 이 기업들은 매출과 자산 규모에서 전통적인 재벌기업에 뒤지지 않으며 직원 수 또한 실로 방대하다. 기업 현장에서 웬만한 기업과 기관을 대상으로 오랜 시간 강의를 해온 내가 충분한 규모와 인적 자원을 갖춘 이들 기업으로부터 단 한 번의 강연 요청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기보다 테크기업 특유의 문화와 자신들이 혁신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는 테크 엘리트들의 지적 오만함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오랜 시간 IT 기반 플랫폼 기업과 그 기업 리더들의 행보를 유심히 관찰해 온 필자의 개인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들이 이뤄낸 성과를 조명하기보다는 어떤 권한도, 철학도, 예술도 없이 기술과 혁신에만 몰두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겪고 있는 한계와 패착,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될 미래 IT 생태계에 대한 우려를 다소 비판적이고 비약하는 방식으로 서술했으므로 관련 산업에 종사하거나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이 느낄 불편함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권한 없이(Without authority)


먼저, 그들이 인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을 다루는 교육에 왜 문을 닫고 있는지 그 속사정을 몇 가지 논리로 들여다보자.


첫째는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실용적 허무주의'와 ‘속도’에 대한 강박이다. 테크기업의 시계는 일반 기업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간다. 그들에게 지식은 즉각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 이어야 하고 내일 당장 코딩에 적용할 기술 관련 교육이나 다음 달 매출을 올릴 데이터 분석법이 더 가시적이고 효율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10년 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철학이나 예술적 성찰은 한가로운 소리로 느껴질 수 있다.

"무조건 빨리 실행하고 실패하라(Move fast and break things)"는 실리콘밸리식 사고방식이 지배하다 보니 멈춰 서서 생각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인문학 교육은 그들의 속도감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플랫폼 기반의 테크기업의 구성원들은 정보 검색과 커뮤니티 활동에 매우 능숙한 '디지털 네이티브'이다. 컴퓨터로 세상의 모든 걸 알아내는 이들은 누군가가 앞에서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강의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지식은 유튜브나 해외 기술 블로그, 혹은 자기들만의 슬랙(Slack) 채널에서 공유하는 것이지 자신보다 최신 정보에 취약할 가능성이 높은 강사에게 뭔가를 배우는 것 또한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궁금한 건 AI가 다 알려 주는데 굳이 강의를 들을 필요가 있나?”라는 태도는 경이로운 속도로 진화하면서도 하루만 업데이트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금세 낡고 취약해지는 허술하디 허술한 기술을 마치 전능한 것으로 여기는 기술자의 자기 확신과 연결된다.


셋째, 플랫폼 기업에서 기업 교육을 HRD가 아닌 '복지'로 접근하는 경우 그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교육은 조직과 구성원의 성장을 위한 투자의 역할이어야 하는데 한눈에 봐도 직원들을 달래기 위한 복지나 분위기 전환용 이벤트로 인식하는 기업은 인문학 특강을 열더라도 깊이 있는 성찰보다는 유명 셀럽을 불러서 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토크 콘서트 형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직무 관련 교육(기술 고도화나 생산성 향상)은 내부에서 해결하거나 비싼 온라인 강좌를 구독해 주는 것으로 대체하면 되고 그 외의 인문 교육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들이 한 기업의 문화로 자리 잡았을 때 발생하는 가장 공포스러운 문제는 바로 성찰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무서운 착각이다.

사진2) 인텔 AI 서밋 서울 2025.jpg 인텔 AI 서밋 서울 2025

테크기업의 리더들이 자신들이 세상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경우, 그 확신은 종종 외부의 인문학적 비판이나 예술적 통찰을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한 태도로 이어질 수 있는데 예술과 철학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겪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다루는 영역이라면 모든 것을 0과 1, 데이터와 지표로 치환해 판단하는 이들에게 정답이 없는 교육은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도 이들이 유독 공을 들이는 자리는 따로 있다. 매년 성대하게 열리는 IT 서밋이나 해커톤 같은 행사이다. 이 행사는 단순히 신제품과 트렌드를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다. 기술 패권자들이 무엇을 가치로 삼고 어떤 서사 위에서 자신들의 혁신을 정당화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무대이다. 그 무대의 화려한 조명 때문에 잠시 우리의 시야가 좁아지기도 하지만 기술의 패권을 가진 그들이 어디서 출발했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그동안 우리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의 본질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1984년 4월 22일 개최된 제1회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모습.jpg 1984년 4월 22일 개최된 제1회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모습

우리나라의 IT업계를 이끄는 이른바 ‘테크 타이쿤(Tech Tycoon)’들은 대체로 유사한 성장 경로를 공유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1세대 창업자들 상당수는 특정 공대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학번 출신이다. 과학고를 거쳤거나 수학 경시대회,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컴퓨터 경진대회를 휩쓴 이른바 ‘공부의 신’들이었다. 병역특례 제도를 통해 젊은 시절 IT 기업에서 실무 경험과 인맥을 쌓았고 그 네트워크는 이후 창업과

투자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결과만 놓고 보면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국가가 제공한 제도적 혜택이 순수한 공적 연구로 귀결되지 않고 특정 개인의 자본 축적으로 전환된 측면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당시가 곧 IT의 시대적 전환기였다는 것이 분명하고 대한민국이 IT 강국으로 도약하는데 이들의 기여가 컸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그들의 연결망은 S대, K원 등 일명 ‘학교 라인’과 당시 붐을 이뤘던 ‘게임 회사 라인’ 등의 형태로 이어지며 서로 투자하고 이사회에 참여하는 구조 속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어린 시절 경시대회에서 만났던 영재들이 성장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의장과 회장, 파운더로 재회한 것이며 이들은 재벌 할아버지 없이 기술과 네트워크만으로 새로운 성을 쌓아 올린 새로운 개념의 재벌이 되었다.


이들이 다루는 산업은 과거 제조업 시대의 사장님들이 공장의 기계를 돌려 부를 축적했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상품 대신 ‘데이터’와 ‘연결’을 장악하며 자본을 쌓아왔는데 눈에 보이는 규칙과 근면한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받으며 살아온 우리가 알고리즘, 스톡옵션 같은 낯선 단어를 알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IT 플랫폼은 네트워크 효과를 기반으로 성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 번 우위를 점한 1등이 시장 전체를 잠식하는 승자독식(Winner-takes-all) 구조가 자연스럽게 굳어진다.

문제는 데이터의 독점과 알고리즘의 설계 권한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그로 인해 골목상권 침해, 개인정보 유출, 과도한 수수료 논란이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이고 이러한 구조적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나 윤리적, 철학적 성찰로 이어지기보다 천문학적 규모의 과징금이나 보상금 지급으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되어 왔다는 점이다.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 구조를 바꾸는 것보다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반복되는 한 같은 문제는 다른 이름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견제 장치가 약화된 시장에서 나타나는 사실상의 카르텔적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가 맞이한 AI 세상처럼 기술의 도입 속도와 파급력에 비해 윤리적 담론이나 제도적 장치, 규제의 정비가 뒤따르지 못할 경우 그 공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상당 부분은 결국 사용자들이 감당해야 한다. 또한 준비되지 않은 기술은 하나같이 ‘혁신’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채 등장하는데 해당 기술을 독점한 기업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셀프 제안하기 때문에 이를 관철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기술을 가장 잘 아는 주체가 그들이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감당할 자본을 가진 이들 또한 그들이며 당장 뚜렷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임의 기준은 흐려지고 권력은 공고해지는 이때가 준비되지 않은 혁신이 패권으로 굳어지는 순간이다.


철학 없이(Without philosophy)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성공한 영재들의 선민의식은 이미 실리콘밸리에서 먼저 형성되었고 우리가 지금 마주한 문제들 역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한 발 앞서 경험해 온 과정의 일부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보완적 노력을 기울여 왔을까?

구글(Google)은 일찍이 컴퓨터 공학자이자 철학 박사인 데이먼 호로비츠(Damon Horowitz)를 영입해

‘상주 철학자(In-house Philosopher)’라는 직함을 부여했다.

그는 엔지니어들에게 “데이터는 답을 제시하지만, 가치는 인간이 부여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프라이버시와 알고리즘 윤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내부에서는 성과와 속도를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 이러한 논의가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는 구글의 초기 사업 모토였던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라는 원칙을 지키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역시 AI 윤리를 전담하는 ‘Responsible AI’ 조직을 운영하며 철학자와 사회학자를 적극적으로 영입해 왔다. 이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편향을 무비판적으로 학습하지 않도록 기술적 검증 이전에 윤리적, 철학적 성찰을 거치게 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애플(Apple Inc.)의 Apple University는 2008년경 설립된 사내 교육 프로그램으로 스티브 잡스 재임 시기에 조직의 철학과 의사결정 방식을 체계적으로 전수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제품의 기능적 우수성보다 사용자 경험과 직관성, 디자인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의사결정

원칙을 가르치며 애플 특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듯 IT 기업이 철학자와 인문학자를 조직 안으로 들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사진3) 기술 권력을 견제하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이자 철학자 데이먼 호로비츠와 애플 유니버시티.jpg 기술 권력을 견제하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이자 철학자 데이먼 호로비츠와 애플 유니버시티


빅테크 기업은 아니지만 파타고니아(Patagonia)와 프라이탁(Freitag)처럼 자연과 환경이라는 분명한 철학을 경영의 중심에 두는 기업의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들은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산업사회의 절대적 기준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때로는 그것을 기꺼이 유보하거나 넘어서기에 주저함이 없다. 자신들의 상품을 사지 말라는 캠페인을 하거나 재활용 소재를 고집하고 생산량을 제한하며 환경 보호를 위해 스스로 매출의 일부를 포기하는 선택은 단기적 수익만 놓고 보면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철학적 일관성이 브랜드에 대한 신뢰와 충성도를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차별화된 성과로 이어진다. 철학을 가진 기업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만들 수 있는지를 경쟁하지 않는다. 대신 ‘왜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음으로써 생산성을 앞세운

기업들과는 다른 차원의 성과와 지속가능성을 만들어 낼 뿐이다.


사진4) 환경을 위해 '소비하지 말 것'을 권한 파타고니아의 전설적인 광고(좌)와 연간 100만 갤런의 빗물로 수거된 트럭 천막을 세척해서 가방을 만드는 프라이탁의 공정 현장(우)..jpg 환경을 위해 '소비하지 말 것'을 권한 파타고니아의 전설적인 광고(좌)와 연간 100만 갤런의 빗물로 수거된 트럭 천막을 세척해서 가방을 만드는 프라이탁의 공정 현장(우)


예술 없이(Without art)

사진5) 박 마스터가 오랜 시간 사용한 두 가지 타입의 라이카 카메라와 1970년대 생산된 벤츠 자동차.jpg 필자가 오랜 시간 사용한 두 가지 타입의 라이카 카메라와 1970년대 생산된 벤츠 자동차


독일은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기술 강국이다.

특히 정밀기계와 자동차 공학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구텐베르크 금속활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라이카 카메라와 벤츠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저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00명에 가까운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라는 사실 역시 기술 강국임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독일이 배출한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면모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던 칸트(Immanuel Kant)나 개인의 주체적 의지를 강조했던 니체(Friedrich Nietzsche), 기술적 틀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를 ‘예술’이라 규정했던 하이데거, 과학자이자 ‘파우스트’라는 명작을 남긴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사진6) 바우하우스(1919~1933)와 세계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디자인한 의자.jpg 바우하우스(1919~1933)와 세계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디자인한 의자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는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목적으로 세워진 세계적인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초대 교장과 마지막 교장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미니멀리즘’이라 부르는 디자인 철학과 ‘기능주의(Functionalism)’적 사고 역시 바우하우스가 시도한 전방위적 실험 위에서 피어난 결실들이다. 지면의 한계가 있으니 바하(J.S. Bach)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까지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다가는 밤을 새워도 부족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쯤 해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왜 기술과 과학의 나라 독일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이토록 많이 배출된 것일까?

아니면 예술의 나라 독일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배출한 것일까?

근데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독일이 기술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철학과 인문학을 교육하고 각종 예술 정책으로 기술을 점검하게 하는 이유는 기술을 특정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공공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나치 정권이 고도의 기술을 비인간적인 학살의 도구로 악용했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자 기술의 폭주가 불러올 수 있는 파멸적 공포를 몸소 체험한 전범국으로서의 뼈아픈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사진7) 지난해 9월 에 열렸던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출범식.png 지난해 9월에 열렸던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출범식

한국의 IT 기업에 핵심 기술부처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철학부서가 들어선다면 어떨까?

AI 강국으로의 도약을 선포한 정부가 기술이 인간의 대지에 건강하게 뿌리내리도록 하는 이른바 ‘기술과 철학 간의 협업 정책’을 함께 내놓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좀 더 밝아질 수 있을까?

그 어떠한 기술적 혁신도 인간의 존엄 앞에 설 수는 없다.

기술 패권자들이 건조한 거대하고 견고한 배가 혁신이란 돛을 달고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항해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강력한 엔진이 아니라 그 배 위에 예술의 창문을 내고 철학이라는 나침반을 올려놓는 일이다.

철학과 예술이 감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리스크를 관리하고 품격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경영 전략이란 신념으로 강의하고 있는 필자지만 가까운 주변조차 설득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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