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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서 커쇼를 만나다

2014 NLDS 4차전 (2014.10.08)

by clayton

"자네가 아지 스미스를 안다고? 그렇다면 투수보다 타자 몸값이 높은 이유를 알고 있나?"

"네. 타자는 everyday player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허허. 제법인데 이 친구."


한 학기가 끝난 뒤 종강 기념 전공 교수님과의 식사자리였다. 그는 그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팬이었다. 아마도 미주리대학교에서 석사/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그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카디널스의 팬이 되셨으리라 짐작한다. 메이저리그 마니아라고 내 소개를 하자 그는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막힘없이 질문에 대답하자 흠칫 놀란 눈치였다. 1980년대에 카디널스의 유격수로 이름을 떨쳤던 아지 스미스를 1986년생인 내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결전의 땅. 2014 NLDS 3, 4차전이 열린 부시 스타디움


그로부터 약 4년이 흘러 2014년 10월 4일(이하 한국시간), 그날은 나의 결혼식 날이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LA 다저스의 디비전시리즈 1차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떨리는 순간 중 하나인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지만 휴대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시 다저스 팬이었던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기대되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날 경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회까지 6:2로 앞서며 기선을 제압하는 듯했던 다저스는 7회에만 8실점하며 역전을 당했고, 결국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1차전을 카디널스에 내줬다. 패배의 책임은 1차전 선발이라는 중책을 맡았던 클레이튼 커쇼에게 쏟아졌다. 팀의 에이스로 절대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았던 그였기에 충격은 배가됐다.


그날 결혼식의 주례는 카디널스의 팬이었던 전공 교수님이 맡아주셨다. 결혼식이 끝난 후 교수님께 신혼여행으로 세인트루이스를 갈 것이라고 말씀드리자 교수님은 카디널스의 팬이냐고 되물으셨다. 다저스의 팬이라고 말씀드리자 교수님은 마치 어차피 질 게임을 왜 보러 가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만큼 그도 카디널스 팬으로서의 자긍심이 있었고, 나 역시도 다저스가 반드시 시리즈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NLDS 4차전 역투하는 클레이튼 커쇼


2014년 10월 8일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4차전. 2차전을 승리했지만 세인트루이스 원정에서 열린 3차전에서 패하며 다저스는 1승 2패로 수세에 몰렸다. 한 게임만 더 지면 시즌이 끝나는 일리미네이션 게임에 다저스는 클레이튼 커쇼를 다시 앞세웠다. 3일 휴식 후 등판이라는 모험수를 던지며 많은 이들의 우려를 샀지만 커쇼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투구를 보여줬다.


실로 압도적이었다. 6회까지 커쇼는 삼진 9개를 곁들이며 카디널스 타선을 잠재웠다. 특히 6회 피트 코즈마-맷 카펜터-랜달 그리척으로 이어지는 타선을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를 올렸다. 다저스 타선이 6회 초 2점을 지원하며 2:0으로 앞서 나갔기에 시리즈를 2승 2패 동률로 만들며 다저스 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절정에 달했다.


NLDS 3차전을 하루 앞둔 다저스의 숙소. 1차전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다음날 열린 2차전에서 8회 말 맷 켐프의 극적인 결승홈런을 앞세워 3:2로 승리하며 시리즈의 균형을 맞췄기에 다저스의 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상승세를 타는 듯했다.


신혼여행지로 세인트루이스를 선택한 건 오로지 NLDS 3, 4차전을 직관하기 위함이었다. 직관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었기 때문에 숙소도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다. 그 덕분에 원정길에 오른 다저스 선수들과 같은 숙소를 쓰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다.


체크인을 위해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당시 다저스의 감독이었던 돈 매팅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NLDS 1차전 선발이었던 클레이튼 커쇼와 그의 아내 엘런 커쇼였다. 나는 그렇게 나의 우상과도 같은 클레이튼 커쇼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커쇼는 NLDS 1차전 패배의 충격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표정이 너무나 어두웠고 침울해 보였다. 그의 아내 엘런 커쇼는 묵묵히 그의 옆을 지킬 뿐이었고, 커쇼의 엄청난 팬이었던 나 역시도 그에게 쉽사리 말을 건네지 못했다. 단지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너를 믿는다. 앞으로의 시리즈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고, 다저스를 NLCS로 이끌 사람은 너뿐이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 나는 아무 말도 그에게 하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후회가 되는 순간이다. 아무것도 아닌 나의 자그마한 격려가 나비효과가 되어 NLDS 4차전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을까?


다시 NLDS 4차전. 6회까지 순항하던 클레이튼 커쇼는 7회 말 들어 가장 큰 위기를 맞이했다. 맷 할러데이-자니 페랄타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무사 1,2루의 위기. 타석에는 좌타자 맷 애덤스가 등장했다. 이전 타석까지 무안타로 꽁꽁 묶였던 애덤스가 2구째 커쇼의 커브를 통타, 우측 담장을 넘기는 스리런 홈런으로 연결하며 순식간에 경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시즌 내내 좌타자 상대 커브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커쇼이기에 충격이 더 컸다.


카디널스의 3:2 역전. 커쇼는 홈런을 맞자마자 페드로 바에즈로 교체되며 고개를 숙였다. 한번 뒤집힌 흐름을 다저스는 반전시키지 못했고, 1승 3패로 다음 무대인 NLCS에 진출하지 못했다.


카디널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두 경기는 커쇼의 2014시즌 옥에 티였다. 부상으로 4월 한 달간 투구를 하지 못했음에도 커쇼는 21승 3패, 평균자책점 1.77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그 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은 물론 투수로서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했다. 6월 19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홈경기에서는 9이닝 동안 삼진 15개를 솎아내며 노히트노런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포스트시즌 두 경기를 망치면서 커쇼의 2014시즌은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다. 포스트시즌만 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가을 커쇼'의 오명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커쇼의 숙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교수님께 주례를 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교수님은 다저스 패배로 인한 나의 충격을 헤아리듯 '다저스가 져서.... 행복하게 살게나'라는 답장을 보내오셨다.


카디널스는 이후 2016년 오승환을 거쳐 2019년 겨울 김광현이 입단하면서 국내에서 다저스 못지않은 화제의 팀이 됐다.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다저스, 그리고 커쇼의 열렬한 팬이지만 다가오는 시즌 카디널스의 선전 또한 기대한다. 그리고 NLDS 또는 더 큰 무대에서 카디널스를 만나 다시 한번 진검승부를 벌였으면 좋겠다. 그 경기에서 커쇼가 지난 과거를 훌훌 털어내는 호투를 보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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