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상태에 의해 정의되는 도덕
어떠한 실체에 대해 알아보기 이전에 그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세계 본질을 탐구한 뒤 그들의 철학을 이어 나갔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명제 하에 모든 것은 하나라며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세계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철학을 확장하였고,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세워 이데아를 볼 수 있는 철학자들의 철인 정치를 주장하는 것으로 철학이 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근대 서양 철학자들 역시 각자의 인식론을 정리한 뒤 철학을 확장해 나갔다. 데카르트는 이성이 진리의 진정한 기준이라는 합리론을 세운 뒤 이를 통해 신 존재를 증명하였고 칸트는 초월 철학을 통해 인간 이성의 한계를 규정한 뒤 신 존재와 영혼 등을 실천적으로 가정하였다.
이와 같이 본질이라 하는 것은 세부 철학과 사유의 근본이자 대전제일 것이므로, 그 대전제를 세운 뒤 그 위에 논의들을 진행하여야 사유가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서로 정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본 글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자연과학에게 듣도록 하자. 과거에는 이 역시 철학의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독립하여 수학과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세계가 아닌 인간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가치의 본질을 탐구해야 한다. 도덕 원리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많은 주장이 있었다. 4 주덕을 제시한 플라톤, 이성에 따르기를 명령한 스토아학파, 성경과 신의 권위에 기댄 기독교, 정언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칸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공리주의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만의 도덕 원리를 주장해 왔다. 그리고 각자 이 도덕 원리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데아, 자연, 신, 이성, 경험 등을 통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였다. 도덕을 탐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론이 제대로 세워진 사회여야 그 위에 법과 제도 역시 똑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여도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는데 살인죄를 처벌하고 생명존중교육 정책을 펼칠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본 글에서는 도덕이 어떻게 세워졌으며 무엇이 도덕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지, 즉 앞서 말한 대전제를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쌓듯 그 위에 세부 도덕 원리와 제도를 예시로 들어보도록 할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 우리 사회의 여러 사건사고나 논쟁들에 대해서도 일관성 있고 타당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도덕이라고 할 때 마땅히 해야 하는 것, 인간이라면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으로 잘 받아들인다. 당장 학교에서 인권의 특징 중 하나가 천부인권이라고 가르치거나 문화 상대주의를 가르치며 극단적 문화 상대주의를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편 윤리를 당연히 전제하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한 근거가 필요하다. 이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보편 윤리의 근거는 자연법일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 인간은 그 자체로 자유로우며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부여되는 권리인 인권이라는 개념은 상식과 같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자연법의 존재가 의심스럽다. 만약 자연 상태의 인간의 특징에서 바로 자연법을 도출하면 문제가 생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것은 맞으나 왜 그것이 법칙이자 권리여야 하는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실일 뿐이지 거기서 어떠한 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애초에 권리라는 것은 인간의 개념이지, 자연의 권리가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유롭다는 사실일 뿐, 거기서 인간적인 개념인 권리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자연 상태를 보며 이 상태가 되기를 갈망하고 이를 위해 권리라는 것을 제시해 보장하여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자연법에 근거한 보편 윤리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자연주의의 오류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의 인간이 도덕을 발견할 때, 그 당위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법 이론은 여기에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자연에 목적이 있는지는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아퀴나스는 신에 기대는데 세속적으로 변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적 논증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또한 로크는 인간 이성이 자연법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의심스럽다. 자연 상태의 이성이 당연히 인간의 자유와 소유권, 생명 존중을 인식하며 동시에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이를 존중해야 하고 이 도덕을 이성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으므로 넘어가고, 이성이 어떤 원리로 도덕을 인식한다는 말인가? 이 부분을 당연히라거나 직관이라는 말로 넘어가는 것이 탐탁지 않다. 당장 선사 시대의 유골들을 보면 수렵이나 병으로 죽은 사람도 많으나 사람에게 죽은 유골이 생각보다 많이 발견된다. 이것이 자연법을 인식하는 인간의 모습인가?
이와 같이 자연법 이론은 자연 상태의 인간의 특징과 도덕을 연결해 주는 당위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자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칸트 윤리 역시 도덕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도덕론이다. 칸트 윤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이다. 그렇기에 이성으로 스스로 도덕 법칙을 세울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세워진 도덕 법칙은 보편적이다. 만일 이성이 아닌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경험을 통해 법칙을 세운다면 도덕 법칙 역시 더 이상 필연적일 수 없다. 감정에 의해 도덕을 행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휘둘리는 것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이며 경험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보편성을 잃는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칸트는 네 준칙이 보편 법칙이 되게 하라는 정언 명령을 제시하였다. 만일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기에 칸트는 이성적으로 세운 보편 법칙에 의무감을 갖고 행동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칸트의 윤리는 칸트의 전제가 옳다는 전제 하에 옳다. 즉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여야 하며 도덕이 보편적인 법칙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 칸트 윤리가 타당하게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도덕에 보편성과 당위성이라는 속성을 귀속시킨 것은 칸트이다. 칸트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가 칸트가 도덕 명제로 생각한 논리적 결과를 도출한다고 하더라도 그 명제를 도덕으로 명명할 필연적 연결성이 없다. 그럼에도 이를 도덕으로 부르는 것은 모든 이성적 존재가 생각하였을 때 보편성과 당위성이 존재해서가 아닌 그렇게 나온 결과를 이미 도덕으로 확정지었기 때문에 독단적 정의이다. 또한 인간이 자율적인 이성적 존재여야 보편 법칙이 나오고, 보편 법칙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논증은 이미 보편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세워놓고 사유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인간이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여야한다를 먼저 전제했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를 인간 이성의 한계 밖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보편 법칙으로 인해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이 실천적으로 가정되는 것일 것이고, 이는 순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이성이 도덕을 명령한다는 실천 이성의 사실이 있기에 이를 위해 인간의 자유가 요청된 후 인간이 자유롭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정언명령이라는 도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이므로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이성적일 수 있다. 만약 이를 한 인간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본 것이라면 두 명제는 근거가 없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다. 또한 모든 사람은 이성으로 도덕을 느낄 수 있으므로 이렇게 도출된 도덕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동시에 도덕은 보편적이어야 하므로 이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결국 도덕이 보편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이성에서 나오고, 이성에서 나온 도덕은 보편적으로 됨으로써 설득력을 잃는다. 이 과정에서 도덕은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선험적인 것이라며 순환을 피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전제로써, 또다시 그 전제가 어떻게 도출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또한 보편화 가능성 역시 과한 감이 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사회에서는 신뢰라는 개념이 사라지며 그렇기에 남을 속인다는 전제가 사라지게 된다. 즉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므로 이는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회와 하는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그 자체로는 논리적 일관성을 평가하는 유용한 도구일 수 있으나, 현실의 복잡성과 도덕 판단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도덕의 보편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논리적으로 특수한 상황을 가정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므로 논리적으로는 보편성을 가지는 도덕이 현실 속에서는 그 보편성을 잃는다. 현실 속에서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보편화 가능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일 뿐, 현실의 일부 거짓말조차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 논리적 설명으로 해석하더라도 내가 거짓말을 하였을 때 다른 이들에게도 거짓말을 할 의무를 준다는 것은 보편성과 당위성이라는 칸트의 전제에 기대고 있으므로 정말 모든 이성적 존재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같은 도덕을 도출할 수 있으리란 담보가 없으므로 역설적으로 보편성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모든 종류의 자연법과 보편 법칙을 거부한다. 물론 또 다른 방식으로 보편 윤리를 설명하는 철학도 있겠지만 본 글에서는 대표적인 이론인 자연법과 칸트 윤리만 논의해 보았다. 그러나 다른 이론들 역시 논의를 시작해 보면 앞서 논의한 두 이론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바로 사회 상태에 의해 도덕이 정의된다는 것이다. 도덕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필자 역시 자연 상태의 인간을 관찰하여 볼 것이다. 아무런 제약 없이 완전히 혼자인 인간에게는 모든 권리가 있으며 그 어떤 의무도 없다. 모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하고자 할 때 사실상 완전히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이 상태의 인간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어떠한 의지를 가질 때 필수 조건으로써 논리적 정합성을 위한 행동 규칙만 있을 뿐이다. 이를 도덕으로 정의를 할 수는 있겠으나 그 기준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에게 불필요한 제약이 가해질 이유가 있겠는가.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어떠한 제약도 없으며 다만 모든 책임을 자기 자신이 지는 상태, 그것이 자연 상태의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를 이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두, 세명정도라면 여전히 거의 자연 상태라고 봐도 상관없겠다. 그러나 그 구성원이 많아지고 사회라는 것이 형성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권리의 일부를 내려놓고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에 속하기 위하여 이는 필수적이다. 생명을 경시하여 살인이 일어나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를 유지하려는 인간은 애초에 사회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연 상태의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대신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취약한 존재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일단 보장받아야 그나마 보전한 권리라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를 형성하게 되고 이때 도덕이 생겨나게 된다. 이때 거의 선사 시대부터 내려져온 뿌리 깊은 도덕들이 있다. 생명을 존중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등 기존 보편 윤리 이론에서 도덕 법칙으로 정의하였던 도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는 보편 윤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사회가 이러한 특징까지 모조리 뒤집힐 정도로 완벽하게 변해버린다면 이러한 보편 윤리까지 부정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러한 보편 윤리가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인간 사회가 그렇게까지 변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이나 변하지 않은 윤리라면 사실상 보편 윤리처럼 보였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을 보라.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인을 허용해도 유지될 힘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생명은 유한하고 단 하나이며 훼손되었을 시 이는 불가역적이다. 이는 즉각적인 노동력의 손실과 주변인의 감정적 고통을 야기하며 이는 사회에 큰 손실이 된다. 이는 선사 시대부터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윤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굉장히 당연하게 전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를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내재적으로 윤리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보며 비난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몽골, 청나라의 침략을 공부하면서도 이에 대해 분노를 느끼거나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이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그렇지 않다. 강대국이 전쟁이 아닌 외교적이고 경제적인 압박만 하더라도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듣는다. 윤리가 크게 변한 것이다. 또 한국인들에게 조선 왕조를 복원하고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조선으로 가서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면 처형당할 것이다. 이 역시 윤리가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도덕이라는 것을 도식적으로 그려 원을 형성한다고 해보자. 바깥쪽일수록 바뀌기 쉬우며 안쪽일수록 바뀌기 어렵다. 즉 바깥쪽에 존재하는 도덕일수록 사회가 조금만 변해도 그 변화가 바로 반영되는 도덕이지만 안쪽에 존재하는 도덕일수록 인간 사회의 기초적인 특징에 가까워지며 웬만큼 인간 사회에 변혁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잘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여러 반론에 직면할 수 있다. 사회에 의해 도덕이 정의된다라는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불편을 야기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것은 도덕이 사회를 비판할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이며 반인륜적인 도덕을 정당화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존엄성이 부정당하는 것과 같은 불쾌감을 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론은 필자의 주장을 오해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필자는 사회가 도덕을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자면 사회 상태에 의해 도덕이 정의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건강식품을 먹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여러 불량 식품을 먹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건강식품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이 불량 식품이고 무엇이 건강식품인지 선언할 권리는 없다. 인간이 나는 이제부터 햄버거를 건강식품이라고 생각하겠다고 말한다고 실제로 햄버거가 건강식품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인간마다 그 인간에게 맞는 건강식품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마른 사람에게는 열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음식이, 뚱뚱한 사람에게는 열량은 낮고 영양적으로 균형 있는 음식이 건강식품일 것이다. 당뇨병 환자에게는 당이 많지 않은 음식이,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알레르기 유발 재료가 없는 음식이 건강식품의 조건일 것이다. 도덕 역시 이와 같다. 사회의 정부나 지도자가 선포하는 사상이 도덕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사회의 경제, 교육, 문화, 국민 수준 등에 따라 가장 알맞은 도덕이 정의되는 것이며 사회는 이 도덕을 따를 때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조선에게는 군주제이고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사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 윤리는 없지만 특정 시대, 특정 지역으로 국한하였을 때 따라야 하는 도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나치를 살펴보자. 20세기 초 바이마르 공화국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상황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나치독일이 된 것을 우리는 비판할 수 있다. 넓게 보면 그렇게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한 것부터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이미 그런 상황에 처해졌다는 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불가피함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이해되고자 했다면 그들은 적당히 최대한의 마지노선으로 뮌헨 협정까지만 나아가야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독일 국민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분명히 시대를 역행한 것이다. 이 시기 독일의 상태로 볼 때 충분히 민주주의와 보편 윤리로 알려진 도덕들을 시행할 능력이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이 필연적으로 정당화되는 상태였다고 볼 수 없다.
즉 뮌헨 협정까지의 독일은 그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과 초기 나치 독일의 사회 상태에 의했을 때 충분히 평화적인 외교로써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고 본다. 오히려 극도로 떨어지는 화폐가치와 극단적 사상의 대립을 방관하여 독일 국민을 방치하는 것이 이 시대 독일에게는 더 큰 악이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독일은 그 후 폴란드를 침공할 것이 아닌 자국 산업을 발달시키며 자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나치당은 그러한 독일의 상태와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채 나치즘의 마수를 유럽 전역에 뻗치게 하였다. 즉 이 시점에서 나치는 도덕이 사회에 선행되게 한 것으로써 정당화되지 못하며 사회 상태에 의해 정의된 도덕을 무시한 것으로, 인간이 불량 식품을 먹은 것과 같다 하겠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여전히 반인륜적 사상의 가능성은 남아있으며 마치 이는 특정 조건이 달성된다면 나치가 준동하더라도 상관없다는 결론을 낳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세계에 있는 보편 윤리에 반하여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가지 윤리들을 그 사회에 적합한 윤리라며 정당화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은 보편 윤리론자들에게 큰 불편을 안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요지가 극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굉장한 시도를 해보도록 하겠다. 그저 적당히 명예 살인과 같은 도덕을 보는 것이 아닌 무려 살인하지 말라라는 도덕을 살펴보자. 반론자들은 필자의 관점에서라면 이러한 가장 기초적인 도덕조차 특정 조건이 된다면 부정될 수 있다는 점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됐을 때 이 윤리가 무너지는지 바라본다면 이 반론은 큰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앞서 말했듯 선사 시대부터 이어져온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윤리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뿌리를 이루는 특징을 나타냄과 동시에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까지 포함한다. 인간 생명의 유한성, 불가역성, 감정과 감각의 존재는 전부 이 도덕을 정당화한다. 인간 종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그 사회와 문화와 같이 인간이 만든 특징 그 이전에 인간 자체의 특징으로 인해 살인을 금하는 도덕을 세운다.
그러므로 이 윤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간 사회의 변혁을 넘어 인간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두 사회를 예시로 들어보자.
첫 번째 사회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 불가역적이지 않은 사회이다. 죽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집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심지어 복제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의식이 그대로 이어져 진실로 부활하는 사회라면, 살인죄가 지금과 같은 중대성을 가지고 있겠는가? 기껏해야 다시 살아나는 동안 손실된 피해와 죽임을 당할 때의 고통, 불쾌감 등을 고려하여 적당히 강력한 상해죄 정도로만 취급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죽임을 당하는 즉시 살아나며 어떠한 불쾌감과 고통도, 불이익도 없는 것이 가능하다면 살인죄 자체가 존속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사회는 인간의 수가 무제한적으로 많고 공감능력이 전무한 사회이다. 인간의 수가 아무리 쓸려나간다고 하더라도 사회에 끼치는 불이익이 0에 수렴한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죽어나간다고 하더라도 이를 슬퍼하는 인간이 없다는 점에서 감정적 고통 역시 없다. 물론 이 경우 불가역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보편 윤리를 주장한 사람들은 여전히 불편을 느낄 수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이런 사회의 법에 살인죄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앞서 언급한 도덕의 도식적 원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도덕을 억지로 끄집어내려 하니 이런 어마어마한 사회가 나온다. 인간 사회의 특징에는 인간 자체의 특징도 영향을 미칠 것임이 자명하고, 그렇다면 가장 기초적인 도덕이라 함은 그것이 사실상 불변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변하지 않을 사실인 인간 종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인간 종 자체가 변하리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는 그 종의 불변성에서 기인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덕을 부정하려고 시도를 하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어떠한가? 우리는 가장 안쪽의 도덕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는 판타지 같은 사회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더 이상 인간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한 사실상 도달할 수 없는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회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묻고 싶다. 이러한 사회에 감히 우리의 도덕 법칙을 들이미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당장 고작 500년 전의 과거를 볼 때에도 우리는 그 시대 상의 관점에 맞추려는 노력을 해준다. 그러나 이런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회에 우리의 윤리를 들이밀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오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에는 보편 윤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도덕 체계를 존중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례는 너무나 과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회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례를 드는 것은 마치 어차피 오지 않을 사회이니 딱히 논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반론자들은 좀 더 현실적인 사례라면 자신들의 이론이 잘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질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논의를 회피하지 않으며 필자의 도덕론이 보다 현실적으로 변하더라도 충분히 잘 기능하리라고 본다. 보편윤리론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파시즘, 생명경시사상 등을 예로 들며 이것들의 정당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보편윤리가 존재하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예시로 드는 사상들이 정당화되기 위한 사회가 오기 위해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굉장히 동떨어진 사회를 상정해야만 할 것이다.
필자는 진실로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와 같은 이념이 가장 적합한 체제라고 믿는다. 현대 사회의 국민 수준, 교육 수준, 경제 수준, 문화 수준, 인간적 특징을 고려했을 때 개인을 최대한 존중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이룩하는 것이 앞서 비유한 건강식품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를 밀어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 전체주의가 가장 적합한 사회가 되려면 대체 사회가 얼마나 변혁을 이뤄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실현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도자나 정부가 그것을 지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 자체가 전체주의에 적합한 사회로 맞춰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며 그것의 경제, 교육, 국민, 심지어 인간적 특징까지도 현대 사회와 궤를 달리할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사회라면 우리의 윤리 기준을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하다. 그렇다면 필자는 또다시 보편윤리론자들의 주장이 과하게 고집스러우며 오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반론자들은 이제 사회의 변화가 크지 않아 자신들의 보편 윤리가 전반적으로 들어맞는 사회를 설정해야 한다. 물론 보편 윤리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사회를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일단 넘어가 보자.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보편 윤리가 잘 맞아떨어질 것이다. 애초에 사회 자체를 그렇게 가정을 했으므로 보편 윤리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 윤리를 제외한, 그러니까 원 바깥쪽에 있는 도덕들은 여전히 여러 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동시에 보편 윤리들 역시 보편 윤리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즉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반론자들이 주장하는 반인륜적 사회가 온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인간 사회를 더 이상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 사회에 억지로 우리 사회의 보편 윤리를 끼워 맞춘다는 것은 독선적 고집이며 그들 사회를 존중하지 않는 독단적 사고이다. 또한 사회가 얼마만큼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반론자들이 우려할 만큼 반인륜적 사회가 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굳이 보편 윤리라는 것에 목맬 필요가 없다. 이런 사회라면 충분히 현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생명 존중,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이 존중받으며 그 안에서 여러 문화적, 경제적 요소들의 다양성으로 인한 세부 윤리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이를 존중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보며 문화 상대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범위일 것이다.
이에 도덕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바라볼 수 있다. 사회 상태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도덕이라면 도덕은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발전시켜 주고 안정적으로 영속시켜 주는 것이다. 만약 도덕이 사회를 오히려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보편 윤리에 반해 불안정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도덕을 사회 상태에 선행시키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안정적 영속을 책임지는 역할을 잃어버린 것이다.
또한 그 결과는 결코 보편윤리의 관점에서도 비도덕적이지 않다. 대신 단순히 좋기 때문에, 나쁘기 때문에 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자유주의가, 인권이, 여타 다른 보편 윤리로 보이는 도덕이 현대 인간 사회에 가장 적합한 도덕이며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안정적 영속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도덕론은 필연적으로 단순한 가치 판단이 아닌 그 가치를 도출하는 실증적 근거를 요구함으로써 최대한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하여 불가피성을 확보해 논의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일 때 비로소 현실 정치의 여러 사안들을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타당하게 근거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