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마주한 인생
전 산책을 참 좋아합니다. 이어폰을 양쪽에 끼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여러 길을 걸으면 평화로운 행복이 느껴집니다. 머리 아픈 일상 속에서 떠나 온갖 공상을 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시간도, 거리도 꽤 많이 지나온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 좀 새로운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항상 걷던 강변이나 산책로가 아닌 또 다른 산책로나 혹은 동네 구석구석의 골목이라도 좋습니다. 길치인 저는 그러다가 길을 잃어 지도에 의존하여 빠져나온 경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다다르면 그냥 산책할 때와는 다른 색다른 고양감이 느껴집니다. 사실 풍경 자체는 고만고만한, 흔히 상상되는 동네 주택가나 산책로일진대, 한 30분 걸었나 싶어 시계를 보면 10분밖에 지나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는 지루해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이 아닌, 평소에는 30분 정도에 채워졌을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 감각이 10분 만에 전부 채워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길이라도 자주 다니다 보면 당연히 익숙해집니다. 언제쯤 끝이 나올지 예상이 가고, 이전의 고양감은 사라진 채, 10분 걸으면 딱 10분 걸은 만큼만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꽤 한참 걸었다고 생각했던 길이 이제는 생각보다 짧다고 느껴지고, 당장 그 순간에 주변 모든 것에 집중하며 느리게 흘러갔던 시간이 그냥 휙휙 지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저는 또 다른 산책길을 찾으러 떠나죠.
그러다 보니 내가 전지(全知)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산책로 바꾸듯 다른 생으로 갈 수도 없고, 지루한 산책을 수십 년 동안 한다면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우리 뇌는 과거를 회상하며 기억을 긍정적으로 바꿔버린다고 합니다. 예전의 힘들었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생각보다 즐겁고 괜찮은 과거였을지도라고요. 회상한다는 것은 이미 한번 지나가 본 산책길을 다시 가보는 과정과 같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새롭고, 언제 끝날지 몰라 막막하기도 하며 그래도 오감으로 느껴지는 정보들에 감동도 느꼈던 반면 이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을 테니까요. 그나마 당시의 새로웠던 기억은 남아있더라도 뭘 그리 막막해했던 건가,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은 그 기분을 과소평가하게 된 것 같습니다.
게다가 회상한다는 것은 그 산책로를 전부 걷는 것도 아니죠. 우리 뇌가 꿈꿀 때 한 인간의 일생을 표현하려면 100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10분의 기억이면 충분히 인생 하나를 꾸며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회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로 그 당시를 떠올리는 것이 아닌, 그 당시라는 실체를 구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억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힘들었던 기억은 과소평가되는 것도 모자라 그나마 있는 것조차 일부만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막막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산책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길, 저 길을 전부 알려주거나 뭘 그리 조심스럽냐 와 같이 조언인 듯 한 비난은 오히려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기쁨을 빼앗고, 당연한 힘듦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자신을 자책하게 될 테니까요.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혐오하기가 판치는 사회에서 서로의 삶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