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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일기를 쓰면

내 일기를 봐줘

by 김지현

아직까지도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맹렬하게 썼던 일기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요즘의 모던하고 깔끔한 디자인과는 다르게 굉장히 미학적인 관점에서 찍은 정물화 사진이 인쇄된 일기장이다. 때론 학교에서 받은 ‘물자를 절약하자’ 따위의 캠페인 문구가 쓰인 노트를 일기장으로 쓰기도 했다. 당시의 노트 품질은 꽤 수준급이었는지 여태까지 떨어진 낱장 하나 없이 꼼꼼하게 붙어있다. 다만 세월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아 구석구석이 누렇게 변했을 뿐이다. 한낱 어린아이의 일기장을 소중하게 보관했을 리는 없다. 온도와 습도를 신경 쓰지 않았기에 곳곳이 습기로 얼룩져있다. 어떤 페이지는 물을 쏟았던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넘겨보면 포슬포슬한 느낌이 드는 것이 우리 집, 곰팡이로 덮였던 것만은 아니었구나 싶다.


그 시절에 일기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일기 검사는 교사의 업무 중 하나였고 그들은 다 쓴 학생들의 일기에 ‘검’ 자가 쓰인 도장을 찍어주었다. 보라색 같기도 하고 남청색 같기도 한, 관공서가 떠오르는 색깔의 도장이었다. ‘검’ 자의 주변은 벼이삭같이 생긴 식물의 줄기가 월계관처럼 글자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이 도장 하나를 받기 위해 어린 나는 작은 두뇌로 하루를 끝없이 복기해 내어 한 편의 글을 만들곤 했었지.


때로 적극적인 교사들은 도장 대신에 짧게 한 줄의 이야기를 써주기도 했다. 이제 와서 읽어보니 크게 와닿는 건 없었다. 반 학생이 30명이 넘었을 텐데 어떻게 자세히 읽어보고 그에 맞게 꼼꼼히 써주겠는가. 그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하루가 재미있었겠구나!

-그래도 어머니께 그러면 안 되지!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챗GPT가 그때도 있었을까. 아니면 교사들끼리 공유하는 일기장 문구가 따로 있었던 것일까. 학년이 바뀌어도 비슷비슷한 교사들의 피드백 한 줄. 고작 한 줄일 뿐이지만 내가 쓴 일기를 누군가가 읽어주었다는 표식이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만의 비밀이 아니게 된 셈이다.


일기의 분량은 ‘한쪽 꽉 차게’였다. 요즘 아이들처럼 ‘세 줄만 채우면 된다’라던가... 그런 거 없다. 하루 한쪽. 간혹 일기장 선택에 오류가 생기면 다른 친구들보다 두 배로 줄이 많이 그어져 있는 불행이 따르곤 했다. 어른들만 매일매일이 같은 게 아니다. 어린이에게도 어제는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과 비슷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숙제가 되어버린 일기를 한 바닥 꽉 채우느라 저녁 시간이면 애를 먹었다. 내가 오늘 뭘 했더라? 밥을 먹긴 먹었는데 돼지도 아니고 매일 먹는 이야기만 쓸 수는 없어. 맞다, 미술 시간에 저금통을 만들었지. 그거 쓰면 되겠다. 생각이 하나 떠오르면 그것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혀 줄줄 써나갔다.


저금통을 만들려고 집에서 종이 상자를 가져갔다. 상자에 색종이를 붙이고 꾸몄다. 저금통이 완성되었다.

큰일이다. 이렇게 일기를 쓰면 한 페이지가 뭐야. 두세 줄이면 끝나버린다. 자, 이제 작업에 착수한다. 일다 ‘저금통’은 애써 길게 ‘세상에서 제일 멋진 저금통’으로 바꾼다. ‘종이 상자’는 ‘엄마가 지난번에 샀던 화장품 빈 상자‘로 바꾼다. ’ 색종이‘는 ’ 이번 달에 용돈을 받아 문구점에서 사탕이랑 같이 산 색종이‘로 바꾼다! 이런 식으로 수식어는 매일 발전해 갔고 학년이 오를수록 나는 일기 쓰는 일이 너무나 쉬워졌다.


365일 일기를 쓴다는 건 몹시 고된 일이다. 하얀 종이를 꽉 채우는 일기를 쓰라고 하면 어른도 금세 포기할 것이다. ’ 사랑의 매’라는 부적 강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점점 나는 꾀가 생겼다. 있었던 일을 쓰는 일기가 아닌 글짓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물을 아껴 쓰자’를 주제로 논설문을 썼다. 물을 낭비하는 예시는 이곳저곳에 있었기에 한쪽 후딱 이었다. 또 어떤 날은 ‘이산가족’을 주제로 뉴스를 보고 기사 요약을 하기도 했다. 그날의 날씨를 주제로 구름끼리 싸우는 SF상상문을 쓴 적도 있다. 실로 다양한 잡글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을까. 일기로 하루를 정리하랬더니 난데없이 에세이와 공상과학을 넘나드는 어린이가 튀어나왔으니.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을 지나 중학교 까지도 방학 숙제로 열심히 일기를 썼다. 나중엔 숙제 검사가 아닌, 나만의 일기(사춘기의 그 일기!)를 썼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평범한 노트가 아니라 내 맘에 쏙 드는 양장본 표지의 노트를 구해 잔뜩 오글거리는 글로 채웠다. 검사하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껏 속 이야기를 쓰고 내키는 대로 거짓말도 휘갈겼다. 하지만 그때의 일기는 나조차도 다시 읽을 자신이 없어 폐기했는데 실은 조금 아쉽다. 사실 일기장의 최초이자 최후의 독자는 나인데. 마치 유작인지 몰라보고 함부로 버린 느낌이다. 아니지, 작가가 여기 살아있으니 애독자인 나를 위해 지금처럼 계속해서 써나가 보자.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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