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와본 도시에서 처음 겪는 일들 4
베트남 여행을 하나씩 차근차근 기록하고 싶었지만, 오늘의 기록을 한시라도 빨리 쓰고 싶다. 그래서 2편, 3편을 가볍게 건너뛰고 4편을 쓴다.
Hello, stranger?
여행 둘째 날 해변에서 Song ming-쏭밍-을 만났다. 혼자 사진 찍는 날 보고(아니, 정확히는 혼자 제대로 못 찍는 날 보고)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다가왔다.
미국 여행 때 이렇게 다가온 사람들이 돈을 뜯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약간 경계했다. 역시 쏭밍은 달랐다. 태닝 하는 내 옆에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가 서핑 클럽의 성원이며, 호찌민에서 대학을 다니고 사업을 하다가 고향 냐짱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린 서핑 약속을 잡았다. 현지 서핑샵의 1/10 가격으로 해준단다.
사실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이라 모든 게 걱정되긴 했다. 가격이 너무 저렴한 것도, 자꾸 와서 말을 거는 것도 의심스러웠지만 쏭밍이 착해 보이기도 했고, 영어로 대화 가능한 베트남사람이 많지 않아 심심했던 찰나에 재밌는 일이 생긴 것 같아 거절하지 않았다.
경계심(vigilance)의 경계(boundary)
서핑 약속날 아침,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바람에 셔츠가 벗겨질 정도라 옷깃을 부여잡고 걸어야 했다. 흠 서핑이 가능할까..? 우선 쏭밍과 약속한 장소로 갔다.
쏭밍은 반미를 먹으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날 위해 바나나 한 송이를 준비해 두었다. 그의 JBL스피커에선 에미넴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경계를 거두지 못한 채 가까이 앉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내게 큰 나무토막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애매하게 앉아서 바나나를 먹었다. 역시 오늘은 바람 때문에 서핑하기 어려울 것 같단다.
oh, my... what would I do? I wanna go surfing.
쏭밍은 실망하는 내게 점심 이후에 해가 뜰 수도 있으니 오전에는 자신이 아름다운 장소를 구경시켜 주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A beautiful place? Where? How far that is? 경계심이 가득한 채로 이것저것 물어보는 내게 쏭밍은 한술 더 떠서 질문을 했다. If you don't mind I want to invite you to my parent's home for lunch.
어설픈 쏭밍의 영어. 쏭밍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족과 집에 대해, 손님 초대를 좋아하는 베트남 문화에 대해 설명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타지에서 낯선 이의 집에 가는 게, 아름다운 장소가 어딘 줄 알고. 인신매매는 아니겠지? 내 물건 훔치려는 건 아니겠지. 에라 모르겠다.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해코지를 하겠어?
현지인의 길
쏭밍의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3일 간 그랩 바이크를 타고 다녔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Song ming, drive safe. please. oaky? 쏭밍은 걱정하지 말라며 날 다독였지만 덜덜거리는 쏭밍의 오토바이는 조금도 날 안심시키지 못했다. 온갖 매연 속에 20분을 달렸다. 에미넴의 노래와 끊임없는 경적소리, 계속해서 나한테 말을 거는 쏭밍. 설상가상으로 바람이 너무 강해서 오토바이가 흔들렸다. 정신없고 무서웠다. 나 괜찮겠지? 사고 안 나겠지.
그러다 갑자기 순식간에 도로가 조용해졌다. 냐짱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도로에 차, 오토바이가 간간이 보였다. 그제서야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너무 완벽해!
한참을 더 달리다 절벽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Here. Let’s go. 쏭밍은 날 절벽 가까이에 데려갔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저 멀리 섬(러브 섬)까지 보였다. 외국인은 한 명도 없다는 섬. 오는 길에 현지인 시장에서 산 코코넛을 쏭밍이 오토바이 키로 따줬다.
나는 30,000동에 산 코코넛이 쏭밍한테는 10,000동이란다. 게다가 관광지에서 먹는 것과 생김새도 다르다.
한참 구경하다가 다시 오토바이에 올랐다. 이제 쏭밍의 집에 갈 차례. 이때부터는 모든 게 기대되기 시작했다. 경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쏭밍의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기 위해 시장에 들렀다.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들린 여느 시장과 사뭇 달랐다. 쏭밍과 간 시장에 외국인은 하나도 없었다. 6-7살 때 할아버지 손 잡고 갔던 시장과 비슷했다. 생고기를 그 자리에서 손질해서 파는 집, 닭과 오리를 파는 집, 과일을 파는 집 등등. 그동안 여행지에서 갔던 시장에선 어색한 억양으로 ‘언니- 이거 싸.’ ‘누나 넘흐 예뻐요. 이거 존나 맛있어’ 하며 호객행위 하는 젊은 현지 상인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 마켓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쏭밍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기도 했다.
가족을 만나다.
쏭밍의 집에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재밌었다. 냐짱에 이런 곳이 있었어? 가는 내내 신기했다. 냐짱이 너무 관광지 느낌이라 덜 맘에 들어하던 참이었는데, 쏭밍의 집은 정말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쏭밍이 자신의 집이 강 옆이라고 했는데 냐짱에 무슨 강이 있나 의아했다. 정말 큰 강이 있었다. 그런데 강을 건너는 다리가 위험천만 그 자체였다. Is it safe? Yes, super safe.
한국이었다면 안전 기준을 절대 통과하지 못했을 다리. 몇 대의 오토바이가, 심지어 짐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동시에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강은 정말 아름다웠고 강을 둘러싼 열대나무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무서움을 잠깐 잊을 수 있었다. 다리를 통과할 때는 통행료를 낸다. 누가 관리하고 왜 통행료를 내는 것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그냥 다 신기했다.
쏭밍의 집에 도착했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자 쏭밍의 동생과 조카가 앞으로 나왔다. 오토바이에서 빨리 내려 인사하려다 넘어지고 말았다. 인사하기도 전에 바닥에 엎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가족들 모두 깜짝 놀라 Are you okay?를 연거푸 외쳤다. I’m okay. no worrries. 하지만 창피했다. 마켓에서 사 온 파파야를 내밀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 신 짜오.
내가 오는 것을 미리 말하지 않았는데도 다들 자연스럽게, 하지만 정말 크게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친척이 오랜만에 놀러 온 것처럼 나를 환대했다.
쏭밍의 조카는 흥분해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쏭밍의 강아지 나오가 오늘 아침 아기를 낳은 것이다! 집에 오기 전, 쏭밍이 강아지가 임신했다고 말해줘서 알고 있었지만 오늘 낳았다니!
아기 강아지와 방금 막 아기를 낳은 나오를 보니 눈물이 나왔다. 너무 예쁘고 소중했다. 나오의 남편 밤도 온순했고 나를 크게 반겨줬다.
쏭밍의 가족이 기본적인 영어를 했고, 조카가 영어를 잘해서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조카 모카우에게 강아지 새끼들 이름을 묻자 아직 짓는 중이라더니 5분 뒤에 와서 이름이 뮥, 리사, 로비타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또 5분 뒤 새끼 강아지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리사가 수컷이었다. 모카우는 발을 구르며 실망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가족들은 나를 가장 먼저 식탁에 앉히고 맥주를 권했다. 내 밥을 먼저 내줬는데 다 같이 먹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으니 새니타이저 젤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뭔가 불편할까봐 서로 상의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해답이 소독젤이라니. 너무 귀엽고 고마웠다.
시금치 국, 돼지갈비가 나왔다. 소스를 밥에 뿌려 같이 먹는 것이라며 나한테만 소스를 소분해서 주는 등 식사 내내 나를 배려해주었다. 쏭밍의 매형은 내게 고기도 계속 더 얹어주었는데, 자신이 먹던 젓가락으로 올려준다고 핀잔을 들었다. 날 이렇게 배려해주다니. 배가 불러올 때쯤 티가 났는지 배부르면 남겨도 된다고 말했다. 덧붙인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넌 여기 있으니까 가족이랑 똑같아. 가족이라고 생각해. 그니까 남겨도 돼.
감동받아서 Awwwwww 를 연발했다. 물론 다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코코넛을 내주었다. 직접 키운 코코넛인데 시장에서 파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말이었다. 진짜 진짜 달고 시원했다.
식사하는 내내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베트남 억양이 너무 심해서 그들의 영어를 때로는 못 알아듣기도 했지만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쏭밍이 이제 가자고 했지만 내가 더 있고 싶다고 할 정도로 재밌었다.
친구 만나기
이제 쏭밍의 서핑 클럽으로 돌아가서 서핑이 가능할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쏭밍의 캡틴은 오늘은 날씨가 궂어서 어려울 것 같으니 완벽한 날씨에 꼭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조금도 아쉽지가 않았다. 쏭밍 클럽 사람들은 해변에 간이 테이블을 두고 대나무 와인을 꺼냈다. 마른안주를 꺼내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쏭밍의 친구 디마도 함께 있었는데, 17년 전 러시아에서 냐짱으로 이민을 왔고 역사 교사였다고 한다.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디마의 강아지 벨카와 해변을 뛰어놀았다.
내가 베트남에서 낯선 이들과 맨발로 둘러앉아 노상을 깔 줄이야. 이 상황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쏭밍을 따라가는 게 겁나서 거절했다면 오늘 하루 뭘 했을까? 나름대로 재밌는 하루를 보냈겠지만 이 정도로 흥미롭진 못했을 게 틀림없다.
호텔로 돌아와서 낮잠을 자고 저녁 먹으러 나갔다. 혼자 랍스터에 새우를 먹고 버블티를 사 왔다. 호텔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면서 완벽한 하루였다고 느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언제 이렇게 완연한 성인이 됐나 싶었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꽤나 앳된 얼굴이었던 거 같은데 이젠 해외에서 술 마실 때도 신분증 검사를 안 한다.
영락없는 20대 후반의 내 얼굴을 보니, 지난 20대의 시간들이 휘리릭 스쳐 지나가서 잠깐 눈물이 나왔다. 정말 힘들었는데 버티길 잘했다, 참 잘 살았다, 고생했다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이 기특해졌다.
내일모레 서른인데 아직도 이렇게 감상적이어서 이걸 어디다 쓰나. 하긴, 이 센티멘탈함으로 논문도 썼고 책도 썼고 강의도 했다. 내 브런치 글 중에 만 뷰를 넘은 글들은 다 센티멘탈 그 자체인 걸. 사실 사회과학 연구자의 필수 요소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기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한 문장 정리: 이 즐거웠던 하루를 도저히 짧은 글로 쓸 수 없었다. 긴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를! (엥 두 문장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