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세대논쟁들에 대하여
꼰대라는 말, 맘에 들지 않지만
글을 시작하기 전 이것부터 써야겠다. 나는 '꼰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 자신의 경험으로만 우리의 세대를 막무가내로 비난하는 윗 세대를 꼰대라고 부른다.
나는 나이를 기준으로 어떤 세대를 비판하는 매커니즘은 '꼰대'나, '꼰대'를 욕하는 청년이나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윗 세대, 어른, 선배를 쉽게 꼰대라 부르는 청년이 나이가 들어 언젠간 꼰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꼰대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그런데 요즘 내가 이러다 '꼰대'가 되겠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깜짝 놀라면서도 스스로 반성하게 됐던 이벤트였다. 어쩌면 '꼰대'를 욕하는 사람들과 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고 했던 내게도 그 매커니즘이 있었던 것일까?
나의 '꼰대' 모먼트 1: 어린이들을 이해하지 않기
약 2년 전, '푸시팝'(팝잇)이 유행했다. 지하철 역사 근처 상가나 길거리 상점들에 형형색색의 푸시팝이 걸려있었다. 처음엔 냄비받침을 파는 줄 알았는데 점점 하트모양, 대형, 무지개 색 등 다양하게 발전하는 푸시팝을 보면서 냄비받침이 아닌 것을 알게 됐다.
그럼 저게 뭐지? 하던 찰나에 홍진경 유튜브에서 푸시팝을 봤다. 홍진경의 초등학생 딸이 재밌다며 갖고 노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참 별게 다 재밌다. 저런 게 유행이라니, 아무리 요즘 애들 요즘 애들 해도 애들은 귀엽네." 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본가에 내려갔는데 언니 방 침대에 언니의 자식들, 그러니까 내 조카들의 푸시팝이 침대에 있었다. 역시 우리 아기들도 쓰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고 침대에 누웠다.
동생이랑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손에 들린 푸시팝을 만지작거렸다. 홍진경의 딸 라엘이가 푸시팝을 갖고 놀던 모습을 따라 하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누르며 동생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푸시팝을 터뜨리느라 동생과의 대화에 버퍼링이 걸리고 있었다.
세상에! 내가 그렇게 이해 못 하던 푸시팝을 재밌게 갖고 놀다니. 그 순간 갑자기 섬뜩했다. 경험해보지도 않고 다른 세대의 문화나 놀이를 무시하는 태도가 내가 딱 비판하던 그것을 나한테서 발견했다.
아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그 뒤로는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면 한 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나의 '꼰대' 모먼트 2: 어른들을 고루하다고 여기기
나의 고향은 용인이다. 이 얘기를 듣는 타지역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먼저 에버랜드에 대해 물어본다. 이쯤 되면 내 고향은 에버랜드라고 해도 무방하다. 난 정말로 에버랜드에서 자라다시피 했고, 그만큼 에버랜드 좋아한다.
이십 대 후반이 된 지금도 에버랜드가 그토록 가고 싶었다. 에버랜드에 가고 싶다고 하면 내 주변에 선배들은 에버랜드에 대한 딱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에버랜드 가기'를 소원으로 삼는 나를 "아직 젊은" 애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 어른들, 선배들을 보면서 나이 든 사람, 지루한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넘겼다.
드디어 내가 두 달 전에 에버랜드를 다녀왔다. 에버랜드에 간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어른들 말이 계속 내 입에서 나왔다.
"에버랜드 음식은 비싸기만 하고 맛이 하나도 없네. 먹을 게 없다."
제대로 된 먹을 거라곤 생맥주밖에 없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추로스도 기름지고 비싸기만 하고 식사용 음식은 더 했다.
그러다 하루가 끝나갈 때쯤 마지막 어트랙션으로 바이킹-허리케인을 탔다. 에버랜드 퇴장 전 선선한 밤바람과 함께 바이킹 타는 것이야말로 내가 에버랜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타고 내리자마자 내가 한 말은 "어후 토할 거 같아. 멀미 난다"였다.
놀이기구를 타면서 단 한 번도 멀미? 어지러움? 구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후 허리케인을 탈 때도 이전같이 큰 긴장도 없고 크게 재밌지도 않았다. 당분간 에버랜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겠다는 확신과 함께 어트랙션에서 내려왔다.
어른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이 말을 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에버랜드에 대해! 나도 나이 들어가면서 내가 고루하다고 느낀 어른들과 점점 똑같아진다. 역시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불필요한 세대 논쟁들
경험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집단을 비판하곤 한다. 특히 최근 한국의 세대 논쟁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청년 실업의 문제를 서로 상대 세대의 문제로 지적하고, 서로를 "꿀 빠는 세대"라 부르며 이익만 챙기려는 세대로 이해한다.
sns에서도 언론에서도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사회과학 연구에서 세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도 정말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도 많다. 첫 번째는, 과연 특정 세대는 누구의 얼굴을 하는가? 예컨대 '청년세대'를 부를 때는 청년 남성이 대표되고, '586세대'를 부를 때는 중산층 장년이 대표된다.
두 번째는, 최근 대두되는 이런 세대 논쟁이 사실은 작위적으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특정 사안들을 세대 프레임으로 보게 만들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노리고 있는 집단이 분명 존재하지만(김종수, 2019) 이는 그림자처럼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불필요한 세대 논쟁을 왜 거듭할까? 누구를 이해하는 방식보다 비판하는 방식이 편리해서일테다.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일은 언제나 불편을 감수하게 한다. 그런 불편함이 편한 세상을 만들 거라 믿지만 이런 나조차 역시 '꼰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브런치의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듯, 이 글 역시 반성과 결심의 글이다.
김종수. (2019). 21세기 한국 사회의 세대 논쟁: 세대 갈등에서 세대 게임으로!. 비교문화연구, 56, 4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