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곳이 있다면, 아마 거기는 천국 아니면 지옥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한 이래 한 번도 그랬던 적은 없다. 성군聖君이 다스렸던 왕정 시대 시절에도,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최고로 발달한 20세기에도, 첨단 과학 기술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21세기에도 그러한 모습이 실현될 확률은 거의 제로다. 사람이 지구 위에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세상은 빈부귀천貧富貴賤으로 나뉘고 사회적인 지위고하地位高下의 관계가 형성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종교의 영역에서도 성직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지만, 은근하면서 공공연하게 차별한다.
사람은 본질상 비교하기를 좋아하나 보다. 어떤 면에서든지 남보다 우월하기를 바란다. 우쭐대고 싶어 한다. 잘난 척을 해야 만족감을 느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사람의 본성을 정확하게 짚은 표현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다들 얘기한다. 과연 그러할까. 상식으로는 100퍼센트 맞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 신념에 스스로 압도되어 타인에게 피력한다. 과연 자기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말할지는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가진 돈이 많지 않고, 사회적으로 대우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 자기와 같이 살기를 바라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종교 지도자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등급이 있다고 얘기한다. 자기들이 직접 가보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온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신뢰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못하는 교조주의적인 믿음을 강요한다. 표리부동이며 모순이다. 경전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읽어주는 편이 훨씬 더 나을 텐데, 이런저런 자의적인 해석을 붙여 자신만의 교리와 생각으로 사람들을 옥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을 받는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직·간접으로 경험한 사실이다. 세상에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는 듯하다. 묘지다. 죽음이라는 절대 불가항력은 살아있는 존재에게 그 어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죽음은 사람을 직업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황제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 거지처럼 밥을 굶으며 비참한 삶의 굴레를 겪었다고 해서 다른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다.
법이나 제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만이 사람을 차별할 뿐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느꼈다. 머릿속에 차별差別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이미 경험으로 체득했다. 학교보다 더 심한 곳이 교회다. 불교의 사찰은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차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인 혐오嫌惡도 교회에서 배웠다. 편견偏見은 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종교에서 추구하는 도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지고선至高善인데 어찌 부정적인 개념을 경험으로 익히게 되었는지 지금도 알쏭달쏭할 뿐이다.
이제 학교에서는 40여 년 전에 만연했던 부조리나 적폐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법과 제도로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모호한 전통적인 관념 속에서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사제지간師弟之間'이라는 관념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그보다는 교육서비스의 제공자와 교육 컨텐츠의 소비자로 재정의되었다. 학교는 그나마 시대의 변화에 맞춰 시스템으로 사람의 부조리와 적폐를 방지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런 변화를 종교는 전혀 못 따라간다. 인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와 공의롭지 못한 것에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교조적인 교리에는 바늘이 들어갈 작은 틈도 용납하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나 밀도가 마이너스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믿음을 신념화하고, 신념을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바꾸어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사람을 진짜 사람으로 생각하며 대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사랑과 자비와 공의는 사라지고, 편견과 차별과 혐오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작금의 현실에 기가 막히고 헛웃음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