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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23. 2019

가발

나: 도대체 머리가 자라지 않아. 나 1년째 이 길이라고.

너: 아니 진짜! 그러고보니 그렇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우리는 잠시 심각해지기도 했다.


너: 안 되겠어. 네이버에 찾아보자.


핸드폰을 열어 '머리가 자라지 않는 이유'를 써 내려간다.


너: 뭐야! 볼륨 매직 한 이후로 안 자란다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 좀 봐봐.

나: 앗! 나도 볼륨 매직 파마 한 적 있어!

너: 그건가 봐!

나:!!!!!!


그날 밤, 유튜브에서 한예슬 티브이를 보며 다짐한다.


나: 이거야!!! 결심했어.

너:???

나: 가발을 사는 거야!!!


나는 곧바로 가발 사이트를 열어재낀다.

핑크 에이지. 왠지 젊어질 것 같은 사이트 이름이다. 그래 여기야. 지금이 가발 쓰기 딱 좋은 나이지.

현실 부정은 역시 돈지랄로 하는 거야.


처음 발을 들인 가발의 세계는 생각보다 꽤 넓고 다양했다. 그리고 조회수와 판매수를 보다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이용하고 있었다고?


하는 생각을 한다. 진작 찾아봤어야 했어! 하는 괘씸한 생각이 상대도 없이 든다.


앞머리 가발, 통가발, 묶음 머리 가발, 수제 가발, 반 가발, 붙임 머리, 인모, 렉사, 미모사 등등 처음 접하는 단어들에 치여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갈 때쯤, 굵은 글씨로 세일 50% 쓰여 있는 링크를 무작정 클릭한다.


그래, 너로 정했어.


밑져야 본전일 것 같은 금액에 결제 버튼을 누른다.

이제 남은 건, 하루빨리 나의 대체 머리가 날 찾아오길 기다리는 일뿐.


여담이지만, 어릴 때부터 늘 긴 머리였다.

단발은 중학교 들어간 이후였고, 그전까지 엄마는 내 머리를 땋거나 묶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막상 커서 내가 손질해야 하는 시기가 오니까 머리 기르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샴푸를 오래 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귀찮은 일은 머리를 말려야 하는 그 고된 노동. 드라이기의 앞 대가리를 휙휙 흔들며 뜨거운 바람을 쐬는 것도 지친다. 머리를 말리는 시간이 세상에서 귀찮은 일 BEST에 손꼽힌다면 좀 이상한가?  어른이 된 이후 머리 기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안 길어, 안 긴다구.


으악!


수업 전 스벅을 향하던 집 계단에서 나는 택배 아저씨와 갑자기 마주쳐 서로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아저씨 손에 들려있는 영롱한 핑크 에이지 로고!

나는 갑자기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외출하던 일도 뒤로 미룬 채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스벅 따위.


두근두근 언박싱의 시간.

납작하고 긴 핑크 박스에 차롬 하게 들은 풍성한 가발 한 뭉탱이.


나는 냅다 꺼내 이리저리 머리에 붙여 본다.

처음 착용하는 머리는 어쩐지 잘 되지 않는다. 끙끙 거리며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가발을 덮었다 벗었다 하며 1시간을 지체한 끝에 겨우 자연스러워진다.


뭐야, 생각보다 너무 어렵잖아.


역시 가짜가 진짜 되려는 일에는 고독이 따르는 법.

하지만 길어진 머리를 보니 기분이 좋다.


머리를 양쪽으로 잡아 어깨 앞으로 빼봤다 뒤쪽으로 몽땅 넘겨봤다 모자를 썼다 양갈래로 땋았다가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해본다. 입고 나가려던 옷을 벗고 머리에 어울리는 복장으로 바꾼다.


이 정도 길이로 길려면 최소 3년은 더 있어야겠는 걸. 그런데 이것 봐. 그런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게 바로 기술과 자본이라는 거지. 암, 그렇고 말고.


자본주의 신봉자는 가짜 머리를 붙이고 콧노래를 부른다.

신이 나서 수업을 가니 아이들은 내 머리만 보느라 진행이 안 될 지경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붙임 머리를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왠지 다음 날 아이들이 가발을 다 살 것 만 같은 불안감이 일었다. 어른이란, 그래 자신들은 서슴없이 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이런저런 핑계로 못 하게 하는 권위적 위치에 있는 존재들.


슬슬 머리와 목에 통증이 온다.

아무리 얇은 가발이라도 꽤 무거웠다.

혹여나 훅 벗겨질까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닌다.


등은 조금 뻐근하지만, 괜찮아. 시간을 얻었잖아.


저녁이 되자 머리가 엉키기 시작했다.

머리를 빗으면 빗을수록 점점 엉키는 실타래들. 하지만 중간에 벗을 수는 없었다. 이미 가발에 맞는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으니 머리가 엉켜도, 어딘가 어색해도, 나는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진짜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을 테니까. 호박마차가 쥐가 되면 징그럽잖아.


또각-또각-


집으로 돌아와 가발과 나 사이에 연결된 핀을 풀러 낸다.

머리가 시큰시큰 아프다. 원래 내 머릿결, 꽤 좋았구나. 바닥에 던져진 가발을 다시 들어 엉킨 머리를 벅벅 억지로 빗어본다. 뭉텅뭉텅 빠지는 머리.


뭐야, 싸구려라서 그런가.

안 되겠어. 다른 걸 사봐야지.

이번엔 좀 더 비싸고 고급스러운 걸로.

더 진짜 같은 가짜를 살 거야.


나는 다시 머리에 가발을 이리저리 얹어본다.

풍성하게 길어진 길이감, 누구도 관심 없지만 나 혼자 만족하는 이 즐거움.

가짜면 어때. 좀 힘들면 어때.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런 말 할 필요는 없어.  있는 그대로의 나 정말 좋아해.

하지만 긴 머리의 나도 보고 싶고, 좋아하고 싶어. 지금 당장.


나는 점점 가짜에 익숙해지고 가짜에 나를 구겨 넣는다.

거기에 걸맞은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른다. 인조 손톱을 붙이고 높은 구두를 신는다. 스노우 앱을 통해 나를 찍고 편집 또 편집한 이야기를 소셜에 올린다.


짜를 합쳐 진짜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나를 완성하는 걸까,나를 지우는 걸까.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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