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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10. 2019

빈칸

무언가 좋아하기 좋은 계절이에요.

낮에는 시간에 쫓기다 밤이면 시인이 되곤 하죠.

몽글몽글한 구름에 넋을 놓기도 하고 점점 일찍 찾아오는 저녁에 마음이 허물어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한 학생이 제가 예쁘다며 귀까지 빨개지더군요.

어떤 하루는 누군가의 설렘으로 채워집니다. 선생님을 좋아해 본 적 없어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란 건 참 신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 아직 결혼 안 하셨으면 쟤랑 해요!"


나이가 어리나 많으나 남의 감정에 더 들뜨는 건 똑같나 봅니다. 요즘은 세상이 워낙 흉물스러워 그런 건 범죄고 상상조차 절대 하지 말라고 큰일 난다고 매몰차게 대답했지만, 어릴 때 혼자 속앓이 하던 친구들을 보고 자란 세대라 속으로는 웃어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특강을 나갈 때마다 좋아했던 남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네요.

지금 딱 한 사람만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무 고민 없이 이름을 부를 사람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보고 싶다거나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아직도 설렌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이지요.

수업 시간마다 그와의 추억을 도돌이표 하니 저도 참 주책이네요. 아마 절대로 모를 테지만. 알 턱이 없겠지만요. 막상 이 나이에 다시 본다면 '환상 속의 그대'는 무너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이제 소주 한 잔 정도는 기울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데 시간을 셈해보면 벌써 십 년도 넘은 이야기니, 시간의 번짐은 참말이지 속절없네요.


슬슬 연애 이야기도 화두로 떠오르고 글도 쓰고 싶어 지는 것 보니

이 계절을 견디려고 하나 봅니다.



가끔은 진탕 마시고 넘어지고 하찮아지고 싶어 질 때가 있습니다. 계절이 그래요.

차마 그러지 못한 이들은 얼마나 외로울까요. 과정 중에 결론을 내버린 사람들 말이에요. 도돌이표도 물음표도 없이 많은 일들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결국 책은 덮어지겠죠. 앞으로 -다시는 -아무런 기대도 없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되고 싶지는 않은데, 어렵네요.  빈칸 없이 자꾸 마침표만 찍으려고 하니 저도 참 문제입니다. 가을은 좀 그래도 되는 데 말이에요.


"선생님, 뭐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14년의 인생 동안 기억나는 일을 써보라고 했더니 몇몇 아이들이 아무 기억이 안 난다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반항기 섞인 투정일까 싶어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냐고 했더니, 태어났을 때랑 슬픈 기억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14년 생활에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 지독히 해맑아도 부족할 나이에 슬픔이 온통 차지해 버렸다니. 갑자기 옆구리가 따끔거려 그럼 오늘 선생님 만난 일 써주면 안 되냐고 했습니다. 아이는 아, 그러면 되겠네. 하면서 쓰더군요.


오늘이 그 아이의 기억에 조금이라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슬픈 기억 한 개와 즐거운 기억 한 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마음으로 빌었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단순한 일상에 비집고 들어가 좋은 기억 속의 풍경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서, 때론 아무런 맥락도 없이 이름이 불려지고, 예고 없이 발 끝에 차이는 낙엽이 되어 바스락바스락 소란하게 살고 싶습니다.


소란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마음을 가지는 일은 꽤 짜릿해 보이니까

때론 귀찮을 정도로 마음의 잔소리에 시달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무얼 해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지요.

아니면, 그 사람이 무얼 해도 좋은 사람이 있는지요.


둘 중 누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몰라도, 우리는 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더 많이 방황하고, 더 많이 주저하고, 더 많이 취할 수 있는 밤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금은 9월이고, 밤은 점점 커지고

... 무엇보다 가을은 그래도 되니까요...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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