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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Fenber Jan 05. 2024

토착신앙의 정점, 스와에 빠져들다.

일본 철도 여행 #001


옛날 옛적, 규슈에서 올라온 천손족은 타케미카즈치를 앞세워 이즈모의 나라로 진격했다. 이즈모의 수장 오오쿠니누시는 한국(우리나라 역사의 마한, 진한, 변한)에서 들여온 우수한 병기를 사용하는 천손족에 밀려 몰락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아래에 있는 800만의 신(야오요로즈의 신)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며, 이즈모에 큰 저택을 지어 자신의 영혼을 기리면 이들을 보살펴 따르게 할 것이라 설득했다. 타케미카즈치는 흔쾌히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신사를 세우고 오오쿠니누시의 영혼을 섬기기로 약속하였다. 오오쿠니누시가 자결하고 그를 기리는 거대한 사가 세워져 지금의 이즈모 대사로 불리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즈모 대사의 동제(銅) 토리이

이즈모 대사(出雲大社)에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기원은 <고사기><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화이지만 이즈모 대사는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라는 타이틀처럼 높은 언덕 꼭대기에 신사가 있고 총 네 개의 거대한 토리이가 길을 따라 세워져 있는 장엄한 모습이었다.


이즈모 대사의 배전(拝殿). 지붕의 크기가 실로 거대하다.

오늘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스와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으로, 첫 번째는 일본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았을 때 막연히 동방 프로젝트라는 슈팅 게임 시리즈의 배경으로 등장해 가봤던 것이었다. 그때는 그저 게임에 등장한 스와 대사 하사추궁의 모습과 에마에 새겨진 캐릭터 그림을 보고 성지에 왔다는 기분만 느끼고 돌아갔다. 신사 이곳저곳에 서 있던 팻말에는 신사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지만 그때는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한 덕에 이번 여행에서 이즈모 대사를 탐방하면서 이야기를 읽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에 스와 대사에 다시 방문해서 또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오늘의 루트

나가노에서 마츠모토, 스와를 거쳐 코후에.


오늘의 목적지인 스와는 유명한 야츠가타케(八ヶ岳) 산기슭에 자리한 스와 호(湖)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우선 스와에 가기 전에 마츠모토 성을 보기 위해 마츠모토(松本)에 들리기로 했다.


383계 특급형 전동차

2023년 여름을 끝으로 JR 도카이의 오래된 키하 85계가 신형 하이브리드 HC85계로 대체되면서 구식 파노라마 전면부를 그대로 간직한 마지막 와이드 뷰 특급 열차가 된 특급 시나노를 탄다.


나고야의 명물, 미소카츠 도시락

시나노는 나고야와 나가노를 이어주는 츄오 본선(中央本線)과 시노노이선(篠ノ井線)의 정기 특급 열차로, 그 인기와 수요가 상당해 최대 12량 편성으로 매일 13 왕복 운행한다. 오늘도 빠질 수 없는 에키벤은 미소 된장 소스를 곁들인 돈가스 덮밥이다.


특급 시나노의 그린샤에서 본 전망 ⓒtoremorの旅手帳

시나노는 전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파노라마 전망차를 가진 와이드 뷰 특급이다. 여기서 와이드 뷰 특급이란 선두차의 그린샤(우등석)에서 앞이 뻥 뚫린 전망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특급 차량을 말한다. 80년대 말 서비스 향상을 위해 JR 도카이가 개발하여 보급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량이 노후되고 철도 차량에 대한 안전 개념이 바뀌면서 전면부가 통유리인 와이드 뷰 특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나가노에서 출발하는 시나노 10호의 와이드 뷰 차임

이 와이드 뷰 특급 차량엔 와이드 뷰 차임이라는 전용 차임벨이 쓰이는데 철도 마니아 사이에서도 좋은 멜로디로 인기가 많다. 그린샤로 예약해 전망을 즐기고 싶었으나 시나노의 선두칸은 인기가 많아 매진이었다. 아쉽지만 언제 다시 들어볼지 모르는 와이드 뷰 차임이라도 영상으로 담아보았다.


역에서 나가는 길에 촬영했다.

열차는 시노노이선의 고개를 따라 1시간 정도 달려 마츠모토에 도착했다. 열차 안이 시원해서 좋았는데, 내리자마자 후끈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마츠모토 성은 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다. 어제 내렸던 큰 비 때문인지 하늘은 매우 화창했지만 그대로 걸어갔다가는 쪄 죽을 것 같아 공유 자전거 서비스인 HELLOCYCLING의 자전거를 빌려 탔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우뚝 솟은 마츠모토 성이 눈에 들어온다.
마츠모토 성 전경

성을 두르고 있는 호수엔 나가노의 명물인 잉어가 잔뜩 있었다. 어제 들렸던 나가노의 사쿠(佐久市)가 잉어의 특산지로 유명하지만(사쿠다이라에서 먹은 잉어회는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 ㅠ) 최근에는 코리야마(郡山市)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들었다. 이와키(いわき市)에서 코리야마로 가는 반에츠토선(磐越東線) 보통열차 안에서 만난 아주머니께서 전해준 이야기.


마츠모토 성의 정원. 버드나무가 압권이다

특유의 어두운 색으로 까마귀 성이라 불리기도 하는 마츠모토 성은 일본에서 유일하게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의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양식이 공존하는 건축물이라 한다.


그렇다. 내 프로필 사진이다.

어디선가 단체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오길래 성에서 나와 자전거를 반납하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강을 따라 오래된 상점가들이 늘어선 길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개구리의 거리라는 테마였는데, 아기자기한 봉제인형과 여러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귀엽다!!)


흰 벽이 특징인 상점가, 나카마치도리.

개구리에 거리를 지나 조금 더 가니 마츠모토의 명소, 나카마치도리로 이어졌다. 예로부터 츄부(中部) 지방의 주요 거점이었던 마츠모토는 상점가가 발달했는데, 나카마치도리는 일찍이 주조업과 포목 등의 도매상이 모여 번성했으나 메이지 시대에 큰 화재에 휩쓸렸다고 한다. 그 후 화재로부터 상점을 지키기 위해 회반죽을 사용한 흙 벽 창고가 만들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우츠쿠시가하라 고원 산맥이 마츠모토를 감싸고 있다.

역으로 돌아와 전광판을 보고 헐레벌떡 뛰었다. 편수가 적은 시오지리행 보통 열차가 곧 도착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마츠모토에서 시노노이선 보통 열차에 오른 후 종점인 시오지리(塩尻)까지 간다.




나가노 차량센터 소속 파란색 시노노이선 211계 전동차와 주황색 츄오 본선 313계 전동차.
시오지리 역에 나란히 정차 중인 JR 도카이 소속 211계 전동차와 JR 동일본 소속 E127계 전동차.

도쿄 - 나고야를 중간으로 가르는 츄오 본선은 시오지리역을 기점으로 도쿄로 향하는 JR 동일본 관할의 츄오토선(中央東線)과 나고야로 향하는 JR 도카이 관할의 츄오사이선(中央西線)으로 나뉜다. 이와 동시에 시오지리 역은 나가노 방면으로 가는 시노노이선의 시종착역이기 때문에 중부 지방의 터미널로써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별자리가 새겨진 특이한 모양의 장식이 있었던 식당.

시오지리에서 스와로 가기 위해선 츄오본선 보통열차를 타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 시오지리 역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식당에서 조금 쉬었다 가기로 했다. 자루 소바를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 당황스러웠지만 맛은 정말 좋았다.



타케미카즈치는 이즈모에서 싸우다 도망친 이와쿠니누시의 아들, 타케미나카타를 처치하기 위해 진격했다. 시나노로 후퇴한 타케미나카타는 스와 호에 진을 쳐 방어하고자 했으나 타케미카즈치의 번개 공격에 무너지고 호수의 끝자락까지 몰리게 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타케미나카타는 토착신인 모레야와 힘을 합쳐 날씨를 조종하는 주술을 걸어 타케미카즈치의 전진을 겨우 막아냈다. 그러나 이미 양 진영의 피해가 막심해 더 이상 처절한 싸움을 이어갈 수 없었던 타케미나카타는 시나노 1국을 자신이 다스리게 해 준다면 천손족을 따를 것이라 제안했고, 타케미카즈치가 이에 화답하여 시나노 1국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 이후 타케미나카타가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았다. 역시 타케미카즈치를 당해낼 순 없었던 걸까. 하지만 타케미나카타가 기지를 발휘해 모레야와 힘을 합쳐 싸운 끝에 스와를 지켜낸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축제에 쓰이는 제구와 온바시라가 플랫폼 안에 전시되어있다.

어느새 오카야(岡谷)를 지나 시모스와에 도착.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홈 위에 전시된 제구가 눈에 들어왔다. 6년을 주기로 개최되는 스와의 대축제, 온바시라제에 쓰이는 모양이다. 그 규모가 매우 크고 과격해 매년 사상자가 여럿 발생하는 축제로 유명한 온바시라제는, 마을의 남성들이 힘을 합쳐 온바시라(기둥)를 치켜들고 거리를 오가며 축제를 한다. 가장 최근에 개최된 2022년 온바시라제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기계의 힘을 빌려서 진행했다고 한다.


하사추궁으로 가는 길

시모스와 역에서 하사추궁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하다. 천천히 걷다 보면 평화로운 스와의 골목마다 흐르는 냇물 소리가 들려와 힐링되는 기분이 든다. 일본의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녀봤지만 가장 마음이 편안한 곳은 스와라고 생각한다. 마을의 규모도 꽤 크지만 스와 대사의 소재지인 만큼 참배객들의 왕래가 잦아 삭막하지 않기 때문에 더 좋다고 생각한다.


언덕을 오르고 스와 대사 하사추궁이라 적힌 토리이가 보인다면 도착이다. 이 앞에는 작은 오르골 시계가 있는데, 이렇게 정각이 되면 맑은 오르골 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대한 시메나와가 보이는 스와 대사 시모샤 아키미야(下社秋宮)

신목을 지나서는 두 사자가 나를 맞이했다. 일본의 신사나 절 같은 곳에 있는 이 사자는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의 해태와 꽤 닮아있는데, 이들은 코마이누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코마이누(狛犬)는 고구려의 사자상에서 유래되어 코우마이누[高麗犬, 고려견]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지금은 한자가 바뀌었지만 카라이누(韓犬)라 부르기도 하니, 해태의 사촌 뻘 되지 않을까.


만화로만 보던 무녀와 신관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내에 크레인이 들어서 있고 조명과 음향기기를 테스트하고 있던 걸 보니 며칠 뒤 여름 축제가 있는 듯했다. 축제에 대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본전에는 무녀와 신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 거대한 나무는 수령이 700년 가까이 되는 삼나무라고 한다.

스와 대사는 전국에 약 25000개의 분사가 존재하는 거대한 신사인데, 그 본체도 본궁과 전궁, 춘궁과 추궁, 4개의 사로 구분된다. 전설에 따르면 타케미나카타가 아내를 위해 지은 저택이 스와 대사의 하루미야(春宮, 춘궁)와 지금 이곳, 아키미야(秋宮, 추궁)라고 한다. 스와 호의 북쪽에 지어 아내의 고향에 가까운 장소에 살 수 있도록 한 배려이자 스와의 남북을 굳히는 의미도 있었다는데, 이방인이었던 타케미나카타가 스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려면 불가피했으리라 생각한다.


<동방풍신록>의 캐릭터, 모리야 스와코가 그려진 에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토착신 모레야를 모티브로 하였다.

갈수록 스와묘진(諏訪明神) 이야기가 흥미로워지는데, 에마에는 그 신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 <동방풍신록>의 캐릭터들로 가득했다. 저번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자 <쓰르라미 울 적에>의 배경지이기도 한 시라카와고(白川郷) 하치만 신사(八幡神社)에 방문했을 때도 <쓰르라미 울 적에>의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에마가 잔뜩 있었는데,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해 일각에서는 영험한 장소이자 지역의 문화가 담긴 신사에서 과도한 덕질과 서브컬처 성지순례가 지역민의 불편을 야기한다고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 만큼 다소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스와 시 마스코트 캐릭터, 스와히메.

뭐 지금은 그런 분쟁이 일어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스와 대사도 과거 <동방 프로젝트>의 극성팬들과 종종 마찰을 빚은 적이 있는데, 스와묘진 신화가 워낙 매력적이기 때문인지 스와 시에서는 오히려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홍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캐릭터 산업에 진출하였다고 한다. (역시 오타쿠는 돈이 된다.)



스와 대사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스와의 축제는 고대부터 있던 기석에 스와의 정령을 내려서 토지와 백성의 안녕을 기도하는 방법을 답습한 것이다. 이방인이었던 타케미나카타가 스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토착 신앙의 힘이 필요했고, 모레야로 하여금 토착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스와의 축제를 장관 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모레야는 토착민의 지지를 받는 미샤구지를 축제의 중심으로 정착시켜 스와의 지배를 확립해 갔다. 미샤구지는 7석이라 불리는 기암 거석, 7목이라 불리는 히모로기에 자연의 정령을 내리고 토지의 안녕을 기도하는 것으로, 타케미나카타가 스와에 오기 훨씬 전부터 행해지고 있던 기도의 형태이다. 타케미나카타는 스스로를 '현인신'으로 칭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 사이의 조화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는 임종을 맞이하면서 그의 후손을 대대로 축제의 상징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보좌하는 모레야의 후손에게 미샤구지의 비기를 계승시키는 신관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을 남겼다. 차남인 이즈하야오의 장손은 대축이 되어 스와의 땅에 군림하는 현인신이 되었고, 이를 보좌하는 모리야의 성씨를 이어받은 모레야의 후손은 미샤구지의 비기를 이용해 축제를 하고 대대로 후대에 전해갔다. 신들의 시대에서 사람들의 시대로 변천된 것이다.


그 당시 미샤구지라는 토착 신앙의 힘은 얼마나 강했던 걸까. 아무리 강력한 지도자라도 그 지도자를 신용하는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타케미나카타는 현명한 판단으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스와의 토착 문화를 수용해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그 문화를 계승시켜 보존해 나갈 것을 지시했고, 현대에 와서도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이지만 공통된 교훈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푸른 하늘이 비치는 호수를 내려다보니 잡생각이 사라지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참고로 스와는 스와 호를 중심으로 시모스와 정(下諏訪町)과 카미스와 정(上諏訪町)으로 구분되는데, 한자로 보면 알 수 있듯 스와 호의 위(上)와 아래(下)로 나뉜다. 지도상으로는 시모스와(下諏訪)가 스와 호의 위쪽에 있지만 어째서 이름은 반대로 되어 있을까. 이 막연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춘궁에서 볼 수 있었다.





스와 대사 하사추궁에서 하사춘궁으로 이동하는 루트

축제 준비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부산한 추궁을 뒤로하고 하사춘궁으로 향했다. 추궁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하면 나오는 춘궁의 규모는 추궁에 비해 작았지만 한산했다. 춘궁의 배전은 추궁에 비해서 아담했지만 화려하지 않고 자연과 더 어울리는 느낌이었달까.


스와 대사 시모샤 하루미야(하사춘궁)

비석에 적힌 이야기에 따르면 스와 대사는 에도 시대 중반부터 타케미나카타의 아내인 야사카토메가 스와 신앙의 중심이었다 주장하는 분파가 형성되어 지금의 하사(下社)가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상당한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타케미나카타가 아내를 위해 지은 춘궁과 추궁은 하사의 소속이 되어 야사카토메를 기리고, 전궁과 본궁은 상사(上社)의 소속이 되어 타케미나카타를 기리게 되었다고 한다.


배전 밖 양쪽에 거대한 온바시라(기둥)가 보인다.

스와 대사에 이런 배경이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단순히 시모스와에 있으니 시모샤(하사), 카미스와에 있으니 카미샤(상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시모스와와 카미스와라는 지명 자체가 분리된 상사와 하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춘궁에서 호수를 향해 쭉 걸었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졌던 춘궁을 뒤로하고 이제는 카미스와로 이동할 차례이다. 카미스와는 시모스와 역에서 보통열차를 타면 금방이지만 다음 열차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모처럼이니 호숫가를 둘러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카미스와에서 한참 떨어진 전궁과 본궁

전설 속 타케미나카타와 야사카토메가 묻힌 자리에 심어진 두 그루의 삼나무를 보기 위해 스와 대사의 상사본궁과 상사전궁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이쪽의 경우엔 카미스와의 중심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서 포기했다. 아쉽지만 대신 저녁에 친구와 만나 코후(甲府)의 특별한 음식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걸으면서 스와의 이곳저곳을 찍은 사진을 모아봤다.


안내판에는 하늘이 맑으면 저 골짜기 사이로 후지산이 보인다고 적혀 있다. (오늘도 충분히 맑은 거 같긴 한데...)

이곳은 스와에서 유명한 후지산 뷰 포인트. 근처엔 하모 미술관이라는 미술관이 있고 크고 작은 공원이 많다. 날씨는 후끈했지만 그런대로 기분은 좋았다. 


하모 미술관과 카미스와로 향하는 둘레길 루트
나카센도의 중턱, 자전거 도로도 잘 되어있다.

에도 시대 5 가도 중의 하나인 나카센도(中山道)는 간토와 간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도로이다. 도쿄 이타바시(板橋宿)에서 분기해 나가노와 시오지리, 스와 등 츄부 지방의 중심을 관통하고, 간사이의 오츠(大津市)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구간의 간선 개발이 중단되고, 스와에서 도쿄로 직통하는 코슈 가도(甲州街道)가 개발되면서 명성에 비해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같은 에도 5 가도 중 하나이지만 현재까지도 육로 교통의 중심인 도카이도(東海道)와 대조되는 부분. 


사진 찍는데 머리 위에서 시끄럽게 울던 솔개.
 쾌주하는 E353계 특급 아즈사
카미스와 역 앞 거리

1시간 넘게 주변을 둘러보며 걸으니 어느덧 카미스와 역에 가까워졌다. 카미스와는 스와의 중심지로, 시모스와 보다 좀 더 시내 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열차 시간이 남아 역 근처 상점가를 둘러보다 동대문 시장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비주얼의 레코드샵이 눈에 들어왔다. 겉보기와 다르게 꽤 최신 CD도 구비한 곳이었다. 별생각 없이 둘러보고 있는데 여기, 유명하고 희귀한 앨범이 엄청 많았다! 최신 JPOP 앨범이나 각종 애니메이션 주제곡 특별 앨범, 오래됐지만 새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앨범이 정말 많았다.


귀하신 분이 이런 곳에..

결국 앨범을 하나 구매했다. 좋은 음색과 특별한 스토리텔링으로 무수한 명곡을 탄생시킨 2인조 유닛 YOASOBI의 두 번째 앨범, <THE BOOK II>이다. 초회한정판은 아니지만 새것으로 구매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기 때문에 정말 행복했다. (그것도 정말 저렴한 1500엔에..) 나중에 스와에 다시 방문한다면 이 가게에 들러서 다시 구경하고 싶다.



스와의 골목들

거리를 걷던 중 호토(ほうとう)를 파는 식당을 발견했는데 휴식 시간이었다. 호토는 야마나시 현(山梨県)의 명물로, 이 호토가 바로 오늘 저녁에 먹을 '특별한 음식'이다. 일본인 친구로부터 코후의 유명한 호토 음식점을 소개받아 같이 가기로 했으니 지금은 배를 비워두어야 한다.


시모스와 역에 들어오는 특급 아즈사(왼) 카미스와 역 홈(오)

이제는 스와를 떠날 시간이다. 16시 10분에 출발하는 신주쿠행 특급 아즈사 44호를 타고 카미스와에서 코후로 향한다. 평일 오후 시간대라 그런지 열차는 만석,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하이볼을 마시며 노트북을 열고 업무를 하고 있었다.


만석의 특급 아즈사 호

실제로 츄오선 특급 아즈사・카이지는 비즈니스 수요가 상당히 많다. 유동인구가 많은 타마(多摩) 지역과 같은 수도권 베드타운과 유라쿠쵸, 신주쿠, 나카 등의 도쿄 중심가를 한 번에 이어주는 츄오쾌속선(中央快速線) 연선을 지나는 특급이기 때문이다. 특급 아즈사・카이지의 일일 왕복 횟수가 무려 30회인데, 이외에도 여러 특급, 쾌속 등급의 열차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도쿄에서 가장 혼잡한 노선으로 손꼽히는 츄오쾌속선의 입지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스와보다는 도시 풍경인 코후.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던 탓에 다리가 피곤해 열차 안에서 잠을 청했다. 원래 예정 시간은 50분 정도였지만 나카노역에서 발생한 인신사고로 뒤의 열차가 쭉 지연돼 40분이나 더 걸려 도착했다. (일본의 수도권에서는 전철에 투신 자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지만 '인신사고'로 표시한다.) 이제는 내게 너무 익숙한 열차 지연이지만 이번에는 원래 열차 시간에 맞춰서 온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이전에 특급 아즈사를 타고 코후를 지나며 본 후지산.

야마나시 현의 현청 소재지이자 가장 큰 도시인 코후는 스와에 비해 훨씬 도시 구색을 갖춘 모습이다. 코슈 가도의 중턱이자 후지산과도 가까운 지리적 유리함으로 코후는 수도권에서 후지산에 접속하는 가장 빠른 길 중 하나로 통해 관광객도 많다. 다행히 그 음식점은 역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가게 앞에서 기다리던 친구와 만나 바로 자리에 앉았다.


다소 오래돼 보이는 가게.

가게의 모습은 상당히 오래된 느낌이다. 가게 앞에는 야마나시 현 특산품으로만 요리한다고 적혀있었다. 소도시의 음식점에는 오사카나 도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다국어 메뉴판은 일절 없다. 하지만 이것 나름대로 매력이다. 분명 같은 요리지만 사투리로 적혀있거나 지역 특산 요리에 대해 알 수 있어 흥미롭기 때문이다. (ex, 홋카이도에서는 닭튀김을 잔기(ザンギ)라고 부른다.)


국물이 예사롭지 않다.

호토의 첫인상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냄비인지 그릇인지 애매한 용기에 담긴 국물의 비주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젓가락을 넣어보면 넓고 길쭉한 면이 나온다. 식감은 수제비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국물이 굉장했다. 미소 된장 베이스에 갖가지 신선한 채소와 버섯 향이 우러나 입 안에서 풍년이 드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부드러운 고기와 감자까지 들어있으니 이 얼마나 혜자스러운가.


사실 별로일 줄 알았는데...

여행을 다녀오고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생생히 기억난다. 면이 불면서 걸쭉해진 국물이 무르익은 분위기와 딱 맞았다. 일본식 오뎅처럼 국물이 스며든 건더기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게 포인트인 것 같았다. 친구가 주문한 기린 맥주, 가벼운 알코올로 하루를 되돌아보며 마무리했다.


한참 떠들고 나오니 벌써 어두워졌다.




에필로그

나가노에서 시작해 마츠모토 성, 스와 대사를 보고 코후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은 후 도쿄로 돌아왔다. 줄곧 내리던 큰 비 때문에 아쉬웠던 나가노에서의 일정을 만회하기 위해 급조된 여정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면 그 나라를 여행하면서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를 듣고 더 다양한 시각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브런치스토리에 일본 전국 철도 일주를 다녀온 뒤 있었던 이야기를 느긋하게 풀어갈 생각이다. 이번 편에서 소개한 이야기는 신사 이곳저곳에 적힌 전설과 <고사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화이며 필자는 일본의 신토 사상을 비롯한 어떤 정치적, 종교적 이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밝힌다. 극 이과인 사람이라 다소 어색하고 부족한 글이지만 한 명이라도 내 이야기를 읽고 같은 여행의 기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작은 만족감으로 써 나가려 한다. 온라인 매거진에서 쓰던 남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시선이 아닌 내가 경험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래 사진은 지난겨울에 와서 본 스와 대사 하사추궁의 모습이다.

Next, #002 동쪽 끝의 마을, 쿠시로와 네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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