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名으로 산다는 것: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가 살아가는 법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십여 년 전 마이너 문학상을 수상해 한 권의 책을 낸 이력이 전부인 무명작가이다. 호구지책으로 사설탐정―이래봐야 기껏 불륜현장의 뒤를 캐거나 잃어버린 개를 찾는 일을 주로 하는, 심부름센터에 가까운 흥신소 직원―으로 일하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을 위한 자료조사를 하는 거라 우기고, 그나마도 조금 돈이 생기면 곧장 경륜장이니 빠칭코에 가 날려버린다. 아내에게는 이혼 당했고, 한 달에 한 번 아들을 보려면 양육비를 내야 하는데, 집세나 공과금도 밀린 마당에 녹록지가 않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 중에 돈이 될 만한 건 없는지 슬쩍 뒤져보려 어머니 집을 기웃거리는가 하면 원조교제를 한 고등학생의 돈을 삥땅하기도 한다. 부잣집 아들이 돈을 건네며 경멸스런 눈길로 “난 당신 같은 어른은 되기 싫다”고 하자 이전에는 난처할 때마다 머쓱하게 웃거나 말꼬리를 돌릴 뿐 좀처럼 화를 내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료타는 처음으로 발끈하며 외친다. “건방진 자식 같으니, 원하는 어른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을 줄 아냐!”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작 <태풍이 지나가고>는, 대책 없고 한심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지경으로 꼬여 ‘아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생각이 들 때, 이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정도나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폭풍 같은 청춘기를 거치고 나면 삶이 어린 시절 꿈꾸던 것과 다르며, 자신의 재능이나 열정이 그렇고 그런, 대단치 않은 것이었던 데다 그마저도 이제 바닥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맞닥뜨린다.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는 평범한 사회인의 삶 대신 예술이나 창작, 즉 어느 정도의 신념과 타인의 인정을 함께 요하는 길을 택했을 때 더욱 극심하다. 차라리 애초부터 정해진 레일 위를 따라가는 고만고만한 삶을 꿈꿨다면 덜 괴로울 텐데, 료타처럼 젊은 시절 어설프게 단 한 번 재능을 인정받는 경우는 그게 도리어 화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열정과 영감을 연료로 달려가는 삶에서 영원하지 않은 질풍노도의 ‘태풍’이 지나간 후의 폐허에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 1번. 다자이 오사무처럼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며 그만 산다. 2번. 닐 영의 말대로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라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벽에 X칠할 때까지 꿋꿋이,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며 끝까지 버틴다. 3번. 나의 범상함을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과정 자체를 즐기며 살아간다.
1번은 죽음의 행위까지 작품세계를 이루는 일부(이자 피날레)가 되어버리는 듯해 뭔가 가장 드라마틱하고 예술가스러우나 ‘무명’들에게는 유효하지 않은 방법인 것 같고. 2번 역시 팬이건 가족이건 자신을 인정해주는 최소한의 지지자들을 필요로 하며 생전에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계속 자기방식을 고수하려면 범상치 않은 멘탈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쉽지 않아 보인다(고흐도 동생 테오가 지극정성으로 후원했으나 정신병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하지 않았는가). 결국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세 번째 방법을 기조로 그다지 즐겁지도 변변치도 않은 남루한 일상 속에서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기쁨의 크기가 손에 잡힐 만큼 아주 작고 사소하며 구체적인 무엇이라는 점이다.
영화에서 료타의 엄마 요시코는 ‘행복은 뭔가를 포기해야 간신히 손에 받아볼 수 있는 것’이라든지 ‘남자는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지’와 같은 명대사를 무심한 듯 툭툭 내던진다.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깊이 사랑한 적 없지만 그래서 살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녀에게, 행복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며 연하게 물에 타서 얼린 칼피스를 조금씩 스푼으로 갉아먹듯 현재에 충실한 와중에 맛볼 수 있는 소소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이혼 전에는 가족에게 신경도 쓰지 않다가 이제 와서 아내와 새로운 남자친구의 뒤를 밟는다던가, 만화작업을 제안하는 출판사측에 새로운 작품이 거의 완성되어간다고 허세를 부리고 생활비도 제대로 융통하지 못하면서 경륜장에 달려가 돈을 걸 때만 살아있음을 느낀다느니 하는, 한마디로 ‘뭣이 중헌지도 모르는’ 료타와 대조된다.
평생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를 보며 어릴 때 지방공무원이 되고 싶다던 료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 전반에는 다소 운명론적인 정서가 흐른다. 전당포를 들락거리며 시대 탓만 하던 아버지를 절대 닮지 않겠다던 료타의 모습은 아버지를 꼭 빼닮아 있으며, 그는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다며 안전한 포볼을 노리는 아들 싱고에게 ‘복권은 도박이 아니라 꿈’이라며 복권 사는 법을 알려준다. 어쩌면 실속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귤나무 같은 사람과 땅에 뿌리를 깊게 박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건실한 어른’으로서 적극적으로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사람은 애초부터 종자가 다를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전작들에 비해 시종일관 친절하고 직접적이다가도 결말에서만큼은 말을 아낀다. 아들과 며느리의 재결합을 은근히 바란 할머니 요시코의 기대와 달리 밤사이 태풍을 함께 겪은 가족은 다음날 아침 날씨가 맑아지자 각자의 길로 떠난다. 쿄코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싱고의 손을 잡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료타 역시 드디어 과거의 영광과 미련에서 벗어나 현재를 받아들이고 미래로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태풍이 지나가고>는 한 철없던 남자가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이야기로 볼 수 있으며, 부모라고 해서 늘 어른이 아니라 자식과 함께 계속 커나가는 것이라는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결을 같이한다.
결국 영화는 꽃도 열매도 피지 못한 귤나무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다소 투박하고 미지근한, 그러나 작고 확실한 위로를 건넨다. 어차피 예술은 승자들의 기록이 아니니까. 대체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는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무명無名들의 이야기니까. 그래서 승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그나마 목소리가 무지 큰, 아내 료코의 새 남자친구밖에 등장하지 않는 이 변변치 못한 무명들의 영화는, 몇 가지의 뚜렷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꽤나 사랑스럽다.
p.s. 영화의 원제는 등려군의 노래 ‘이별의 예감’의 가사이자 요시코 할머니의 대사에서 따온 <바다보다 더 깊은海よりもまだ深く>이라고 한다. ‘태풍’을 누구나 언젠가는 거치는 시기적인 것이라 한다면, ‘바다’의 깊은 수심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과 들어가 보았지만 이제는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지 않을까. 어느 쪽이 나을지는 모르겠다. 그게 애초에 개인의 선택이 가능한 영역인지 아닌지도. 아무튼 분명한 건 바다 깊은 곳에 다녀온 사람과 태풍을 건너온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거겠지. 그래서 당분간은 가족 이야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감독의 다음 이야기가 몹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