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민트-홍콩 누아르 형식으로 재탄생한 베를린의 세계관

by 민물장어

영화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빠질 수 없는 영화 <베를린>의 후속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다. 류승완 감독은 이전까지 비교적 저예산의 ‘가성비 액션’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었다. 그런 그에게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베를린>의 대성공은 그를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작품에서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찍은 <베테랑>을 통해 본격적으로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즉,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이 본격적인 흥행감독으로 도약하는데, 시발점이된 중요한 작품이다. <베를린>은 남북을 소재로 한 첩보물이었지만, 액션 스타일과 촬영기법, 유럽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스토리 등에서 ‘본’ 시리즈와 유사하다는 평을 받았다. 대놓고 “한국형 본 시리즈”라고 불리우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들던 새로운 액션 스타일을 선보였다. <베를린>은 주인공 표종성이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상태에서 홀로 복수를 향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며 끝을 맺는다. 애초에 시리즈로 기획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마무리였다. 그러나 후속편은 몇 번 시도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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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속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잊혀질 무렵, 류승완 감독은 <베를린>의 세계관과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휴민트>를 13년 만에 내놓았다. <휴민트>는 극 중에서 <베를린>의 주인공 ‘표종성’을 언급하며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서사와 등장인물 관계에서도 <휴민트>는 <베를린>과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북한에서 중앙당과 상관없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당 간부의 음모를 남과 북의 요원이 협력해 응징한다는 점, 그리고 그 사이에 북한 요원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그래서 <베를린>의 인물들과 <휴민트>의 인물들은 역할이 1대1로 매칭된다. 즉, 과거 자신이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도약한 작품의 뼈대를 13년이 지난 지금 다시 꺼내, 다른 스타일로 변주해 낸 영화가 <휴민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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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 ‘본’ 시리즈를 연상시켰다면, <휴민트>는 80년대 홍콩 누아르의 정점 중 하나인 <첩혈쌍웅>을 연상시킨다.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있는 두 남자가 특정 범죄 집단에 맞서 싸우고, 그 사이에 지켜야 하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서사 구조는 <첩혈쌍웅>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류승완 감독은 <베를린>의 세계관과 서사 구조를 현재에 재소환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열광하던 홍콩 누아르의 정점 <첩혈쌍웅>의 스타일로 이를 재구성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한다. <휴민트>의 액션 시퀀스는 80년대 홍콩 누아르처럼 멋스럽고 처절하게 그려진다. 특히, 마지막 총격 시퀀스에서 남과 북 두 남성의 협력은 <베를린>에 비해 더 진하게 그려진다. 다만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소위 말해 ‘후까시’가 진뜩 들어간 총격 액션이 다소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단 2명이 러시아와 북한의 훈련된 수많은 조직원들을 상대하는 내용, 아무리 총을 맞아도 계속 움직이는 주인공, 총알이 빗발치는데도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총질을 해대는 주인공의 모습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설정이다. <베를린>에서도 2명이 북한과 아랍 조직원들을 상대하지만, 북한과 아랍인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구도였지 <휴민트>처럼 단 두 명이 전체를 상대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이것이 홍콩 누아르 스타일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소 촌스러운 영화로 보일 여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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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에 대한 빈약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서사 구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고, <베를린>에 비해 이해하기도 쉽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서사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남한 요원 조과장(조인성)과 북한 요원 박건(박정민),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감정의 끈을 쥐고 있는 채선화(신세경) 사이의 관계 설정이 공감을 얻기에는 너무 병렬적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영화에는 크게 두 갈래의 감정선이 있다. 먼저, 조과장과 채선화화의 관계다. 조과장은 과거 자신의 휴민트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사망하게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채선화의 안전과 약속 이행에 큰 의무감을 가진다. 즉, 이 관계에서의 감정선은 휴민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의리, 미안함(죄책감)이다. 다음으로 박건과 채선화의 관계다. 이 둘은 과거에 헤어진 연인으로 둘 사이에는 영화 <어쩌면 우리>에서와 같은 애틋한 감정선이 흐른다.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기 쉬운 건 대체로 후자(멜로)다. 보다 익숙하고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2개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선을 다소 병렬적으로 다룬다. 아니, 오히려 조과장과 채선화의 감정선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제목이 <휴민트>이며, 조과장을 연기한 조인성에게 비중이 더 실리있기 때문이다. 더 임팩트가 있는 감정선은 연인간의 애틋한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이 보다 휴민트에 대한 연민을 더 중요하게 다루다보니 관객들이 감정 이입을 해야할 대상을 헷갈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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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베를린>처럼 박건–채선화의 관계를 더 전면에 두고, 조과장이 그 커플을 둘러싼 보조 감정선으로 정리되었다면 어땠을까 한다. <첩혈쌍웅>이 진한 멜로 액션으로 기억되는 것도 주윤발–엽천문의 관계를 메인 감정으로 두고, 형사 이수현은 그 관계에 공감하며 같은 편에 서는 감정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역시 표종성(하정우)–련정희(전지현)의 관계가 메인이고, 정진수는 보조로 설정되었기에 마지막의 멜로가 더 비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공감을 살 수 있었다. <베를린>이 하정우(표종성)의 서사를 메인으로 세운 것처럼, <휴민트>도 박건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더 선명하게 정렬했다면 관객이 공감하기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랬다면 제목부터 바뀌고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휴민트〉를 꽤 재미있게 봤다. 80년대 홍콩 누아르에 열광하던 시네 키드로서, 이 영화가 내뿜는 ‘후까시’는 나를 당시의 감성으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류승완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현대 첩보의 뼈대 위에, 오래된 누아르의 멋과 비극을 다시 얹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면에서 류승완 감독은 성공한 덕후로서 충분히 성공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칭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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