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E Feb 25. 2021

비엔나가 우릴 왜 기다려주겠어?

빌리 조엘은 틀렸다. 여긴 혼자 제멋대로 바쁘다.

Slow down, you crazy child.
Take the phone off the hook and disappear for a while.
It's all right you can afford to lose a day or two.
When will you realize Vienna waits for you?

Billy Joel, Vienna


누가 봐도 여행에 최적화된 시간표. 월수 강의는 자주 쨌다.

    양심 없는 내가 독일에서 수강신청한 강의는 GPA로 환산해봤자 12.8학점에 불과한 4.5개. 그것도 수요일 저녁의 0.7학점짜리 세미나는 격주로 진행되니 (그래서 0.5개로 친다) 그 세미나가 없는 주는 화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밤까지 5일이 꼬박 빈다. 내가 교환 생활 내내 다른 교환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너는 맨날 여행 다니고 있더라. 대체 어딜 그렇게 다닌 거야?" 하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개강을 하고 2주만에 또 비엔나로 여행을 떠난 것도 그런 시간표 덕이 컸다.


    19년 10월 23일 수요일 아침. 아침으로는 빵을 반으로 갈라 REWE에서 산 숙성연어와 아보카도, 구운 양송이버섯, 야채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든 후 키친타올로 싸서 음식물쓰레기용 종이봉투에 넣어 포장하고 (여행 때마다 이 봉지를 사용했는데 꺼낼 때마다 매번 쓰레기통을 뒤져 먹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또다시 캐리어를 끌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유레일패스를 사용 가능한 날 수가 이틀 남았으니 알차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환승지인 뉘른베르크로 향하는 열차는 8시 38분 출발. 그리고 기숙사에서 역으로 직행하는 버스를 놓친 내가 밤베르크 역에 도착한 시각도 8시 38분. 캐리어를 끌고 숨가쁘게 달렸는데 눈앞에서 열차가 떠나가고 있었다. 오~ 이번엔 아예 여행 시작부터 바보짓을 했는데~~~? 하지만 자학한다고 떠난 열차가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냥 그러려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멍하게 앉아 샌드위치나 까먹으며 역에서 1시간을 보냈다.


혼자 여행할 때 가장 좋은 점은 아무리 내가 멍청한 짓을 저질러도 나 혼자만 괴로워하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9시 38분, 드디어 뉘른베르크행 열차를 탔다. 밤베르크에서 뉘른베르크까지는 40분이면 도착한다. 거기서 플랫폼을 바꿔 10시 30분엔 드디어 비엔나행 열차 탑승. 가는 길엔 중학생 때 좋아했던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봤다. 와 어떻게 이런 걸 좋아했지? 하는 마음 반 그때 내가 왜 좋아했는지 알겠다, 싶은 마음 반. 비엔나에 도착하면 중학생이던 나의 로망에 호응해준단 마음으로 주인공 커플이 들른 장소를 순회해볼 생각이었지만, 나는 예쁜 사람이 보이면 얼굴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다. 결국 줄리 델피 얼굴만 보다가 인상깊은 장소 하나 남기지 않고 영화가 끝났다.


지나치는 순간 첫사랑의 기억으로 남아버리는 줄리 델피와, 역에서 나와 마주친 거리 풍경


    비엔나 중앙역은 꽤 넓다. 캐리어를 보관해둘 락커를 찾는다고 역사를 두 바퀴 돌다가 겨우 찾았다. 짐을 맡겨두고 나오니 어느덧 오후 3시 50분. 진노랑색의 햇살이 색색깔로 새로 칠한 낡은 아파트 위로 비치고 있었다. 길을 건너 지하철을 타고 우선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한다. 교통권은 OBB 앱에서 구매. 비엔나 교통권 역시 소지 및 개시만 해두었다가 표를 검사할 때만 꺼내 보여주면 됐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후문(남문)에서 바라본 벨베데레 궁전


    Wien Quartier Belvedere 역에서 내려 후문으로 들어가자 각잡힌 후원이 나오고, 철문을 통과하면 궁전 너비의 거대한 수반 너머로 벨베데레 궁전이 보인다. 궁전을 개조한 미술관은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우선 느긋하게 감상할 시간이 남지 않은 관계로 궁전을 통과해 드넓은 정원을 한 바퀴 돈다. 벨베데레 궁전은 상궁Oberes Belvedere와 하궁Unteres Belvedere이 있는데, 더 유명하고 큰 쪽은 정원 남쪽, 가운데에 위치한 상궁. 보통 이쪽이 벨베데레 궁전이라고 불리는 건물이다.


    정원은 수반을 배경으로 궁전의 물그림자를 찍거나 셀피를 찍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날이 생각보다 더워 안에 받쳐 입은 히트텍을 대충 벤치에 앉아서 벗어 가방에 넣었다 (그거 알지 여고생들의 옷 안으로 옷 갈아입기 스킬). 하궁 근처에 적당히 후문이라도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정원을 걸었는데, 막상 보니 문이란 문은 다 막혀 있는 통에 시간만 허비하다 정문으로 돌아나와야 했다. 벌써 슬슬 해가 기우는 기미가 보인다. 걸음을 재촉하다가 뉘른베르크에서 산 플로피햇을 잃어버렸다. 좀전까지 분명히 손에 들고 있었는데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다.


빈 시가지 (힙 ★★★☆ < 단순 낡음 ★★★★☆)
카를 성당, 그 앞의 광장과 그냥 돌무더기 같은 호흐슈트랄 분수


    빈의 건물은 투박하거나 지나치게 중세풍인 남부 독일보다 확실히 화려하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확장된 듯 넓은 폭의 도로와 아스팔트 포장, 힙과 단순히 낡음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듯 휑한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이진 않다. 호흐슈트랄 분수Hochstrahlbrunnen는 유명세에 비해 크게 인상에 남지 않는 곳이다. 왜 유명하지. 역사적 의미라도 있는 곳인가. 길 건너 카를 성당Karlskirche도 잠시 들렀다가 앞에서 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비엔나 중심가, 구시가지로 걸음을 옮겼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 모퉁이와 카페 티롤러호프

    빈 국립 오페라극장은 슬쩍 지나치면서 봐도 유명세에 걸맞게 화려하다. 궁전보다도 더 궁전 같다. 지나가는 내내 티켓을 파는 호객꾼들이 내 관심을 끌려 애쓴다. 니하오! 니하오! 내가 인상을 찌푸리니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콘니치와? 하고 묻는다. 얼굴을 더 구기며 지나치자 아..안녕하세요? 하고 뒤에서 자신 없이 부른다. 인사말 3단 변화가 어이없는 와중에도 웃겨서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입안을 콱 깨물었다.


    길 건너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앞에 두고 카페 티롤러호프Cafe Tirolerhof가 있다. 동유럽 여행안내 책자에도 나오는 꽤 유서 깊고 유명한 카페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도 빈의 다른 유서 깊은 카페들처럼 유명인들이나 무슨 철학자들이 자주 들른 곳이겠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오스트리아는 자허토르테와 아인슈페너가 유명하지만 메뉴판에서 대충 자허토르테랑 비슷한 거겠지 싶은 마음으로 자허슈니테Sacherschnitte와, 에스프레소에 럼주를 넣고 휘핑크림을 얹은 피아커Fiaker를 주문한다.


    사실 비슷한 아이리쉬 커피조차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앗 카페인이 절실한데 알코올도 쫌 필요한 듯! 하고 술과 커피 둘 다 마시고 싶을 때만 가끔 주문하는 메뉴라서 마실 때면 늘 취향이 아닌 맛에 조금씩은 후회한다. 하지만 이날 피아커를 주문할 때 그랬듯 쓰고 뜨겁고 입안에 확 화한 기운이 번지는 카페인과 알코올의 조합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한 모금 마시니 벌써 몸이 따끈해지는 느낌이다. 알고 보니 자허토르테와 모양만 다를 뿐이라는(정확하지 않음) 자허슈니테도 맛있게 먹긴 했는데 만든 지 시간이 좀 된 듯했고... 왜 이렇게 유명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디저트가 너무 맛있는 건가.


    잠시 앉아 노트에 메모를 끼적이다가 계산하기 위해 종업원을 불렀다. 아직 팁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계산서에 팁이 포함된 건지 아닌지 물었더니,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라 한다. 잔돈도 애매하게 남고 퍼센트 계산도 안 돼서 그냥 잔돈은 됐다고 말하며 13유로를 지불했다. 종업원의 얼굴이 매우 환해지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어, 또 돈도 없으면서 호구짓한 건가, 뒤늦게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며 그날 쓴 노트를 다시 읽어보았다. "분명 그만한 가치는 아닌 것 같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만해도 나쁘지 않다."


    그렇군. 명백한 호구의 마음가짐이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로 나와 구시가지를 한참 헤맨다. 슈테판 대성당은 외관부터 미친듯이 화려해서 보는 것조차 좀 황송한 마음이 든다. 내부 역시 엄숙하고, 캄캄하고, 모든 게 높아서 좀 무섭다. 안에선 숨도 조용히 쉬어야 할 것 같다. 바실리스크상과 바실리스크 그림이 있다는 골목에 들어갔는데, 정말로 그게 다였다. 작고 어설프고 못생긴 조각상 하나, 벽면에 그려진 달걀 하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아, 레스토랑은 많다. 안에 들어가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역시 음식 가격과 팁까지 감당할 자신은 없다.


슈테판 대성당. 외관을 찍고 싶었는데 괜찮은 사진을 건지지 못했다.
바실리스크 어쩌구들이 위치한 골목. 가운데는 바실리스크 그림, 오른쪽은 바실리스크 상.


빈 거리와 수로, 수로 옆 그래피티들


    강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지도를 보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보이는 건 강이라기보다는 좁은 운하나 수로에 가깝다. 이제 와서 지도를 들여다보니 거기가 비포 선라이즈 촬영장이랑 가까웠던 모양인데... 그땐 그런 것도 몰랐으니 그저 허무할 뿐. 나름대로 분위기를 내려 했는지 좁은 다리마다 빨갛고 파란 네온사인색의 조명을 켜뒀는데, 수로 양옆 벽에 빼곡히 채워진 그래피티랑은 나름 어울렸지만 정작 다리는 싸구려 플라스틱 모형처럼 보였다. 그래피티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꽤 퀄리티가 높다. 예술작품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해가 저물어버린 7시, 이제는 집에 가야 할 시간, 근처 마트에서 3유로짜리 아무 빵이나 사들고 다시 캐리어를 찾으러 중앙역으로 향했다.


    그날 나를 재워 주기로 한 건 교통편이 극악인 비엔나 외곽지역 아파트에 사는 한 커플. 율리아가 카우치서핑에서 내게 먼저 연락을 보냈다. 프로필 사진은 브로콜리를 들고 약간 똘끼가 느껴지는 표정의 맨얼굴, 써놓은 프로필을 읽어 보니 정작 본인은 좀 내성적인 편이라고 한다. 그녀가 알려준 주소지대로 지하철, 버스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비엔나 시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산자락. 버스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알록달록 귀여운 아파트들이 나온다. 딱 봐도 지어진 지 10년 이내의 새삥 느낌. 가로등이 몇 없어 길은 캄캄하다.


율리아와 요하네스가 사는 집, 현관


    단지 안쪽 작은 아파트 안에 들어가 현관문 앞에 서자 괴랄한 닭 실사 발깔개가 문앞부터 나를 반긴다. 왜... 대체 왜...? 내가 머무는 건 현관 바로 왼편, 커플이 머무는 방 맞은편에 위치한 넓은 다용도실. 집은 신축답게 아늑하고 세련되었다. 조명과 오디오도, 발코니도 마음에 든다. 내가 미래에 집을 구한다면 이런 집에 살고 싶다. 빨래를 개다 나를 맞이한, 사진에서보다 300배는 예쁘고 잘생긴 율리아와 요하네스 커플은 (외모평가는 안 하고 싶은데 정말로 그랬다 어떻게 이름까지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간만에 맞는 손님에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나를 위해 이전에 머물던 카우치서퍼들이 선물로 주고 갔다는 초콜릿을 꺼내 준다. 나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한국에서 가져온 마스크시트와 밤베르크 훈제 맥주를 줬던 것 같다.


    한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둘 다 얘기 중에 자꾸 수줍게 눈을 아래로 내리깐다. 둘 다 스물아홉이라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귀엽지...? 빈에서 어딜 가보면 좋을지 물었더니 어디선가 지도를 들고 와서 보여준다. 행선지 추천은 사실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열성적이고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대부분 그날 이미 돌았던 곳들이나 너무 먼 곳을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각각 빈의 공무원과 회사원. 보통 9시 반이면 잠들어서 새벽 6시에 출근한다는 소리를 듣고 기함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슬슬 두 사람이 잠들 때가 된 것 같아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매트리스는 푹신하고 이불도 부드럽다. 창고방에 가깝게 쓰고 있는지 여기저기 널린 안 쓰는 쿠션은 역시 기괴하다.


어째선지 촉촉한 눈을 한 라쿤 실사 쿠션과 롤랑 바르트에 대해 한창 서치하던 여행 중의 나...


    밤베르크 대학에서의 첫 팀플 발표까지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행을 와서까지 내가 맡은 자료를 더 모으고 PPT를 만들고 대본을 써야 한다. 당장 드러누워 자고 싶지만 사온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논문을 검색했다. 아 슬퍼라.


    



아파트 창밖 풍경과 아파트 뒷산 산책로.


    새벽 6시가 되기 15분 전.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현관문이 여닫혔다. 6시 출근이란 말을 듣고도 기겁했는데, 심지어 그것보다도 이르게 나간다니. 누운 채로 한참을 뒹굴거리다가 거실로 나와 보니 이미 아침 해가 떠 있다. 산골짜기에 있어서인지 전날 밤에는 사방이 캄캄했는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단지는 산뜻하고 귀엽다. 두 사람이 미리 주고 간 열쇠로 문을 잠그고 나가 아파트를 두른 언덕을 느긋하게 걸었다. 노랗게 낙엽 깔린 숲길은 평화롭고 서정적이다. 살짝 서늘한 바람마저도 상쾌한 공기를 머금고 있다.



Wasserweg 아파트단지


    전날 밤 들어온 대로 길을 쭉 돌아 내려오는 길, 낮은 아파트 건물 사이로 놀이터가 보인다. 아이들이 전날 놀다가 내팽개쳐 둔 장난감 포크레인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갓 결혼한 부부가 비엔나 시내로 진입할 돈을 모으며 첫 집으로 살기 딱 좋아 보이는, 마음 따뜻해지는 음... 아파트단지. (차마 마을이라는 말은 못 하겠다. 여긴 정말 산자락 한복판에 덩그러니 아파트만 있는 곳이라서...)


    이날은 카우치서핑으로 연락한 클라라와 만나기로 했다. 우선 전날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벨베데레 궁전 앞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클라라는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을 다니다 교환학생으로 폴란드에 와 있는 나보다 한두 살쯤 많은 친구. 그녀 역시 카우치서핑으로 한 현지인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땋은 머리에, 꽤 체구가 작은데도 왠지 모를 기백이 느껴져 풍채가 당당해 보인다. 정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미술관을 꼭 들르고 싶은 나와 달리 클라라는 그런 데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쪽.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어주다가 결국 헤어져 나 혼자 벨베데레 미술관 티켓을 샀다.


벨베데레 미술관 로비 천장과 발코니 너머 정원 풍경
왼쪽은 한스 마르크트, 가운데와 오른쪽은 클림트


    역시 오스트리아, 역시 궁전이라 그런지 들어가자마자 천장부터 놀랍도록 화려하다. 처음엔 부조 작품 여러 점과 바로크 시대 작품들이 나오고, 이어 금박과 색채가 아름다운 한스 마르크트의 작품을 중개하듯 거쳐 클림트가 등장한다. 재질부터 화려한 클림트의 작품은 역시 매혹적이고, 작품마다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찾아보는 재미도 있지만, 그가 그리는 여성이 하나같이 멍한 눈에 300년째 오르가즘 중인 듯 섹슈얼한 표정을 짓는 걸 계속 보고 있자니 상당히 질린다. 아니, 좀 역겹다.


에곤 쉴레의 유명한 자화상


    다음으로는 에곤 쉴레의 작품이 나온다. 쉴레는 중학생 때 상당히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의 외설적 표현이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과 자유를 그 누구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툭툭 마디가 불거진 선과 부패한 듯한 색채에서 느껴지는 고독을 좋아했고, 그래서 성기를 드러낸, 또는 성기 그 자체인 여자들을 보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쉴레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 모든 것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호의적으로 이해해보고자 애썼다. 그때의 나는 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이상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내면화하려 애썼으므로.


    그의 그림은 여전히 독특하고 흥미롭지만 이제는 이 작품들이 담긴 가치와 별개로, 혹은 그 가치 이상으로 이 그림이 착취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 내가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느낀 거리낌이 단순히 내 보수성에서 우러난 불편함이 아니라 모욕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안다. 쉴레를 지나쳐 풍경화, 오리엔탈리즘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 몇 점, 초현실주의 작품을 거치면 금세 출구.


클라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탄 트램 안에서


    미술관을 나오기 전 클라라와 연락해 점심 약속을 잡았다. 서로 구글맵으로 레스토랑을 알아보다가, 그냥 간단한 핫도그를 파는 임비스Imbiss(테이크아웃 전문 간이 음식점) 앞에서 만났다. 나는 흑맥주를 부어 구웠댔나, 여튼 맥주 어쩌고 하는 설명이 나와있는 핫도그를, 클라라는 칠리를 고른다. 어디서 먹을까 헤매다가 근처 골목의 건물 계단에 주저앉아 먹기로 했다. 그녀는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연주회 팸플릿을 십수 장 늘어놓으며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 권유한다. 여기서 또 의견이 갈린다. 나는 미술작품이라면 기꺼이 돈을 내고 관람할 용의가 있지만 막귀다 보니 음악회는 좀 부담스럽다. 결국은 다시 헤어질 운명.


    어쨌거나 당장은 조금 더 걷기로 한다. 둘 다 비엔나가 생각보다 재미없는 도시라는 점에는 동의.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내가 어제 못 가본 도나우강에 가고 싶다고 우겨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다 보니 점심시간이라선지 교복처럼 보이는 각 잡힌 예쁜 옷을 입고 걷는 키 큰 학생들이 보인다. 지나치자마자 클라라가 나를 쿡쿡 찌른다. 쟤네 존나 잘생기지 않았냐며 만나보고 싶단 소리에 기겁해서(아마 자보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거겠지) "근데 쟤네는 미성년자잖아!" 하고 말했더니 그래봤자 우리가 쟤네보다 훨씬 어려보인다고 나를 타박한다. 여전히 미성년자를 대상으로는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은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조차 들어가는 술집마다 두 번에 한 번 꼴로 신분증 검사를 받고, 술담배를 살 때면 매번 신분증을 확인시켜줘야 하는 (특히나 머리 짧았을 때, 화장 안 하고 다닐 때) 신세. 반면 유럽에서는 6개월을 통틀어 두어 번이나 검사를 요청받았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오해하지는 않는다. 유럽인들 보기엔 '어 쟤 어려보이긴 하는데… 어차피 동양 애들은 하나같이 다 어려보이는데다 혼자 저렇게 다니면서 당당하게 술을 요구하는 걸 보면 어련히 성인이겠지…' 정도의 마음일 것이 분명하므로. 그런 필터를 빼고 보면 키도 작은 나는 얘네한테 한 열서너 살쯤으로나 보일까 싶다 (그래서 더더욱 초면에 내게 플러팅하는 유럽인들을 보면 소아성애자나 옐로우피버일 거란 생각에 으 하는 마음부터 먼저 든다).



    더 걷다 보니 Schottenring 역 너머로 도나우강이 보인다. 그냥 강이다. "허니, 아무리 봐도 여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잖아, 돌아가는 게 어때?" 하고 클라라가 묻지만, 어쨌건 나는 저기에 가야겠다고 우겼다. 결국 그녀는 그대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고, 나는 강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강둑에는 여전히 그래피티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알록달록한 게 꽤 예쁘다. 굳이 찾아가 볼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데나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며 멍하게 보기에는 딱 좋다. 음악에 관심 없는 관광객의 입장에선 지루하고 한가한 도시다.


    이쯤에서 다시 카뮈의 평이 생각난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만 없어도 조용할 것이다. 한데 가끔 잘차흐 강 위에는 지옥에 빠지는 돈 후안의 오만스러운 아우성이 흐른다. 빈은 더 조용해 보여, 도시들 중에서는 아가씨다. 그곳의 돌들은 3세기를 넘지 않았고 그곳의 젊음은 우울을 모른다. 그러나 빈은 역사의 교차로에 있다. 그 둘레에서는 제국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있다. 하늘이 피로 뒤덮이는 어떤 저녁이면, 링의 기념 건물들 위에 돌로 새긴 말들이 날아오를 듯이 보인다. 모든 것이 권세와 역사를 말하는 이 덧없는 한순간 속에서 기병대의 밀어닥치는 말발굴 아래 오스만 제국이 요란스레 무너지는 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다. 여기도 그래서 아무래도 조용하지가 않다.   

물론 사람들이 유럽의 도시로 찾으러 오는 것은 바로 이 속이 꽉 들어찬 고독이다. 적어도 제가 할 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어쨌거나 그건 남의 대륙 역사이므로 그 시끄러움에 내가 낄 틈은 없다. 빈은 조용히, 제멋대로 바쁘다. 정작 빈에 머무르는 동안은 듣지 않았지만, 혼자 강둑에 걸터앉아 강물 위로 다리를 흔들던 그때를 생각하면 빌리 조엘의 Vienna 가사가 떠오른다.


"When will you realize Vienna waits for you?"



    무슨 소리야, 우리를 기다려주는 비엔나 같은 건 없다. 이곳은 유럽인들에게는 젊고 우리에게는 이미 늙은 도시. 시간을 잊은 듯 오래된 카페가 즐비하지만 그곳에 내 자리가 있을지는 종업원의 마음에 달려 있다.






    뭘 할까 멍하게 고민하다가 신시가지에 가서 빈티지 의류점이나 구경하기로 했다. 구글맵에 가게 몇 개를 찍어두고 지하철을 탔다. 2-30분쯤 인파에 몸을 맡기면 금세 노이바우Neubau. 그럼 옆에 알트바우Altbau도 있나, 바우는 대체 무슨 뜻인가 생각하면서 거리를 거닐었다. 빈티지샵을 두세 곳 들렀지만 가격대는 폭리에 가깝게 높고 대부분이 중저가 브랜드 제품으로 특출나게 예쁘거나 독특한 옷도 보이지 않는다. 시가지는 깔끔하고 크리스마스 샵도 여럿 보이지만 흥미롭지는 않다. 클라라가 나더러 어디에 있냐고 묻길래 노이바우인데 일단 여기는 재미 없으니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답장했다.


    근처에는 ALT & NEU라는 이름의, 비포 선라이즈의 촬영지였다는 음반판매점이 있다. 엄마 줄 LP판이나 사볼까 싶어 들르기로 했다. 가는 길에 후기를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인들에게 에코백 성지로 유명하다 (한국인=에코백 러버들...). 일단 가서 뭘 하든 에코백은 사지 않기로 한다. 가게는 예상과 달리 한적하다. 잘 뒤져 보면 가격대 저렴한 CD가 많고, 소장가치 충분한 유명 음반의 LP판 및 포스터 등이 빼곡하다. 내가 가지고 싶은 해리 닐슨과 엘라 피츠제럴드, 엄마가 좋아하는 U2의 음반을 위주로 찾아보기로 했다. 꽤 괜찮은 CD를 몇 개 찾았지만, 하나같이 집에 이미 있을 것 같거나 (왕년에 음악감상실 DJ였던 아빠가 수집한 CD와 LP판이 집에 꽤 있다) 2CD라 예상보다 높은 가격대.  


Café im Raimundhof


    결국 빈손으로 나와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Café im Raimundhof"라는 이름의 귀여운 카페에 들어간다. 동네 청소년 몇몇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보드게임을 하고 있고, 호감 가는 인상의 중년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실내흡연이 허용되는 곳이라지만 한가한 시간대라선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다. 메뉴판을 보니 에스프레소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데, 가격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2.3유로, an der bar(on the bar)는 1유로. 가격 차이가 어마어마해서 사장님께 대체 무슨 차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좌석이 아니라 바 자리에서 마시면 1유로일 따름이라고 (띠용). 바로 바 자리로 옮겼다.


    자허토르테를 먹고 싶었지만 품절. 트레이에 레몬케익이 있길래 그걸 주문했다. 가격도 3유로 가량으로 저렴하다. 뭐랄까 맛도 분위기도 딱 동네 카페 느낌이다. 나오는 노래도 2000년대 중반에 흥했을 법한 정겨운 템포의 팝. Waldeck의 노래가 연달아 나오길래 Shazam으로 검색해다가 꼬박꼬박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주민들이 잠깐 들러 바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원샷하며 사장님과 짧게 대화를 나누다 간다.


    1시간쯤 머무른 카페에서 나와선 근처의 재래시장 나쉬마크트Naschmarkt로 향했다. 싸구려 의류매대와 향신료 가게, 과일가게, 와인판매점, 베이커리, 정육점이 좁은 길을 따라 쭉 이어진다. 관광객을 유혹하는 기념품샵도 있긴 하지만 시장 자체는 주민들이 장을 보러 나올 법한 규모에 딱 그 정도의 상품들이다. 월계수잎과 파프리카 가루가 보여 혹했으나 당장 사봤자 독일까지 다시 들고 갈 일이 번거로울 게 뻔하니 포기했다. 와인 한 잔 역시도 팁 계산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져 패스. 호객꾼들이 자꾸 (내가 중국인 아닌 걸 아는 듯이 불쾌한 웃음을 띤 얼굴로) 니하오를 외치지만 거기에 일일히 반응하는 것도 귀찮다.


    당장 할 건 없는데 그렇다고 율리아네 집에 돌아가도 할 게 없는 건 매한가지. 그냥 밤의 도나우강을 보러 지하철을 타고 다시 구도심으로 향했다. 내린 역은 강변을 마주하고 있고 꽤 큰 복합상가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슈베덴플라츠Schwedenplatz 역인지 그 옆인지 잘 모르겠다. 우선 근처의 마트에서 부리또 하나와 맥주 한 병을 사들고 강가로 내려갔다.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이 밝히는 길에는 사람도 벤치도 몇 없다. 그나마 있는 자리도 무리 몇몇이 차지하고 있으니, 나는 되는 대로 어둑한 잔디 위 용도 모를 원통형 기둥 위에 불편하게 걸터앉아 맥주를 땄다 (잘츠부르크에서 산 바이올린 모양 마그넷이 매번 유용하게 쓰인다).


그날 밤의 도나우강


    멍하게 맥주만 마시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길래 보니 남자 두 명이 뻘쭘하게 서서 독일어로 불 좀 빌려달라고 말한다. 당황해서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더니 영어로 다시 do you have light? 하고 물어온다. 기꺼이 가방을 뒤져 라이터를 꺼내주었다. 혹시 다른 목적이 있나 싶었지만 그냥 그대로 쭈뼛쭈뼛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공손히 돌려주곤 가버렸다. 또다시 혼자다. 폰을 보기도 질리고 따로 할 일도 없고, 어두워서 책을 읽지도 못한다. 폭이 넓은 도나우 강으로 슬슬 떠다니는 유람선, 오른편의 다리 위로는 불을 밝힌 전차가 지나간다. 꼭 밤하늘 위를 달리는 것 같다.


    이제 가을의 초입인데 머리 위에선 여름의 대삼각형이 여전히 반짝인다. 수능을 앞두고 집까지 걸어서 하교할 때 집앞의 공터에서 고개를 들면 늘 보이던 하늘. 서울보다는 별이 많지만 이곳 역시 대도시다 보니 큰 차이는 없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밤하늘 보기, 밤베르크에서 하는 게 훨씬 운치있을 강변 맥주 마시기. 이것밖에 할 일을 못 찾다니 나도 참 나고 빈도 빈이다. 시간도 늦었겠다 천천히 일어나서 다시 율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나를 재워 준 보답으로 선물할 겸 근처 꽃집에서 흰 꽃을 엮어 꽃다발을 샀다.


13유로. 유럽에서 산 꽃다발치곤 비싸지만 두 사람이랑 상당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빈에서 쓴 노트 끄트머리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오는 길에는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봤다. 영화는 이전만큼 낭만적이지 않고, 빈이라는 도시도 그때 내가 상상했던 곳은 아니지만. / 이곳에서 나는 혼자이되 적어도 외롭지는 않잖아."


    빈은 고독하지만, 외로움을 느낄 만큼 내가 섞여들 수도 없고, 타인의 부재를 떠올릴 만큼 조용하지도 않은 도시.

    이런 곳에서 안정을 찾은 걸 보면 아무래도 이때 나는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를 떠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