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난생 처음 해본 K-POP 아이돌 덕질에 관하여

by JUNE

1. 겨울 밤 한강진에서


2025년 1월 3일. 반차를 쓰고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나는 간만에 혼자 실컷 산책을 하고, 책을 사 일찍 집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고서 침대에 누웠다. 잠들기 전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SNS에서 민주노총 계정의 글이 보였다.



민주노총 @ekctu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한남동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다치지 않고’, ‘저들의 도발에 넘어가지도 않고’, ‘빌미를 주지도 않는’ 현명하고 용맹한 투쟁으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내겠습니다.



그 날은 동짓날 남태령에서의 추운 밤을 보낸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타임라인을 더 내려보니 경찰들의 압박이 시작되었다는 말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그때의 일을 복기하며, 얼른 한강진으로 모여야 한다고, 와 달라고 이야기 했다. 나는 모르는 척 하고 싶었는데, 수원에서 서울까지는 빨라도 한 시간 반이 걸리고, 나는 이미 화장을 지우고 침대에 누웠고, 창밖은 이미 어두웠고, 곧 눈이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나는 대선에서 그를 뽑지 않았고, 그럼에도 매 주말마다 수원에서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탄핵집회까지 나갔고, 처음 산 응원봉을 열심히 흔들며 케이팝을 불렀다. 매주 행진을 마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수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심지어 지금 나가면 밤 늦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조차 없다(존나 비싸니까). 나는 이 추운 날, 도로 한복판에 앉아 밤을 새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오늘 나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며,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울까지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저번 남태령 때의 후기를 참고하여 상하의를 각 다섯 겹쯤 껴입고, 큼직한 가방에 방석과 핫팩, 응원봉을 쑤셔넣고, 가방끈에 굿즈를 달고, 마찬가지로 굿즈 키링이 달린 에어팟을 주머니에 넣는 동안 애플워치에서 보이는 심박수가 무서울 정도로 올랐다. 지하철을 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그 겨울 목이 쉬도록 불렀던 민중가요(라고 할 수밖에)의 한 구절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그 날 내가 떠올린 건, 인생 처음으로 내가 사랑하게 된 K-POP 아이돌, 그러나 건강 문제로 활동중지 후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는 내 최애의 얼굴이었다.





2.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처음으로 응원봉을 들어올린 건 24년 12월 14일, 여의도에서 열린 탄핵집회에서였다(사실 탄핵집회가 시작하자마자 구매했다). 그러나 고작 그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중증 홍대병 환자로서, 매일 최소 5시간 이상을 음악만 들으면서도 평생 케이팝을 경멸해 왔으며 오로지 1990년 이전의 음악, 또는 인디 음악(심지어 지난 7년간은 아티스트명조차 읽을 수 없는 해외 인디)만을 음악으로 취급해왔다.


그러던 사람이 케이팝에 빠진 데에는 당연히 뉴진스와 에스파의 노래들로 인하여 인해 케이팝을 향한 심적 장벽이 낮아진 영향이 있겠으나, 내가 너무도 텅 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겠다.


나의 첫 직장이자 현 직장은 매월 법정 최대 표준외근무시간을 넘보거나 초과하는 비합리적 업무량을 강요하는 곳이었으며, 모든 시스템은 비효율적이었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어떤 시도도 수용하지 않았다. 입사 후 2년 간 나는 (코로나로 인한 재택) 업무시간 내내 펑펑 울고, 퇴근 후에도 울고, 주말에는 울면서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차츰 인력이 충원되고 시스템이라는 것이 잡히면서, 4년차가 된 내겐 더이상 한밤중에 갑작스러운 상사의 연락에 대응할 필요도, 야근을 상정하고 모든 평일 약속을 빼놓을 필요도 사라졌다.


그러자 삶이 공허해졌다.


나는 판교에 소재한 회사로 원활히 통근하기 위해 수원으로 집을 옮겼으며, 수원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밖에 없었고, 무리한 업무량에 대응하기 위해, 그리고 끔찍한 수준의 멘탈 컨디션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인간관계 또한 축소한 지 오래였다. 애초에 퇴근한 날 저녁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나... 딱히 할 것은 없었다. 모바일 게임(들)은 일일퀘스트만 깨고 나면 더 할 만한 컨텐츠가 없었고, PC 게임과 콘솔 게임에도 한동안 빠져 있었으나, 건강을 해칠 정도의 플레이타임을 기록한 후에는 자제하고 있었다.



나의 최애를 만난 건 하필 그 해 가을이었다.


그 애는 일단 외모부터 내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하였으며 (176cm의 남성. 뼈말라. 곧은 자세. 누가 봐도 여자처럼 예쁘다는 소리가 먼저 나오는 존나 잘생긴 얼굴), 심지어 얼굴보다 늦게 접하게 된 성격마저 내 취향이었다(예민하고 기준이 높지만 타인을 대할 땐 훨씬 유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노력파이며, 자존감이... 낮다고...?).


처음에는 그냥 예쁜 걸 보고 싶어서 자기 전에 사진을 몇 장 찾아보는 정도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돌이킬 수 없었다.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애초에 내게 그 아이돌을 처음 알려준 친구한테선 이런 말을 들었다.


너가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걸 처음 봐서 지금 신기하고 좀 놀랍고? 양철나무꾼이 사랑에 빠진 걸 보는 거 같아


그러나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는 더이상 사랑할 것이 없었으니까.


일은 즐거울 때도 많지만 차마 사랑할 수는 없었고(사랑했다간 매출 지표 볼 때마다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았고), 동료들은 좋아했지만 시기에 따라 거리를 두거나 싫어하게 되기도 했고, 친구들과 가족들은 너무 멀었으며,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던 고양이도 떠나 보내고 1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나한테도 애착을 가질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내 앞에 스스로를 깜고로 모에화하는 미소년이 나타났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을 쏟아부을 만한 것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