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 글은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에서 이어집니다.)
...라는 사춘기 때에나 할 법한 고민이, 케이팝 덕질을 시작한 후로는 부쩍 자주 찾아오곤 했다.
아이돌이란 뭘까?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걸까?
이게 사랑은 맞을까?
왜냐면 아이돌은 인디 아티스트들보다도 더욱, 그 개인만을 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대기업 소속 아이돌은 더더욱 그러했는데, 케이팝이 돌아가는 생리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들에게 자율성은 아주 드물게 허락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회사에서 짜준 기획대로, 의상팀이 컨셉에 맞추어 입혀준 의상을 입고,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샵에서 화장을 받고, 거대 자본이 투여된 노래와 춤을 연습했다(그 전까진 작사작곡을 직접 하는 사람만 좋아해와서 적응이 잘 안 됐음). 심지어 라이브 방송조차 멤버 개인이 켜는 건 허락되지 않았고, 오직 회사가 지정한 조합으로만 찾아올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의 캐릭터라는 것조차 일정 부분은 기획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사랑하는 걸 나의 최애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능한 걸까? 내가 사랑하는 건 개인으로서의 이 사람 자체일까, 또는 아이돌로서의 이 사람일까, 아니면 이들을 프로듀싱하는 회사일까? 내가 사랑하는 게 개인으로서의 이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수행(또는 프롬프트를 읽으며 연기)하는 순간의 모습들만 보고 있지 않아? 실제의 얘는 이때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고민이 드는 것은 (전직) 인디 리스너로서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고민은 지난 겨울, 앨범에 딸린 블루레이로 공개된 비하인드를 보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내 최애 그룹은 자컨(비하인드)의 양이 방대하고, 컨텐츠 속 멤버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솔직하게 잘 드러나기로 유명하며, 나 또한 그것을 보며 마치 그들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함께 활동을 한 것처럼 느끼곤 했다. 그런데 그 블루레이 안에는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하인드의 비하인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데뷔하기 전 무렵의, 그럼에도 이미 긴 분량의 비하인드로 모두 보았다고 느낀 순간의 그들이.
나는 이 날의 최애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는 영상 속에서 다른 멤버들과 내가 모르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고, 그 모습 자체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그 날의 그 애와 다를 바 없었으나...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은 이 날의 24시간 중 짧게 편집된 20분 내외의, 그것도 내 최애의 분량만 따지자면 5분이나 될까 싶은, 오직 회사가 허용하고 편집한 한도 내의 모습뿐이었다는 것을… 그것을 나도 모르게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까지만 사랑하는 것이 팬의 미덕일진대, 나도 모르게 그 수많은 비하인드 속에서 이 애를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뒤늦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대체 누구의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 걸까?
사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회적인 페르소나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교류하기 마련이다. 당연히도. 그렇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매일매일 비하인드 영상 속에서 만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의 그들을 보면서, 너무 큰 친밀감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아이돌 산업이 과몰입을 유도하는 영향도 컸다. 버블 같은 유사연애 서비스는 물론이고, 팬싸인회도, 공연에서의 멘트 하나하나도, 마치 팬과 아이돌이 연인처럼 친밀한 관계여야 함을 전제했다. 그리고 계속 버블을 구독하고, 음반을 종류별로 구매하고, 합리적이지 않은 단가의 굿즈를 무지성으로 사들이고, 콘서트 티켓을 결제하고, 그렇게 소비한 돈만큼 더 애착을 쏟도록 하는 이 괴상한 구조... 한 번 마음을 들인 순간,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과몰입 속에서... 보여지는 것 이상의 '진짜'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냐?(사생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왜 자꾸 '진짜'를 찾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진짜'임을 확인받고 싶을까?
어쩌면 그들이 데뷔 직후 낯을 가리던 극 신인시절, 무대에서 어색하게 반복하던 "(팬덤명) 사랑해요"라는 말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진짜'를 원하는 걸까? 또는 원해도 되는 걸까?
3개월만 최애를 못 봐도 시들해지고 조금만 살이 붙어도 마음이 흔들리는 이게 사랑일까?
네가 매일매일 뉴짤로 얼굴을 비추고 뼈까지 개말라 상태를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마르고 아름답고 소년과 청년 사이의 얼굴을 한 딱 지금 이맘때의 너를 사랑해…
이건 사랑고백보다는 마녀의 저주 같지 않나?
애초에 진짜 연애에서도 찾지 않는 진정성을, 고작 아이돌을 소비하며 따져서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말하고 끝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어쩔 수 없이 매사에 진정성을 따지는 사람이고,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순도 100%로 오직 사랑과 믿음만을 주고 싶으며, 내 무기력한 일상을 구원해준 이 애에게 진심을 다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던 모습마저도 사랑하게 되고, 그 꾸준한 마음에 다시 힘을 얻어 살아가고 싶었다. 금방 꺼져버릴 사랑이라면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단 한번 실제 얼굴조차 보지 못한 외사랑일지라도.
그러니, 지금 잠시 시들해진 이 고민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올 것이다.
사랑한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언제나 진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