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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Jun 24. 2023

아이 친구 엄마의 친절함 덕분에 살았다

어젯밤, 밥을 입에 물고 천천히 먹는 아이에게 화가 났다. 아이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그럴듯한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이는 울음을 꿀꺽 삼키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오늘 점심, 밥을 입에 물고 천천히 먹는 아이에게 화가 났다. 너 입에 밥 있다며 잔뜩 화를 던졌다. 아이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는 "밥 다 먹고 물풍선 놀이하자"라고 말했다.


밥을 꾸역꾸역 먹는 아이를 보며 온갖 비난의 말이 떠올랐다.

세월아 네월아 이게 뭐냐, 밥을 뭐 그렇게 먹냐, 한두 번이면 말을 말지 이게 매번 뭔 짓이냐.

밥을 먹는 아이 앞에 앉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도 맴도는 말을 꿀꺽 삼켰다.


"연아, 엄마는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내가 밥을 천천히 먹으니까."

"밥을 먹는 건 연이 일이잖아. 근데 왜 엄마가 화가 나지?"

"내가 밥 천천히 먹으면 엄마는 화가 나니까."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말은 못 하고 '엄마는 왜 화가 날까' 질문만 주고받다가 "얼른 먹고 그릇 가져와." 하고는 설거지를 하러 싱크대로 갔다. 개수대에 잔뜩 쌓인 그릇을 헹구고 프라이팬과 밥솥의 음식 찌꺼기를 수세미로 씻어냈다.


"힘들어서 그래."


아이가 밥을 입에 물고 있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이렇게 참지 못 할 정도로 화가 나는 이유는 하나였다. 피곤해서. 너무 단순하다 싶지만 진짜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아이의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밥뿐만 아니다.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쓰려는데 아이가 방해했을 때도 분노가 머리끝까지 타고 흘렀다. 잠자리 독서 그만 읽자는데 더 읽어달라며 투정 부릴 때도 극도로 분노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마친 아이가 마무리를 도와달라며 부를 때도 명치에서 화가 치밀었다.

 

"엄마가 이것 할 시간도 안 줘? 엄마가 피곤하다는데 이것까지 해줘야 해? 이만하면 됐지, 뭘 더 해달래?"


며칠 동안 계속되는 나의 절제되지 않는 분한 감정을 죄다 아이 탓으로 돌리며 합리화하고 있었다. 일곱 살인데 이건 지들(쌍둥이다)이 알아서 해야지, 일곱 살인데 엄마 좀 그만 찾아야지, 일곱 살인데 엄마가 싫다면 그만해야지. 일곱 살이 뭔 죄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덟 살 우리 학교 1학년 아이들은 귀엽다고 웃어넘기면서도 정작 우리 집 일곱 살 기린반 두 딸은 도무지 웃어넘겨지지가 않았다. 오죽하면 남편이 "당신이 예민하게 하더구먼"이라는 말을 덧붙였을까.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아이가 밥 다 먹었다며 그릇을 가져왔다.

"연이, 은이! 반찬 그릇도 다 가져와!"

두 딸은 식탁에 놓여있던 네다섯 개의 그릇을 차곡차곡 가져왔다. 퉁명스럽게 고맙다는 말을 내뱉고는 설거지를 했다. 그릇을 헹구며 무심히 말했다.

"설거지 끝내고 물풍선 놀이 하자."

엄마의 화에 눈치 보일 법도 한데 애들은 물풍선 놀이에 마음을 풀고는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토요일 한 낮, 물풍선 놀이를 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물풍선 놀이, 자전거 타기, 유아차 밀기 등 이런저런 놀이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넘었다. 내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고 언제 들어가자고 말하나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저 앞에서 들어오는 차 한 대.

"세영이다!"

두 아이가 소리쳤다. 옆 라인에 사는 같은 반 친구 가족이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제발 지금 당장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분명 밖에서 더 놀려고 할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를 만나 반가운 세 아이는 종종거리며 쫓아다니다가 급기야 서로의 집에 초대까지 했다. 어른 없이 아이들만 오면 청소의 부담이 없기에 우리 집으로 초대하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오늘은 세영이 집에서 놀기로 했다. 급히 우리 집의 간식을 챙겨 나와 아이들 손에 쥐어주고 30분 뒤에 데리러 간다고 말씀드렸다.


집으로 들어와 밥솥에 밥을 안치고, 생선을 구웠다. 친구 집에서 놀다 온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서다. 오래간만에 유튜브로 신나는 노래 영상을 보며 식사 준비를 했다.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되어 딸 친구 집 앞으로 갔더니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잘 놀고 있어요. 애들이 더 놀고 싶다는데 다 놀고 나면 집 앞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들어가서 좀 쉬세요."


뜨헉.

내색하지 못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공동현관을 나섰다. 선선한 늦오후 바람이 팔을 감쌌다. 적당히 많은 구름에 해는 가려지고,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비쳤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엔 아쉬운 날씨.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순간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몇 달간 남편은 직장 일로 육아에 참여하지 못했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독서실로 가기 바빴고, 주말은 출근 아니면 독서실이었다. 일곱 살 된 두 딸은 몇 년 전보다 키우기가 훨씬 수월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엄마만의 시간을 허락해 주기는 어려운 나이다. 늘 아이들 곁에는 내가 있었고, 나의 곁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난 이게 답답했다. 자유류운 것 같은데 자유롭지 않은 시간, 충분한 것 같은데 독립적이지 못한 공간, 온전히 나만을 생각할 수 없는 시공간의 연속에 영혼이 축나고 있었다.


며칠간 아이들에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난 것도 이 맥락이었다. 제발 좀 날 내버려 뒀으면 하는데 절대 내버려 두지 않는 아이들에게 화가 솟구쳤다. 제발 알아서 좀 했으면 하는데 절대 알아서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화가 났다.


난 지쳤던 거다.




그런데,

아이의 친구 엄마가 날 살렸다.

그분이 흔쾌히 아이들을 데려가 한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놀려주신 덕분에 난 새소리를 듣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는데

친구 엄마가 선물해 주신 시간 덕분에

다시 힘을 얻었다.


아,

나도 아이 친구들에게 좀 더 마음을 열어야지.

함께 아이를 키워가는 즐거움을 좀 더 느껴야지.


감사합니다, 세영(가명) 어머님.

어머님의 친절이 오늘 저를 구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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