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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공감하다

by 자유로운 풀풀

힘든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들을 힘든 일이라고 명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을 거라 생각했고, 내가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공황증상이 생겼고, 약을 먹었고, 발작버튼이 눌러지면 공황증상이 오는 내 몸을 바라보면서도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인정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모르겠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창살이 있는데 명확하게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회피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직면하기가 어려웠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말은 '희미하게라도 보이는 길이지만 한 발짝 떼기가 힘들다'는 뜻인데 난 그조차도 떠올리기 힘들었다. 방법도 보이지 않고 형체도 알아차리기 힘든 '무언가'였다.


불현듯 템플스테이가 떠올랐다. 조용한 절에 가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고요하게 머무르고 싶었다. 머리를 꽉 조인 벨트를 느슨하게 풀어주면 감정 덩어리가 뭉근하게 떠올라 마침내 부풀어서 터지고는 내 눈앞에 드러날 것 같았다.


친구를 만났다.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물었다.

"왜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싶어? 왜 거기여야만 해?"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다 보니 이유가 떠올랐다.

'모든 생각을 멈춘다면, 일상의 루틴을 강제로라도 멈춘다면 덩어리가 되어 덕지덕지 들러붙은 검은 덩어리를 마주할 수 있을 거야.'


참 희한했다. 이유를 찾고 나니, 템플스테이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었다. 고요히 있고 싶다는 욕망도 사라졌다. 친구의 질문과 친구의 '그럴만하다'는 침묵의 머무름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검은 덩어리를 부옇게 만들었다. 이런 게 공감인가? 친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겠다는 상투적인 위로도, 그런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라는 편 가르기도.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는 그저 물었고, 그저 들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그 순간의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알아차렸을 뿐이다. 내가 이런 마음이었구나, 내가 이런 생각이었구나. 그리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고, 다음날 눈을 떴을 때 템플스테이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 잘 살았다는 자기 인정과 하루를 잘 채우자는 기쁨이 자리 잡았다.


공감은 여러 형태가 있다. 난 여러 형태의 공감 중 '머무르며 침묵하다'의 힘을 친구를 통해 알았다. 말이 필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임도 필요하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열리고, 묵은 감정이 흘러갔다. 애써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를 아끼는 사람과 함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공감은 시작되고, 공감은 충분하다.


내가 그랬듯, 친구도 그랬으면 한다.

친구의 머무름이 내게 공감이었듯, 나의 머무름도 그녀에게 공감이었기를.

침묵 사이의 많은 말들이 그녀와 나의 공감을 해치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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